2013.06.09.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설교/로빈31세
http://robinbox.net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03
인생 뒤에 남는 것(삼상 4:15-18)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4장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4장 15-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5 이제 엘리는 구십팔 세더라. 그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이르되, 나는 군대에서 나온 자니이다. 내가 오늘 군대에서 도망하였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매
17 그 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또 백성 가운데는 큰 살육이 있었으며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니라.
18 그가 하나님의 궤를 언급할 때에 엘리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옆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이는 그가 노인이요, 또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라. 그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하였더라.
오늘 저는 “인생 뒤에 남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2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을 훑어보면서, 엘리의 일생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인생 뒤에 남는 것”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요?
오늘의 주인공인 엘리 제사장은 매우 비통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장수하였고, 58세에 이스라엘을 재판하기 시작하여, 40년간 재판하였습니다. 그는 무려 40년간을 주의 제사장으로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없지만, 우선 오늘 말씀의 통해 그의 죽음이 너무나 비참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상 4장 15절에,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17절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였는데 패배하였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마저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 모든 비극을 들을 때 의자에서 뒤로 넘어서 목이 부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 아들들의 손도 잡아보지 못했고, 유언의 말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40년간 섬긴 사람의 죽음이라고 할 때, 이처럼 갑작스럽고 슬프고 비극적인 죽음이 또 있을까요?
우리 함께 19-22절을 보시겠습니다.
19 그의 며느리 곧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가져 해산할 때가 가까웠더라. 그녀가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구부린 채 산고를 겪었으니 이는 그녀에게 고통이 임하였기 때문이더라.
20 그녀가 죽을 때에 그녀의 옆에 섰던 여인들이 그녀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녀가 응답하지도 아니하며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21 말하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며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더라.
22 또 그녀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엘리 제사장의 비극은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날 그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주의 궤도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산고의 고통에 비통함까지 더해진 가운데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영광이 떠났다.”라는 의미인 “이가봇”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엘리 제사장의 죽음 뒤에 남은 것은 슬픔과 비통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잘 사는 것보다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서서, 일생을 돌아보았을 때, 자신이 남겨놓은 것을 볼 때, 후회보다는 만족스러운 일들이 더 많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앞의 내용으로 가서 엘리 제사장의 생전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나와의 만남
먼저 우리 사무엘기상 1장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엘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취하여 있으려느냐? 네게서 포도주를 치우라, 하매
여기서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첫 번째 대사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취한 줄로 생각하여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7절에서 오해가 풀리고 나서, 한나를 축복하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먼저 다가서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면 단호하게 책망을 하고, 자신이 오해하여 잘못 알았던 것이 있다면, 금새 인정하고 오히려 축복을 하는 매우 단순한 믿음을 가진 좋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엘리 제사장이 어린 아이 사무엘을 맡아서 양육하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양육하고, 실로에 있는 주의 집에 그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어찌 보면 엘리 제사장에게는 반가운 일이라기보다 매우 성가신 일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소년 정도는 되어야 일도 가르치고, 일도 시킬 수 있을 텐데, 당시에 데려온 사무엘은 너무나 어렸기 때문입니다. 주의 집이 어린이집도 아니고, 엘리 제사장은 매우 귀찮고 성가신 일로 여겨, 한나와 사무엘을 쫓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기꺼이 주님께 드려진 어린 영혼을 마음을 다해 돌보고 섬겨주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엘리 제사장에게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더라.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였더라.
아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잘못된 자를 책망하고, 불쌍한 자를 위로하며 축복하던 엘리 제사장, 어린 아이 사무엘을 기꺼이 맡아서 돌보고 양육하였던 엘리 제사장이 어찌하여 자기 아들들은 이렇게 키웠다는 말입니까? “벨리알”이라는 것은 사악함, 공허함, 멸망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벨리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주님 앞에 더럽고 가증한 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었고, 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주를 알지 못하는 벨리알의 아들들이라고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13-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제사장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이 이러하였더라. 곧 어떤 사람이 희생물을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종이 살이 셋 달린 고기 갈고리를 손에 가지고 와서
14 납작한 냄비나 솥이나 가마솥이나 깊은 냄비에 그것을 찔렀으며 그 갈고리로 끄집어내는 것은 제사장이 다 자기를 위해 취하였더라. 그들이 실로에서 거기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더라.
