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8.12.17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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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길(딤후 2:22)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22절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우리
우리는 본래 우리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길이며, 거짓과 교만과 더러움으로 가득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으며 영원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더러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비록 연약할지라도, 비록 자주 넘어질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구하는 길로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우리들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고 생각했지만,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받아서 읽고 있는 젊은이 역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자를 부르셔서 영광의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게 하신 은혜에 감격해 하는 디모데라는 청년이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역시 주님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우리 갈보리침례교회가 이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격려하시고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의 길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자 할 때 우리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늘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 중의 한가지가 바로 청년의 정욕입니다. 사도 바울은 혈기왕성한 디모데를 향해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인 디모데에게만 정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는 육신의 정욕과 욕심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육신의 많은 정욕들 가운데 특별히 명예욕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갈라디아서 5장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갈 때에 우리에게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육신의 정욕 가운데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하기 원하고, 드러나기 원하고, 두각을 나타내기 원하고, 높여지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젊을수록 그러한 욕망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항상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놓고 논쟁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더 큰 자라고 누누이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가난하고 낮아지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라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도 더욱 낮아지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침례자 요한이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 4:30)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고 높이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나, 교제를 나눌 때나, 간증을 할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시길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는 않지만 주님이 보시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 주님의 일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모르지만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칭찬하실 그 칭찬을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때론 오해하더라도, 사람들이 나쁘게 평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주님을 잘 따라 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자신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는 길이요,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참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의미가 없고,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참되게 평가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얻는 칭찬과 영광을 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러한 모든 영광이 다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칭찬과 영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실 그 날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낮아질 수 있고 더 쇠잔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만이 높여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이제, 잠시 순수한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마치 바다 속의 산호초가 그대로 보이는 맑은 바닷물같이 투명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이란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을 말합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예는 예라고 말하고,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모습 그대로, 조금 모자라면 모자란 모습 그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모습 그대로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이 곧 순수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며 믿을 수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자신이 대하는 사람에 따라 말이나 행동이 바뀌지 않고 한결 같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어떤 숨은 의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고 뒤에서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게 될 때 우리는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순수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화려한 장식으로 자신을 두르고 있지만 실제로 생명의 열매를 맺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가져다가 붙여놓은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장식품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한 참된 열매입니다.

다같이 야고보서 3장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러우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
세상의 지혜는 자신을 포장하고 속임수를 사용하지만, 위로부터 난 지혜는 순수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평화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게 될 때에 우리는 긴장을 풀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무엇인가 요구하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위선을 부리지 않습니다. 
높이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게 되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군림을 하려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위선을 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정치인들을 볼 때 순수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함께
우리가 우리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을 대할 때 가장 주의해서 새겨야 할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는 주님을 나 홀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형제 자매들과 함께 따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우리 주님은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까? 시간과 공간의 아무런 제약이 없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배가 고프기도 하시고, 피곤하여 잠들기도 하셨습니다. 
과거에 로마 카톨릭이 침례성도들을 맹렬히 박해하고 죽일 때에 사람을 벽 속에 가둬놓고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벽 속에 갇힌 사람은 무릎이나 허리를 굽힐 수도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큰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야 했습니다. 나중에 한 성도가 갇혀 죽었던 감옥의 벽에서 작은 그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그림이었는데, 십자가의 동서남북에 이렇게 쓰여진 것입니다.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라고 각각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다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벽 속에 갇혀서 모든 활동에 큰 제한을 받은 이 성도는 그러한 환경 가운데 우리 주님의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깊고 높은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려고 얼마나 큰 제한을 감당하셨는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하시고자 하늘의 영광을 떠나셨고 답답하고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한 디모데를 권면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형제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나와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어떻게 나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것은 나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나 혼자 성경 읽고 찬송하고 기도할 때는 십자가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 좋으면 조금 어울리고, 기분 나쁘면 홀로 분리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이 더럽고 천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는 그 누구와 함께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따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다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도전을 주고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번 조별모임에서 교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함께 나누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교제란 무엇입니까?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경구절들만 서로 암송해서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 교제입니까? 서로 찬송가 가사나 설교 말씀을 나누는 것만이 성경적인 교제입니까? 마음에 가득한 어려움이나 불만을 전혀 말하지 않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말만 하는 것이 성격적인 교제입니까? 또는 지체들을 만날 때, 오늘 아침에 말씀보고 기도하셨어요?, 형식적으로 하신거 아니고 정말 은혜로운 시간이었나요?, 라고 물어보는 것이 성경적인 교제이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진실된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기 원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먼저 헛된 영광을 구하고 경쟁하며 시기하는 마음을 다 버려야 합니다.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꾸밈없이 서로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교제를 통해 안식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늘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주님을 따르도록 함께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바리새인들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는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안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이키고 주님을 따르는 회개와 회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며, 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지금도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에서도 괴롭지만, 머리에서 열이 나면서 머리를 긁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온 몸을 긁게 됩니다. 어릴 때는 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많이 혼났습니다. 너무 매워서 먹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억지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커다란 배추김치를 손으로 들고 죽죽 찢어서 밥에다 싸서 한입 가득 물고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비록 내가 매워서 싫어하는 김치이지만 참 맛있게 보인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치만 니라는 한 형제님은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 읽고 기도하셨어요?"라고 물으면서 왜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하는지 주님과의 교제가 왜 중요한지, 왜 주님께 순종을 해야하는지 권면하고 설명해 주는 일도 귀한 일이지만, 그 형제 앞에서 김치를 죽죽 찢어서 먹음직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섬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한다는 권면을 받으면 "기도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 자매가 기도하면서 주님과 어떻게 만나고 교제했는지 간증을 하게 되면 우리는 "나도 저 형제처럼 기도하고 싶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 자신의 간증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저 사람이 만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한 간증을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위대한 순종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고, 그 간증을 듣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순종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는 갈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가 돌이킨 간증을 하는 이유는 그 간증을 듣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나도 저 형제처럼 용기를 내서 다시 돌이키고 주님을 따라야겠구나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넘치는 풍성함을 흘려보내고 나누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빈손으로 온 지체들도 부담 없이 안식하며 격려 받고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은혜가 넘치는 지체도 더 큰 은혜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고린도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온 우주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도 하시지 않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믿음을 지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 선택의 의지를 주셨고 결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사람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지옥에 가기로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믿음이 큰 지체도 있고 연약한 지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믿음으로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고 지배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지체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함께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에게 함께 주를 부르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 문제가 많고 연약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더 많이 부어져서 형제 자매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11.19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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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해의 4계절(딤후 2:15)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우리 교회는 지난 달 조별 모임에서 "성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공부를 했었고, 지난 주 수요일과 주일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 또한 교회의 흐름에 맞춰서 성경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들었고 또 잘 아시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좋은지, 방법적인 부분들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경 이해의 4계절"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1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4계절이 있는데 이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1년 내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해야하는데, 말씀을 대하실 때마다 늘 기억하기 좋으시라고 제목을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성경 이해의 4계절, 먼저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본문 설명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하나님께는 두 종류의 일꾼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일꾼이고, 한 종류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인정을 받고 어떤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할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데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연지 자매를 사랑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제가 좋아하는 튀김을 사준 적이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연지 자매를 사랑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핸드폰 줄을 사줬는데 연지 자매는 핸드폰 줄이 거추장스럽다고 아예 하고 다니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이 소용이 없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의 기준에 우리가 맞춰야 합니다. 
모두가 잘 아시는 이사야 55장 8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사랑과 긍휼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그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인정하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온 우리의 인생 기간 동안 우리가 여러 가지 배움과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지식과 관념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생각은 고집할 것이 아니고, 과감하게 버리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미혹이 가득한 세상
오늘날 이 세상은 정말 미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 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진화론이라는 속임수도 있고, 이성주의나 인본주의와 같은 철학적인 속임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론이나 풍유적 해석과 같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속임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혹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분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제 눈에도 글이 들어와서 보게 되었는데, 그 글에는 대략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창조자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 우주는 당신의 편에 있고 당신은 우주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정도 읽고 눈을 감으면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창조자라고 하다니, 참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그 책에 눈이 가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는 놀랍게도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그러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강렬하게 우주를 향하여 선포하고, 또 그것을 이미 당신 자신의 것으로 의심하지 말고 믿으면 정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고,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으로 벅차오르도록 고무시키는 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제목을 보니 시크릿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비밀이란 뜻이죠? 요즘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네이버에서 시크릿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여러 가지 글 중에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 이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시크릿이란 책 때문에 기독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 책을 읽고 난 한 학생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점점 흔들리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면서 오히려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글을 읽고 기독교분들이 뭐라고 반박하시겠지만, 그것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관점이 아니겠냐고 적혀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날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힘든 마지막 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사탄의 미혹하는 역사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지 말고 아직도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선포할지 모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이해의 4계절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성경의 계시를 받기로 마음을 먹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눈을 감고 한 번에 성경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마침 마태복음 27장 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그 남자는 이상한 구절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다시 조금 더 앞부분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37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그 남자는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더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27절을 짚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 남자가 어떻게 했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 일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 이해의 4계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문자적 해석, 두 번째는 문법적 해석, 세 번째는 문화적 해석, 네 번째는 문맥적 해석입니다.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하는데 꼭 이 4가지 원칙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원칙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이 4가지 중에서 생략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4가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어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이 4가지 원칙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오류와 속임수에 빠지고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기록된 말씀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달리 사람에게 말하고 글을 쓰는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만약 성경을 읽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해석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경을 주신 의미가 전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분명한 말로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군가가 가르치고 해석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칠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면, 우리는 문자적으로 칠일 동안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칠일이 문자적인 칠일이 아니고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천년 동안 지상 왕국이 있을 것이라 말씀한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천년이란 기간 동안 지상에서 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천년이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고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 기록한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적으로 오셨다고 가르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지옥은 문자적인 지옥을 의미하고, 성경에서 하늘이란 문자적인 하늘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과 미혹의 속임수들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단어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어지럽혔기 때문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서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고,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내 생각을 추가하지 말고 문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법적 해석
또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어의 문법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는지, 과거 시제로써 이미 이루어진 일인지 아니면 미래 시제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인지,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한 예로 갈라디아서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면서 "네 씨에게"라고 단수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바로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는 것은 "씨들에게"라고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씨에게"라고 단수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대충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고 차분하게 또 분명하게 읽으며 이해해야 합니다.


문화적 해석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원칙은 바로 문화적 해석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기록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원전 1500년 전에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 90년 사도 요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약 1600여년의 기간을 흘러오면서 40여명의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자들의 모든 인간적인 특징을 사용하시면서도 아무런 오류가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록할 수 없는 놀라운 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왕이나 의사, 서기관, 제사장과 같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농부나 어부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로운 때에 살면서 성경을 기록했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나고 포로로 잡혀갈 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우리는 그 당시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가 현대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보다는 먼저 그 당시에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구약의 대언서라면 그 대언서를 읽는 구약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알아야하고, 신약의 서신서라면 그 서신서를 읽는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3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마치신 후에 "일어나라. 우리가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15장에서는 겟세마네로 가는 길 가운데 포도원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포도나무를 가리키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니"하시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각 효과와 함께 위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6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지옥"을 연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구원을 잃어버려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포도원을 지나면서 제자들은 버려진 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불이 붙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쓸모없는 가지들을 모아서 불로 태웠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처럼 버려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쓸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 중에 아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만, 불타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저렇게 쓸모없이 버려지는구나, 하고 이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두 아시지만 우리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또 성령님께서는 역사적인 어떤 사실이나 배경에 대해서 우리에게 조명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적인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의 도움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많은 선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선물들은 바로 신실한 성경 학자들이고 그들이 남긴 많은 연구 자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항상 틀릴 수 있고, 성경은 사람의 해석대로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책을 참고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다른 부분은 버리고, 성경과 합하는 부분은 받아들여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맥적 해석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마지막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맥적 해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 어떤 단어나 문구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4편을 보시겠습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 이 말만 떼어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의 어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구절 전체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 구절의 앞뒤에 어떤 말씀이 어떤 주제로 흐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의 전체적인 흐름도 보아야하고, 때로는 그 책 자체의 주제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의 조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24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이 이 말씀을 사용해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아닌, 행위로 받는 구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라고, 누가 구원을 받느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이해의 4계절을 떠올려야 합니다.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 해석을 해야합니다.

먼저 우리는 "끝까지"라는 단어와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끝까지"라는 단어가 우리의 인생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기간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환경이나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제자들이 세상 끝의 표적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시는 4절에서 바로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속이는 자들이 얼마나 대범한지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쓰여진 말씀을 가지고 속이고 있습니다. 마치 요즘 우체국이나 은행을 가장해서 전화를 하는 사기꾼들과 비슷합니다. 실제로는 자기들이 사기꾼이면서 당신이 사기를 당했으니 신상정보를 제공해서 잘 해결하자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이 고통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14절에 보면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면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맥 가운데서 시작이과 끝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소한 "끝까지" 견딘다고 했을 때는 어떤 고통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21절에 보시면 이 고통의 기간은 바로 "큰 환난", 즉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전무후무한 대환란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16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20절에 보면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대환란을 피하여 도망하고 도피하는 유대인을 향한 실제적인 구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대환란이라는 주제가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인 조화를 살펴야 합니다.

구약 성경 요엘서 2장 32절에서도 이것과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가 행위로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지켜서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고, 대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이 끝까지 견디고 산으로 도망할 때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출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
마지막으로 베드로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나니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은 교묘히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므로 아주 확실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오직 3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재림 때의 모습을 보여주신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짓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예 대사도 없습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그 놀라운 광경 가운데 직접 말을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직접 들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날마다 간증하고 책도 쓰고 세계방방곡곡을 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내가 귀로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라고 유언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는 만큼 우리의 믿음은 더 자라날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으로 읽고 이해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10.15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한 가지 아는 것(롬 8:28-30)