15 또한 그들이 기름을 태우기 전에 제사장의 종이 와서 희생물을 드린 사람에게 말하기를, 제사장을 위해 구울 고기를 주라. 그가 네게서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를 받으려 하노라, 하다가
1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당장 기름 태우는 일을 그만두게 하지 말고 그 뒤에 네 혼이 원하는 만큼 취하라, 하면 그가 그에게 응답하기를, 아니라. 너는 지금 내게 그것을 줄지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그것을 빼앗으리라, 하였더라.
17 그러므로 이 청년들의 죄가 주 앞에 심히 컸으니 이는 사람들이 주의 헌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더라.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의 많은 부분들이 제사장의 양식이 되도록 지정되었습니다. 어떤 헌물은 완전히 불태워버리기도 하고, 어떤 헌물들은 부위별로 드려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남은 부분들은 제사장에게 음식으로 제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이 행한 일은 고기를 삶기 전에, 기름을 태우기 전에, 다시 말해서 헌물로 드려지기 전에 먼저 꺼내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물을, 하나님보다 먼저 취하여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그들의 죄가 심히 컸고, 그들이 주의 헌물을 멸시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제사장 엘리의 가정에서 이렇게 패역한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우리 함께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엘리는 매우 늙었더라. 그가 자기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그들이 회중의 성막 문에 모인 여인들과 함께 누운 것을 듣고
정말 요즘 막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이 말씀에 기록된 상황이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주의 제사장들이 성막 문 앞에 모인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의 헌물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주의 말씀을 멸시하였고, 주님 자신을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23-25절을 보시겠습니다.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한 행동을 이 온 백성으로부터 듣느니라.
24 아니라. 내 아들들아, 내가 듣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 너희가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도다.
25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재판관이 그를 재판할 터이나 사람이 주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을 죽이려 하셨기 때문이더라.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책망하였으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는 가정에서 일어난 가정적인 죄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 가운데 소문으로 알려진 공개적인 죄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공개적인 범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처벌하여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보호하고, 순수성을 지켜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소문이 좋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매우 약하게 타이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25절의 마지막에서 조금 특이한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그들을 죽이려 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엘리의 아들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돌이키지 못하게 막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가 멸망하지 않고 돌이켜서 살게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함께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11절을 보시겠습니다.
10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말을 믿게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의 사랑을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을 보내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로 엘리의 아들들도 이러한 상황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의 집을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주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을지라도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을 보내어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다시 사무엘기상 2장으로 돌아오셔서 29-30절을 보시겠습니다.
29 너희가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희생물과 내 헌물을 발로 차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귀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헌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 자신을 살지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참으로 내가 말하기를,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서 영원히 걸으리라, 하였으나 이제 주가 말하노라. 내가 결단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소홀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귀중히 여긴 것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가정이 하나님을 첫째로 존중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온 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한 아합 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간음과 살인으로 범죄한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주님 앞에 겸손히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34-3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다 한 날에 죽으리니 그들에게 닥칠 이 일이 네게 표적이 되리라.
35 내가 나를 위하여 신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는 내 마음과 내 생각에 있는 그대로 행하리라. 내가 그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앞에서 영원히 걸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이 주님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바로 그 아들들을 한 날에 죽게 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대로 행하는 다른 신실한 제사장을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엘리의 가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또 한 번의 경고를 주셨습니다. 바로 자신이 양육하고 가르쳐온 사무엘을 통하여 경고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지만,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세 번이나 잠자리에서 일어나 엘리 제사장의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주님께 응답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사무엘은 바로 엘리 제사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3장 11-13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서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두 귀가 그것으로 인해 울리리라.
12 그 날에 내가 엘리의 집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을 그에게 다 행하리라. 내가 시작하면 또한 끝을 내리라.
13 그가 알고 있는 불법으로 인하여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리라고 그에게 말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그가 그들을 억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아이 사무엘은 자신의 노 스승에 대한 두려운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엘리 제사장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함께 17-18절도 보시겠습니다.