본문 : 로마서 8장 28-30절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한 가지 아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가 알거니와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말씀은 로마서가 반지라면, 로마서 8장은 반지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너무나 귀한 진리가 담겨 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저의 짧은 입으로 너무나 깊고 풍요로운 진리의 말씀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만큼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믿거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지 모르고, 죄인을 영원한 지옥의 불길 가운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셔서 큰 구원을 이루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만 있다면 누구나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이 크다면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크다면 역시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이나 감정을 통해서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들에게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 6:39)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한 만큼 주님에 대한 많은 증언들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멸망케 하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랑과 열정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식을 따르지 않은 열정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열심을 다해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지식과 사랑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8장 28절에서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면서 지식과 사랑을 동시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교만하고 또 이기적이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이용하면서 살아왔고 날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 짓기를 숨쉬듯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돈과 쾌락과 안락한 삶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그분을 대적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십자가에 처형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러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찾아와 주셨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크게든 작게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목적에 따라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목적에 따라 부르셨습니다. 저도 전에 삼겹살 집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저를 많이 불렀습니다. "여기요" 그 때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 주문하고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아무 이유 없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믿음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큰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새 생명의 시작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출발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부끄럽고 자신 없는 고백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두려운 심판을 우리 대신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9절과 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정하사
29절과 30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우리들을 미리 아시는 가운데 우리가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엡 1:4,5).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칼빈주의 예정론"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거나, 어차피 택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예정하심을 말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자유의지와 순종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5살짜리 아이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형상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가운데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셔서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랑하며 교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사람의 대표가 되어 죽게 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감당하시고 완전히 깨끗케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이 주어지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과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되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4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지막 아담입니다. 이것은 첫 사람을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와 사망을 사람의 대표로서 완전히 종결시키시고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47절에 나온 것처럼 "둘째 사람"이 되십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주님이 "둘째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아담에게 속한 죄인의 형상과 사망을 끝내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둘째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제 4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9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 
우리가 로마서에서 읽은 말씀과 같이 여기서도 우리가 하늘에 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내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지만,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읽은 이 말씀에서도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하고 미래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지니게 되는 그 날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우리에게는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육신 가운데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는 그 날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대로 표현해 보자면,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썩어질 아담의 형상이 썩지 아니할 주님의 형상에 의해 삼켜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23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25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너무나 놀라운 것은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나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휴거의 소망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썩음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세상과 육신과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바로 더럽고 추한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멸망 받고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많은 형제들로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들을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나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의롭다고 선언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고, 예수님의 형제들로 삼으신 것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을 상속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다같이 이사야 42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주니 그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내 찬양을 새긴 형상들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또한 48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그것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게 자신을 높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였을 때 바빌론을 통한 심판을 말씀하셨고,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였을 때 7년 동안 짐승과 같이 살아가게 하셨으며, 헤롯이 사람들에게서 신처럼 추앙을 받을 때 즉시 그를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영광을 구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영광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더러운 우리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고, 의롭다 하신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다같이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31절은 "그런즉"이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죄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광까지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38절과 39절도 보시겠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벅차고 감동스러운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되고 죄인되었던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로마서를 받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피의 네로라고 불리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도시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유대교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35절부터 37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아니라.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들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어질 형상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완전하게 입을 휴거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영광을 상속받을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경과 어려움은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속도 좁고, 한 저 자신을 보면서 늘 낙망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말할 것처럼 저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었고,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비천하고 눈멀고 헐벗은 자였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문제 많고 구제불능인지 몰랐는데, 하나님은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을까 하면서 주저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미리 아신 자들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저를 부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미리 아시고 저를 부르셨기 때문에 변함 없이 저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날마다 감격하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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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8.09.17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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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헌신(롬 12:1-2)


본문 : 로마서 12장 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온전한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비록 "자매들아"라는 말은 없지만 자매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주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천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나아가서 형제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다같이 히브리서 2장 10절부터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0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밝히 보이고 교회의 한가운데서 노래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시며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완전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더러운 우리들을 거룩히 구별하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때에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더럽고 미천한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누구든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히 구별되고 용서받은,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얻은 모든 사람을 향해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정당성이나 권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힘입어 간청"하고 계십니다. 이 긍휼에 대해서는 "그러므로"라는 말과 함께 로마서 12장의 앞부분에 있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원래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기록상으로는 로마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순절 날 로마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고, 명절이 끝난 뒤에 그들이 돌아가서 로마 교회를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처음에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처음에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시작으로, 또한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1장 13절에서도 바울이 직접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들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들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존귀히 여기나니"

아무튼 초기의 로마 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방인 성도들이 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AD 49년에 로마의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 로마 추방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칙령으로 인하여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던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하고 떠나와서 고린도의 본도라는 곳에서 사도 바울과 만나게 됩니다. 이제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이 모두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이방인 중심의 교회로 자리를 잡았고, AD 54 년에 네로 황제가 집권하면서 이 추방령은 해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로마 교회의 상황은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상황에서, 원래 중심을 이루었던 유대인들이 돌아오면서 갈등과 마찰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자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로마서 11장은, 9장, 10장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원래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연방 국가 밖에 있던 외인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서 분리된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복음에 불순종하고 그들의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 3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2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잠시 제쳐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또 다시 이방인들로 인해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긍휼에 대하여 기록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견딜 수가 없어서 찬양을 터뜨렸습니다.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35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다시 보답을 받겠느냐?
36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었던 우리들에게까지 그 놀라운 긍휼과 사랑이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교만함과 더러움과 어리석음 가운데 방황하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생명과 놀라운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생명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긍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너희 몸을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손과 발과 눈과 귀와 입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 아니라 실제로 나의 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6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 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저것을 다 멸하시리라. 이제 몸은 음행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주를 위해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해 계시느니라."

우리의 몸은 음행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음식을 위해 있지도 않으며 오직 주를 위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인상적인 표현은 주님께서도 우리의 몸을 위해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만을 위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몸을 위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취하여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씀하지 않고,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제 19절과 2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9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를 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희생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담배나 술이나 마약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왜 문신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이 몸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되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모습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거룩히 구별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물 만을 받으십니다. 다함께 말라기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말라기 1장 6절부터 8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6 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만군의 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을 공경하나니 그런즉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빵을 내 제단 위에 드리고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상은 업신여겨도 된다, 하는 점에서 그리하였느니라. 
8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눈 먼 것을 희생물로 드리면 그것이 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다리 저는 것과 병든 것을 드리면 그것이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네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또한 10절 뒷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에서 헌물도 받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에 나오는 타락한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거룩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지도 않은 더러운 빵과 희생물을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영적 제사장입니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제사장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믿는 자들이 다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 제사장이며, 또한 우리 자신이 곧 희생물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우리를 위한 화해헌물로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바로 다음 구절인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온 것처럼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세상에 동화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안되고 뭐든지 적당히 해야 좋다는 우리의 생각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세상도 조금 하나님도 조금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이곳에 모인 우리 형제 자매님들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의 힘입어 생각의 변화를 받아 오직 우리 자신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기 원합니다.


살아 있는 희생물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는 멀리 떨어져있던 사람들이었으나 말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긍휼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놀라운 긍휼을 힘입어 우리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우리는 실제로 희생물을 드려본 적은 없지만, 구약성경을 통해 희생물이 어떠한 모습인지 알 수 있습니다. 희생물이라는 것은 희생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듯이 반드시 죽음을 수반합니다.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물은 생명과 피를 다 바치고 불 가운데서 태워져야 합니다. 다같이 레위기 3장에 나타난 화평 헌물의 희생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만일 그의 봉헌물이 화평 헌물의 희생물이며 그가 그것을 소 떼에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주 앞에 드릴지니
2 그가 자기 헌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의 주위에 뿌릴 것이며
3 그는 또 그 화평 헌물의 희생물 중에서 주께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드릴지니 곧 그는 내장을 덮은 기름과 내장 위의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 위의 꺼풀을 콩팥들과 함께 취할 것이요,
5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우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태우는 희생물 위에서 태울지니 그것은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희생물로 드려진 소의 피는 제단의 주위에 뿌려집니다. 그리고 속에 있는 모든 내장들을 다 가져다가 제단 위에 있는 희생물 위에서 불태우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다 태울 것이 분명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내장을 일일이 다 언급하시면서 따로 분리하여 희생물 위에 올려놓고 태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희생물로 드려질 때에 우리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꺼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속에 있는 야망과 욕심과 권리와 의견을 다 불태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두 콩팥과 간 위의 꺼풀과 모든 기름을 다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침례성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침례를 받을 때 한번 나의 옛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혀서 끝나버렸음을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물속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우리의 옛 생명이 아닌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임을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린다는 것은 다시 한번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 나의 계획, 나의 목적, 나의 길이 다 사라지고 불타 없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필수적이고,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콩팥과 간과 내장은 다 주님 앞에서 꺼내어지고 불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콩팥 위의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같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 끼어들어오는 탐욕과 높아지려는 야망과 명예심을 다 불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희생물이란 이와 같습니다. 살아 있으나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합당한 섬김인 것입니다. 우리는 제단 위에서 우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태우고 죽음에 넘겨지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형제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초청입니다. 
우리의 본래 위치는 이방인들이며, 또 죄로 가득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본래 운명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절규하며 통곡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아오면서 많은 경우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이요 비천한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자신의 긍휼을 힘입어 우리에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나 결심만을 원하지 않으시고 실제적인 우리 몸의 드려짐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므로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예비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물은 속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꺼내놓고 불태워집니다. 우리는 우리 몸 안에 숨겨진 모든 의도와 동기들을 다 꺼내놓고 주님 앞에 불태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제단 위에서 불타는 희생물로서 온전히 죽은 자가 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저 자신을 이렇게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세상과 동화되거나 타협하지 아니하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원합니다. 저의 결심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오직 제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긍휼만을 의지하여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온전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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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8.08.2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마 20:28)


본문 : 마태복음 20장 28절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0장 28절 한 구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뒷부분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어리석고 탐욕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즉 몸값으로 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사망과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주 예수님의 몸값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믿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목적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듯이,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사시는 목적 또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며 사람들을 죄와 지옥으로부터 건져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손과 발과 입술과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의 앞부분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비록 육체적으로 이 땅에 살고 계시지는 않지만 믿는 우리들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실 때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오늘의 본문과 같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우리가 만약 참으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린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와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가지는 바로 섬기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다함께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부터 4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38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8 이제 그들이 갈 때에 그분께서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하는 어떤 여자가 그분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니라.
39 그녀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더니 그녀도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나
40 마르다는 섬기는 일이 많아 괴로워하더라. 그녀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섬기게 내버려 두는 것을 주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런즉 그녀에게 명하사 그녀가 나를 돕게 하소서, 하거늘
41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김봉중 집사님께서 여름수련회 기간에 이 말씀으로 귀한 은혜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비록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mp3를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분주하게 섬기는 것보다 조용히 십자가 앞에 머물러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고 배우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가 바로 섬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이 마르다와 마리아 말씀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분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잘못 적용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면서 마음을 어려워하거나,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김봉중 집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각자의 마음이 많은 일로 분주하기보다 십자가 앞에 머물러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우리의 내적이고 영적인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결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덜 영적이고,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욱더 영적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육신적인 것이라면 가장 많이 수고하고 날마다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 사도 바울, 많은 일로 수고하고 염려한 사도 바울은 가장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적용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주님의 말씀을 펴고 주님과 교제할 것이고, 그 뒤에 여전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주님의 일들을 넘치게 섬기며 하루를 살아갈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적용한 사람은 바쁘고 분주한 시간에도 역시 마음 속에서 주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 모든 자매님들이 마리아처럼 되겠다고 식사당번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 교회 모든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주일 오전성경공부 시간이나 수련회 때에 마리아처럼 되겠다고 아이들을 내팽개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42절에 나온 것처럼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라는 말씀을 붙잡고 "오직 말씀 듣는 한 가지만 필요하니까 난 마르다처럼 분주하지 않을거야."라고 하면서 아무도 섬기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영적인 이기심을 변호해서는 안됩니다. 섬김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고 나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인데, 그것은 주님이 있으라 하신 그곳에서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수련회에 가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형제 자매들의 간증도 못 듣고, 교제도 못하고, 말씀도 못 듣지만 주님이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은 그곳에서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전에 아기 돌보기에 들어온 한 자매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캠코더를 연결해서 TV로 집회를 틀어주었는데, 그 자매님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내팽개치고 오히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말씀에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 아이들이 있던 장소는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집회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 자매님의 영적 열망으로 인해 아이들은 계속 혼나고 힘들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혀 마리아답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은 자신이 아기 돌보기 하는 시간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아기 돌보기도 하면서 말씀도 들으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한 것이고, 마리아의 문제는 한 가지를 선택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주님이 있으라 하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원함과 유익을 계산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그 한 가지를 온전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실제 삶 - 가정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섬기러 오시고 자기 자신을 주려고 오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우리도 다른 이들을 섬기며 우리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노력을 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심지어 형제를 위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는데 잘 안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 실제적인 모습들을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갑자기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나타났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고, 또 멀어졌던 형제 자매와 화해하고 새롭게 다가서는 것도 그 열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면서 가정이라는 주제를 초점으로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요즘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새롭게 보고 있는데 참 재밌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부터 아담과 이브를 통하여 시작된 최초의 가정을 볼 수 있고, 가인과 아벨의 형제간의 시기와 살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남편 아브라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순종하는 아내 사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남편에게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게 하고는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다시 남편에게 불평하는 아내 사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생명을 포기하며 순종하는 아들 이삭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야곱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남편 이삭과 너무나 영적이어서 스스로 꾀를 부려 야곱을 축복하려고 작전을 꾸미는 아내 리브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축복을 얻으려고 시기하고 다투는 쌍둥이 형제를 볼 수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자식을 편애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가정의 분열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언급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정에 대한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곧 섬기는 삶인데, 바로 우리의 각 가정을 섬기는 삶입니다.

다함께 누가복음 1장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침례 요한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느니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그리고 16절과 17절은 침례 요한의 사역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6 이스라엘 자손 중의 많은 이들을 주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