17 그가 이르되, 주께서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원하건대 그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네가 만일 그분께서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 중에서 하나라도 내게 숨기면 하나님께서 네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18 사무엘이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아니하매 그가 이르되, 그분은 주시니 그분께서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엘리는 사무엘을 통하여 두 번째 경고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반응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주시니 그분께서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실 것이니라.” 이 말은 굉장히 영적인 것 같고, 겸손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말처럼 교만하고 고집 세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여기에서 옷을 찢지도 않았고, 통곡하지도 않았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될 대로 되라지.”와 같이 무책임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멸시하고 자기 아들들을 더 귀히 여긴 것에 대해서 돌이키지 않았고, 그 결과, 그의 일생은 죽음 앞에서 비참한 열매는 남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적용
오늘 우리들의 삶을 한 번 돌아보기 원합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수많은 말씀을 들었고,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권면의 말씀, 권고와 명령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듣기에 좋든지 나쁘든지, 받아들이기가 쉽든지 어렵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두려워하며 무릎 꿇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첫째로 존중하는 자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엘리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몇 가지를 적용하면서 말씀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엘리가 하나님보다 더 존중하고 귀하게 여겼던 아들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헌물로 드리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부활의 모형으로 돌려받았지만,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귀하게 여기다가 오히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진정 위하는 것이고, 무엇이 진정 귀하게 여기는 것인지 우리가 지혜롭게 판단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을 첫째로 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 뒤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우리는 엘리 제사장이 두 번의 명확한 경고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돌이키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어찌하여 엘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경고를 듣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들의 아버지인 엘리 제사장이 경고를 듣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고 배우며 자라난 아버지의 모습대로 그들은 경고를 듣지 않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시험에 넘어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뒤에 경고의 말씀을 들었을 때, 즉시 겸손하게 반응하며 돌이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때는,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를 주시는 시간인 것을 우리가 잊지 않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엘리 제사장이 반드시 아들들에게 가르쳤어야 하는 내용들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에게 주의 헌물을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반드시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그들은 주의 헌물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배를 채우려고,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일인지를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유치원 때부터 헌금하는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헌금을 천 원씩 했었는데요. 저의 어머니께서는 토요일 밤에 새 돈으로, 빳빳한 신권으로 된 천 원을 주시면서 미리 성경책에 끼워놓으라고 주셨습니다. 신권이 없을 때는 심지어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려서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었고, 별다른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주 일깨움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오늘 우리가 엘리의 아들들처럼 멸시하지 말아야 할 헌물은 어떠한 짐승이나, 단지 돈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들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주님의 헌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우리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유익과 편의를 위해 탈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의 헌물을 귀하게 여기는 믿음과 삶을 반드시 배우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르치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 사무엘기상으로 돌아가셔서 8장 1-3절을 보시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 사무엘이 늙어서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삼으니
2 이제 그의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재판관이 되니라.
3 그의 아들들이 그의 길들로 걷지 아니하고 옆으로 돌이켜 이익을 추구하며 뇌물을 취하고 재판을 굽게 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엘리의 뒤에 남은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은 자신이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말씀대로 주님 앞에 살 수 있었지만, 자녀들을 교육하는 면에서는 엘리 제사장의 뒤를 그대로 따라간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은 주님 앞에 바르게 걸었지만, 정작 자기 자녀들은 방치하고 가르치거나 훈련하지 않아서 이익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오늘 세상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국에 앞서 주님께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과연 주님이 주신 오직 한 번뿐인 짧은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고 있습니까? 엘리 제사장은 최소한 사무엘을 양육하여 이스라엘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구약 > [09]사무엘기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무엇을 떠나보낼 것인가(삼상 6:20) (0) | 2017.07.25 |
---|---|
[#05] 좋은 질문 나쁜 결론(삼상 4:1-3) (0) | 2017.07.25 |
[#04]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삼상 2:35) (0) | 2017.07.25 |
[#02] 반전의 하나님(삼상 2:8) (0) | 2017.07.25 |
[#01] 응답하시는 하나님(삼상 1:27-28) (0) | 2017.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