여기서 보면 침례 요한의 사역 중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주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돌아온 아버지들의 마음은 자녀들에게로, 각 가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과 회복된 사람들의 마음이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한 면에서는 가정회복 사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어떻게 섬기는가?
다함께 골로새서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과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3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줄 아나니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은 어떤 특정한 일을 하는 삶이라기 보다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은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도 물론 포함되지만, 그것만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는 모든 우리의 생활 속의 일들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일들이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8절로 올라가서 22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8 아내들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
19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주를 매우 기쁘게 하느니라.
21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지니 그들이 낙담할까 염려하노라.
22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우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꼭 교회에 나와서 무슨 일을 섬기거나 캄보디아, 아프리카에 가서만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골로새서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주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을 섬기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나의 선호도와 나의 주장이 모두 못 박혀 죽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원함만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나온 것처럼, 아내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남편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는 말을 목사님이나 영적인 다른 형제가 하는 말보다 더 중요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그렇게 순종하며 따르듯이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의 부족함으로 인해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여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지 말고, 권위를 거슬러 의견을 주장하지 말고, 질서 가운데 순종하고 남편을 지혜롭게 돕는 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19절에 나온 것처럼, 남편에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무엇입니까? 아내에게 무조건 입다물고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상냥하고 젠틀하게 대하는 것 이상으로 아내에게 자상하게 대해주어야 합니다.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지말고 대접받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말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아내는 주님을 섬기는데 조수처럼 따라다니면서 뒷바라지하는 종이 아니고 남편이 섬기고 양육해야 할 사역의 대상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남편상을 버려야 합니다. 원래 남편은 이런거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다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남편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고 돌보시는가를 배우면서 아내를 아끼고 돌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며, 주님을 섬기는 실제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조언자요 돕는 자로 주셨기 때문에 아내가 조언할 때 겸손하게 듣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면서 물리치지 말고 잘 들어주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 나온 것처럼,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와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가정 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저도 자녀된 자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께 긍휼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자녀들은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방 정리를 하고, 일찍 자고,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쁘다고 방에 들어가서 자기 할 일만 하지말고 거실에 나와서 부모님과 대화하며 하루에 있었던 일들과 소식들을 나누고 교제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21절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그것으로 그들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또 피곤하고 귀찮을 때에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아이들과 대화하며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함께 동화책을 봐주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귀찮다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바로잡고, 또 잘했을 때 온 마음으로 칭찬해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아버지상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아버지관을 다 버려야 합니다. 원래 아버지는 이런거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을 다 버리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서 아이들을 섬세하게 사랑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합당하게 아버지의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저는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부모님에 대해 노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듣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이끌어주어야 할 귀한 영혼임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양육해야 합니다.

또한, 어머니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지체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교제하는 것도 귀한 섬김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섬김은 쉬운 말로 밥하고 빨래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할 때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한다면 주님은 그러한 일상 속의 섬김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어떤 맛있는 음식을 해줄까, 어떤 영향식을 해줄까 찾고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에 아이들에게 가장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우리 가족이 오늘 얼마나 귀한 분을 만나러 가는지 알려 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제모임을 한다고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방치해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엄마를 빼앗아 갔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주님을 경배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주님을 인식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칭찬과 관심에 항상 굶주려 있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훈련시키고 만드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세상적인 지식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 안 간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기면서 교회 안 간다고 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잘 이끌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또한 22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치에는 항상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요령을 피우고 빈둥거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려고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일해야 하며, 그러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며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란 주님을 섬기는 삶이고, 주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주님이 주신 위치 가운데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자녀로서, 또 직장에서는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각자가 맡은 일에 사람에게 하듯이 눈치를 보면서 눈가림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신실하고 충성되게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4.25 / 설교 장소 : 서울침례신학교 채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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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고전 3:7-9)


본문 : 고린도전서 3:7-9
7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서울침례신학교의 학생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일꾼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9절의 말씀을 읽은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저는 이 고린도전서 3장의 내용을 가지고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저희가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으시다
먼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약개론을 배우면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I AM THAT I AM",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며,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떠한 섬김이나 도움도 필요하치 않는 전능자, 완전함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1) 본문의 말씀(고전 3:7) -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도 기록하기를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심고 물 주고 수고할지라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할지라도 모든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2) 욥기의 말씀
우리는 토요일날 욥기를 배우고 있는데, 욥기 22장 2절과 3절에서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 지혜로운 자가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있겠느냐? 3 네가 의롭다 한들 그것이 전능자께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 네가 네 길을 완전하게 한들 그것이 그분께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이 말씀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하나님께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계신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의 신실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나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근거합니다. 

3) 사도행전의 말씀
또한 우리는 화요일 오전에 사도행전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과 25절 말씀에서는 사도바울이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던 아테네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많은 신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을 벌하고 심판하는 그런 신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아테네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바울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뭔가 부족해서 사람에게 요구하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풍성하시고,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분이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것에서 만족하시고, 사람에게서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임을 또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7절에서는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엔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9절에서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일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분명히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 완전함 그 자체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시는 원칙은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 예들
우리는 성경에서 창조의 역사를 제외하고서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신다는 하나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즙으로 만드신 기적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항아리도 창조하실 수 있고, 물도 창조하실 수 있고, 또 굳이 물을 포도즙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이, 바로 항아리에 담긴 포도즙을 창조하실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 여섯 통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셨고, 그 물을 떠다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셨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신 뒤에는, 나사로를 풀어주어 마음대로 걸어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으로 무덤의 돌을 감쪽같이 제거하실 수도 있고, 들어다가 멀리 날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사로의 손발을 묶고 있던 수의를 감쪽같이 없애실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나사로를 풀어주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실 수도 있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눈을 뜨는 순간에 각각의 사람들 앞에 진수성찬의 음식을 마련하실 수도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년의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고, 손에서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뒤에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2) 고넬료와 베드로
신약성경에서 주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원칙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가지 예를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이야기인데, 한번 사도행전 10장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있더니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부대의 백부장이더라.
2 그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3 하루는 아홉시쯤 되어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4 그가 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은즉
5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부르라. 
6 그가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와 함께 묵고 있는데 그의 집은 바닷가에 있느니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가 네게 말하여 주리라, 하더라.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넬료는 아직 거듭나지 못했고 생명을 얻지 못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훌륭한 종교인이요, 양심적이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넬료를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베드로를 부르라는 말만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욥바에서는 베드로가 배고픈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은 하늘에서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 같은 그릇 하나가 내려오고, 한 음성이 있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음성이 다시 두 번째로 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 세 사람이 찾아오게 됩니다. 19절을 한번 보시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세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모두 부정한 개로 여겼고, 대화를 하거나 집에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것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여주신 이 환상으로 인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고, 고넬료의 온 집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일하심으로 고넬료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셨으나 베드로를 부르라는 말만하도록 명령하셨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서운 홍수를 경고하실 때에도 의의 선포자인 노아와 함께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일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셨고, 모세와 함께 일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 센 요나를 돌이켜 함께 일하심으로 수십만이 넘는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어부들을 부르셔서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이제는 세상에서 약하고 천하고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부르셔서 함께 일하자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어떠한 기적이나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우리와 함께 일하심으로, 우리가 시간을 쪼개어 말씀으로 예비하고, 주님의 부담에 순종하여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때, 하찮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장 21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 왜 사람을 사용하기 원하시는가? 보상을 주시려고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가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전능자이시며 사람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는 분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면 되지, 왜 우리들을 부르시는가?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본문(고전 3:8) - 저마다 자기 수고에 따라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7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이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7절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고 수고하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무익한 종들에 불과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9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무것도 아닌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를 필요로 하시며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8절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호흡과 생명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일하고자 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닌 수고에 따라 보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이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어리석고 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일하도록 하신 것은 보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현재 저희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중고등부 선생님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초등부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때로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뭐라고 주고 싶어서 일부로 일을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을 암송하면 선물을 주겠다든지, 어떤 일을 순종하면 선물을 주겠다든지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고자 함이 아니고,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뭐라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을 만들어서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호흡과 생명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이 다만 그분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 없고, 한계를 측량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을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보상을 주기 원하십니다. 

2) 본문(고전 3:12-15) -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에 따라
계속해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터인데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을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 

10절과 11절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는 단단한 기초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구원의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기초는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떤 가르침이나,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체험이 될 수 없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기초가 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12절의 말씀을 따라 이 단단한 구원의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가지고 건축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기초를 가진 자는 누구나 건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섬기는 것은 바로 이 기초 위에 세우고 건축하는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애쓰고 수고했는지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13절에 나온 것처럼,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불로 시험을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나무나 건초나 짚은 다 타버리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금과 은과 보석이 남은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는 제가 저희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날이었는데,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같이 앉아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설교 중에 나오는 성경구절 몇장몇절이라고 말한 것을 5개 이상, 그리고 설교 중에 나오는 성경인물의 이름을 10개 이상 적어오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 설교에서는 성경구절이 10구절 이상 나왔고, 사람의 이름이 15명 정도 언급되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아이들이 자기가 쓴 것을 내는데, 어떤 아이들은 성경구절 5개, 성경인물 10개보다 더 많이 썼지만, 어떤 아이들은 몇 개가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한 아이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해왔습니다. 성경구절은 하나밖에 없고, 설교를 들으면서 나오는 어떤 문구들을 적어온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너는 열심히는 했지만, 선생님이 요구한 규칙대로, 선생님이 적으라고 한 종류대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선물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매우 슬퍼합니다. 제가 마음이 약해서 다음 주일날 많게든 적게든 적어온 아이들 모두에게 초코렛을 나눠줬습니다. 


4.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쓸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대로, 법대로 달리지 않으면 상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입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여야하고, 나쁜 열매를 맺으려면 나쁜 나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종류의 일들로 섬길 수 있으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 하나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가 곧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1) 거룩히 자신을 분별하는 사람(성막의 도구들)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자신을 거룩히 분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막을 배우고 있는데, 우상으로 만든 금송아지나, 언약궤를 두른 금은 모두 같은 금입니다. 그러나 금송아지에 쓰인 금은 가증한 것이요, 언약궤에 쓰인 금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 금의 성분은 결국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가증한가 거룩한가의 여부는 그 금이 어디에 속했으며 누구를 위한 용도인가에서 결정지어집니다. 우리는 성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세상의 지혜를 버린 자 
또한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지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려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그가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고, 주님께 온전히 속한 우리들은 이 세상의 지혜를 다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고 높아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당한 일을 당하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시고, 거짓고소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 주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볼 때 이러한 주님의 길은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입니다. 왜 자신의 권리와 정당함을 주장하고 싸우지 않는가? 오늘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때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아야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고, 더욱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을 통해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7절의 말씀대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의 수고에 따라 보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10절과 11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기초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12절부터 15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 기초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우고 건축함으로 주님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16절과 17절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하는지 말해주기보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히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18절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는 더욱 어리석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학생들 모두가 장차 주님 앞에서 금과 은과 보석을 많이 쌓아올려서 큰 보상을 받고 함께 즐거워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03.16 / 설교 장소 : 용산침례교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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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르심(고전 1:9)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9절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안녕하세요? 저는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온 이승선 형제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서울침례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는 학생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자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루이스 목사님과 또 용산침례교회의 성도 여러분께서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 주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잠깐 눈만 감았다 뜨면 아침이 밝아오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생활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됩니다. "벌써 2008년 새해구나"라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새해의 1/4이 지나고 벌써 3월의 중간인 16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과제물을 제출해야 할 날짜가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생각하면 어느새 제출할 날짜가 코앞에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나마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가운데서 빠져나와서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리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짧지만, 이 구절에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주셔서 오직 이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너희를" "ye"
오늘의 본문은 "너희를"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원래 우리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그분 자체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무엇인가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찾아내서 바치도록 요구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풍성함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을 주고 또 주시려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따라,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며 교제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고, 땅 위의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두시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가 너무 아까워서 하나님이 혼자 드시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선악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만들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도 아니고, 다만 사람이 겸손하게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사람의 위에는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너무나 친근하고 원활하던 교제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대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사 59:1,2).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살다가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한 사랑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손해는 하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형벌은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친히 다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의미를 모르고,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모르며 방황하던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먼저 방문하셔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을 방황하면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장의 뒷부분인 26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있고 똑똑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약해서 낙담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어리석고 약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러주지도 않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시고 오히려 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을 때, 주님은 키도 작고 약해서 무리들 사이에 낄 수도 없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자들아 다 이리오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저는 주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교제하게 하시는" "unto the fellowship"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히브리말인데 이 말의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 이 땅에 사람이 되어 내려오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으셨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때만이 마음에 만족을 얻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만족을 얻어보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길러서라도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허전함, 공허함, 상실감, 외로움 같은 많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별되고 멀어진 사람의 마음은 뜻 모를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돈이나 쾌락이나 세상의 많은 것들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절대 완전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제로 부르신 것은 마치 아들을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찾은 것과 같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의 인생은 하늘의 아버지를 만날 때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것은 우리를 따듯하게 품어주고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선생님이 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과거에 너무나 잘해주셨던 선생님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는 그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과의 교제가 너무나 그리워서 다시 그 선생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잘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만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친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가장 뛰어나고 좋은 교제의 대상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선생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이 세상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손해를 입히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생명의 손해까지도 기꺼이 감당하시면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잘못하고 문제를 일으키지만 주님은 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 주님과 같은 분을 결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 인생 가운데 가장 친해지고 가장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할 한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일서 1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함께 요한일서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3절과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4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함께 교제하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유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이 교제가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할 때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늘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 때 주님은 나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마음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주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God is faithful"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신용이 좋다", "믿을 만하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입니다. 누군가가 자꾸 거짓말을 한다거나 약속을 어긴다면 우리는 그 사람과 더 이상 만나고 교제하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갈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조차 불쌍히 여기시며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항상 누리지 못하고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내다가도 한 번의 큰 실수나 한마디 말 때문에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어려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야하고 때로는 마음을 풀어줄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 앞에서 크게 든 작게 든 눈치를 살피면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교제에는 나의 어떠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따듯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나의 어떠함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어떠한 모습을 하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꾸미지 말고 가리지 말고, 약하면 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의롭고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하루 종일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과 그분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십니다. 

다 같이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마음에서부터 죄를 자백할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요한일서 1장 9절에 나오는 죄들의 자백은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라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할 때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너 지난번에도 와서 그랬잖아. 이번엔 용서 못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하나님 제가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 또 이렇게 죄를 지었어요. 면목이 없습니다." 
"응? 어제 무슨 죄를 지었는데?"
"아우 하나님 어제 제가 그 죄 또 짓고 지금 또 지었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마무리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인이며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려있어서 이 세상 전부를 가진다할지라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영광의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불러주셨습니다. "연봉 10억 이상 버는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100미터 달리기 10초 안에 들어오는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수능 수학문제 1분 만에 다 풀 수 있는 사람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이러한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하고 불러주셨습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약하고 어리석고 없는 자들을 불러주신 것은 놀랍고 신기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제를 회복하시고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고, 사람의 대표로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친구를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를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내가 거룩하게 살면 더 좋아지고, 내가 죄를 짓고 실수하면 나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자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머물러 있어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항상 기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고 날마다 더 친밀한 주님과 교제로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7.1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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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은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돌아오자마자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 작년 7월인데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이 정말 이 말씀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많이 열매 맺기를 바랬는데, 지금 돌아보니 너무 부족해서 아쉬운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1년을 어떻게 보낸건가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사시는 삶을 조금씩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마지막 항목인 “절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성령의 열매 - 절제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절제”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 바깥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것이라면, 절제는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원함과 요구를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서 얼마나 절제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과 가까이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잠을 자고 싶다고 24시간 잠만 잘 수는 없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하루 종일 먹을 수는 없습니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소식이 있어도 다 알 수 없고, 말하고 싶은 사실이 있어도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볼 수 없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나의 원함과 요구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내가 배웠노니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당하는 것을 배웠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없지만, 절제를 배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는 법, 곧 절제를 배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절제는 모든 성령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어떤 지식을 깨달아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고프고 궁핍한 환경 속에만 오래 있었다고 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절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또한 실제로 많은 환경들이 다가올 때 주님의 제한하시는 손길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절제를 배우게 됩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단순히 절제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기려고 애쓰는 자가 주의해야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법대로, 규칙대로 달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일에서 절제하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 김용국 형제님께서 농구 선수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선수들은 콜라 같은 탄산음료와 쵸코렛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시합을 앞두었을 때는 몸의 컨디션을 잘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자는 시간을 철저하게 통제한다고 합니다.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보다 코치의 제한을 받아서 움직이게 되고, 그러한 통제를 잘 따른 선수들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제를 잘 따르지 않아서 컨디션 조절도 실패하고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선수들은 벤치에 앉거나 교체를 당하여 시합에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기간에 우리나라의 대표 골키퍼는 김병지 선수였습니다. 김병지 선수는 골키퍼지만 한 번씩 골을 스스로 몰고 나가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김병지 선수는 또 그렇게 공을 몰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아시죠? 김병지 선수는 좋은 감각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아 월드컵 경기에 단 한 경기도 출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주자요 이기려고 애쓰는 자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경주자로서 자신을 절제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주님이 언제나 사용하시는 선발 선수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늘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제하지 않는 죄
사도 바울은 가아사랴의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귀족이었던 벨릭스의 절제되지 못한 방탕한 삶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맹렬하게 지적하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설명하였고 벨릭스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 무절제한 삶이 나오게 되고,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절제하는 삶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무절제한 육신의 삶은 욕심을 부리며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 우리는 주님이 주신 환경 속에 만족하고 안식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육신 안에서 사는 사람은 거침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지만,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 주님의 통제를 받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혀를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눈을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손과 발을 억제하여 복종시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말을 절제함
우리 삶 속에 절제가 필요한 실제적인 영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우리의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고 주님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에 있어서 주님의 통제를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가리는 무서운 일을 하게 됩니다.

다함께 잠언 11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문제를 숨기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말의 문제가 곧 영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신실한 입을 지닌 사람입니다. 옛날이야기 중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처럼, 우리의 입술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 입에 병이 날 정도로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에 대해서 우스운 이야기처럼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은 주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다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부모님은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긍휼히 여기고 용납하며, 문제가 있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당장 실수한 형제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긍휼을 입은 부족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 바로 옆에 잠언 12장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 
절제되지 못한 혀는 톡 쏘는 것 같고, 칼로 찌르는 것처럼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혀는 꼭 필요한 아픈 말을 할지라도 건강하게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정말 성령의 열매 9가지 항목이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말을 할 때에 우리에게는 절제도 있어야 하고, 또 사랑도 있어야 하고, 온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항목들은 우리가 머리로 계산하고 일일이 주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과 동행할 때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에 대해서 한 구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26장 20절부터 22절입니다. 
20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불이 꺼지는 것같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없는 곳에서는 다툼이 그치느니라.
21 타는 숯불에 숯을 더하는 것과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이 논쟁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22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상처들과 같아서 뱃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야고보서에서도 우리의 혀를 불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소문을 내는 자가 불을 일으키는 나무와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은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잘 간직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지체들의 어떤 소식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할 때 그 말이 돌고 돌아서 그 지체의 뒤통수를 때리게 될 때 지체들에게 뱃속의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악의를 가지고 하지 않은 말이라 할지라도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말을 절제할 수 없게 되고, 우리는 의도치 않게 사랑하는 가족과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슬픔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또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함
우리의 삶에 주님의 통제가 필요한 또 한가지 실제적인 영역은 바로 우리의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에는 주님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잠언 16장 32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영을 다스리는 자는 도시를 취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감정의 문제가 곧 영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가장 통제되지 못하는 곳은 우리의 가정 안에서입니다. 교회에서 모일 때는 모두가 천사 같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긴장이 풀어지고 쉽게 육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려면 가정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남편은 쉽게 아내에게 화를 내고, 아내는 쉽게 남편에게 불평하고,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자녀들은 쉽게 부모님에게 짜증을 냅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냥하고 부드러운지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할 사람들은 저 멀리 아프리카에 있지 않고 우리의 가정 안에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되 사라가 자신을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는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모든 일에서 순종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되 밥을 먹이고 공부를 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시간을 드려 아이와 다정하게 대화하고 놀아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일을 돕고 섬기며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통제가 가장 필요한 장소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실제가 우리의 가정 안에서 나타나기 원합니다.


마지막 시대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무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방탕함이며 불평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하여, 또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가지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말씀에서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사람들이 자신의 입과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고하며 살아가지만 성경의 진리대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입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고, 사람들의 눈은 더 현란하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영상들을 보고자하고, 사람들의 귀는 더 신나고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또 뛰어나고 깊은 지식들을 듣고자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도 않고 만족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돈으로 보고, 의사들은 환자들을 돈으로 보며, 목사들은 성도들을 돈으로 계산하는 타락하고 사악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무절제와 방탕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 아이들은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발산하라는 사탄의 메시지를 들으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고집이 세며 자기 원하는 것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절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마지막 때의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우리는 너무나 노골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절제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에도 거침이 없고 감정에도 거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또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합니까?


주님을 바라보며 만족함
다함께 디모데전서 6장을 보시겠습니다. 6절부터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만족이 있을 때 함께 오는 것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가 무절제하고 방탕한 이 시대의 흐름에 쓸려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약함이 있는 남편을 주신을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부족함이 있는 아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 자녀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부모님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제한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때로 저에게 엄청난 돈이 있어서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수백억의 돈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건물도 크게 짓고, 출판사도 하나 만들어서 복음 책자도 최고급으로 엄청나게 찍어서 우리나라 모든 곳에 뿌리고, 선교사들과 주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후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그렇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러한 돈을 가지게 되었을 때 여전히 주님께 신실하고 또 절제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집에서 과일이나 음료수를 먹는 일에도 잘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큰돈을 저에게 맡기실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재정적인 어려움도 주님의 통제입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사람의 의지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육신 안에서 살게 되고 사역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후보 선수가 되어 벤치에 앉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힘들고 어려운 주님의 제한하심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늘 자신의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키며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되 만족하면서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허락하신 만큼 걸어가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제한하실 때 멈추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원함을 억제하고 복종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수십 개씩 사줄 수 있어도, 한 번에 한 개로 제한하는 이유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온 세상을 다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온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신의 생명과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더욱 성숙케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제한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보상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지옥훈련을 받는 그 기간만을 생각한다면 아무도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우승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감독이 어떻게 힘들게 훈련을 시킨다 할지라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서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선수들은 썩어질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억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 절제하고 주님의 모든 제한하심과 통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은 우리를 누르고 제한하시는 손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안 된다고 막으시는 주님의 통제하시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답답한 환경이 하나님의 통제하시는 강한 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억제하고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제와 만족으로 이끄실 때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믿음의 경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더 얻으려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보고 듣는다 할지라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절제를 가르치십니다. 때로는 궁핍하게 때로는 풍성하게, 때로는 답답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ㅌ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통제를 잘 따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선발 선수도 될 수 있고 후보 선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법대로 잘 달렸느냐에 따라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6.18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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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마태복음 11:28-30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두 군데입니다. 먼저 우리가 항상 찾아보는 갈라디아서 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그리고 또 한 곳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입니다. (읽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8번째 열매인 "온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말씀,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하고 초청하신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온유와 겸손
오늘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8번째인 온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저는 전에 성령의 열매 중에서 왜 겸손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온유와 겸손이 아주 밀접하고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하고 함께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온유와 겸손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이 없는 온유함이 있을 수 없고, 온유함이 없는 겸손이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온유에 대해서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는 "온유는 마치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은 그 위에 날카로운 돌을 던지면 그대로 받아들여 흘려보낸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저에게 많은 묵상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귀하고 좋은 물건이 다른 것과 부딪힐 때 상처를 받거나 깨지게 됩니다. 그러나 잔잔하게 흐르는 거대한 강물은 그 어떤 외적인 것으로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목이 마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하루를 살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고 싶은데 저는 너무 더럽고 추해서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성경은 직접 이 생수의 강들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누구든지 목마른 자가 주님께 나아와 마시게 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누구든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 생명의 성령의 거대한 강물을 흘려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를 때 우리는 온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작은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고 있다면 사람들이 돌을 던질지라도 다 받아내고 흘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으로 가득한가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부르셨고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주신 안식이 가득할 때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마르고 무거운 짐을 지며 수고할 때에 우리는 결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이 넘치고 부드럽고 온유할 수 없습니다. 

저는 비록 공익출신이지만, 그래도 한 달 동안은 가장 추운 12월 겨울에 26사단 불무리 신병교육소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기간 동안 딱 한번 야간 행군을 했습니다. 모두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에 나섰습니다. 무거운 배낭도 매고 총도 들고 열심히 줄을 맞춰 걸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으쌰으쌰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 모두들 점점 지치게 되었을 때 함께 훈련을 받던 한 동료가 "힘내자"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모두들 다시 힘을 내며 "힘내자"하고 화답하면서 열심히 걸어갔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고 다들 많이 지쳐갔습니다. 그 친구는 계속해서 한 번씩 "힘내자"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다른 친구들이 "야, 조용히 좀 해"하고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이 빠지고 지쳐있을 때는 힘내자고 외치는 그 소리마저 귀찮고 짜증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온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나아가 안식을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제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우리에게 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는 많은 짐을 지고 수고할지라도 장차 하늘에 가서는 영광 중에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짐을 질뿐만 아니라 연약한 다른 사람의 짐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서 짐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권능과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께서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시고 많은 짐을 지고 계시면서 몸도 마음도 피곤하신데, 주님께서 그 짐을 다 제거해 주셔서 목사직을 내려놓게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되죠. 우리 형제들이 어서 일어나고 모두 주님께 나아가서 안식을 얻고 힘을 얻어서 함께 교회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동역하며 수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29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주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배울 때 우리는 우리 혼을 위한 안식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강남 출신도 아니고 나사렛 출신입니다. 당시에 나사렛이란 마을은 아주 볼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은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만큼 무시당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탄생은 왕의 마을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의 삶은 나사렛에서 더 길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사렛의 목수들은 자기 목공소를 가질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고, 나사렛 주민들도 가구를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의 목수들은 망치 하나와 못 통을 들고 "문짝 고치세요. 식탁 고치세요."하고 외치면서 갈릴리 주변 마을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오십 세가 조금 안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20살이 안 되었을 때 한 대학교 캠퍼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당시에 캐쥬얼 마이를 입고 성경을 들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한창 전하는 중에 한 학생이 "선배님은 어쩌구저쩌구"하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훨씬 더 어린데, 아마도 그분은 신입생이었고, 저를 기독교 동아리를 홍보하는 선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경우가 심합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셨고, 33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젊은 예수님을 보고 아직 50세가 못된 사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화가들이 그리는 금발의 꽃미남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비천하고 어리석은, 그리고 더럽고 추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의 대표로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심판 받고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은 강하고 거대한 나무가 아니라 연한 초목과 같았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볼품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 자신의 환경을 선택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냄새나고 더러운 말구유에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태양에 검게 그을렸고, 사람들이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모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이기적이고 교만한 제 안에, 너무나 거칠고 날카로운 제 안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시며, 놀라운 신비입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모세
우리는 구약성경에서도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다는 평가를 받은 모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민수기 12장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민수기 12장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
3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주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4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 모세는 요셉과 함께 정말 놀라운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모세가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거절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세가 40년 뒤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받아들였고, 모세는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메시아로 영접할 것이고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모세는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말 놀라운 예표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로 대표되는 교회를 신부 삼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깊은 의미를 모르는 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비방하는 2절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비난은 표면적인 것이고, 사실은 교만함 가운데 자신들을 높이고자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들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모세의 누나였던 미리암은 홍해를 건널 때에 여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을 향해 주의 말씀을 대언하고 또 여인들을 이끌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또한 모세의 형 아론은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모세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율법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그 말 자체에는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이 틀렸고, 그들은 반역하고 교만한 영으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잠언 16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여도 주는 영들을 다시느니라." 
미리암과 아론의 말이 자기들의 눈에는 얼마나 옳고 깨끗하였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을 달아보셨습니다. 

우리는 민수기 12장 2절의 뒷부분에서 놀라운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온유함 가운데 대할 수 있는 근거는 주께서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주께서 그 말을 들으시며 그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온 우주에서 가장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민수기 12장 전체를 다 읽어보면 모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13절에서 단 한번 입을 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직접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고 다만 주님 앞에서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대적하고 비난하였던 미리암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민수기 12장 3절에 나온 것처럼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며 자신의 아내를 손가락질 할 때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이 너무나 밉고 화가 나는데 겨우겨우 참고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순간 모세는 오래 전 미디안 광야에서 보냈던 40년의 기간을 기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지내던 40년의 기간은 모세를 겸손케 하고 온유하게 만드는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왕궁에서 이집트의 왕자로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던 모세는 40년 간 장인의 양들을 돌보는 고된 일을 하였습니다. 냄새나는 양들의 털을 깎고 똥을 치우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양들을 몰고 나가서 풀을 찾아 물을 찾아다니고, 이리가 오면 양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다치고 또 때로는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양을 빼앗기고 하면서 그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무능한 사람인지를 알아갔을 것입니다.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의 말에 화를 내지 않은 까닭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당신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나는 백성을 인도할 자격이 없는 자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당신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셨고 당신들도 위대한 주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말처럼 정말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말도 느리고 혀도 둔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부르셨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모세의 마음 속에는 잔잔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겸손은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무능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실 때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책임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시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거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은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을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수고하게 하시고 또 무거운 짐도 지게 하시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하시기 위함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멍에와 짐도 제대로 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짐을 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겁게 에워싸는 모든 죄와 세상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헌신하여 주님의 멍에와 주님의 짐을 지고자 할 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손을 대는 것마다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지식으로 배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동행할 때 주님께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우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자신이 옳고 정당한 것을 주장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지고,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피곤합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이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바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비방하는 그 어떤 말보다 자기 자신이 더 천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포장할 필요도 없고, 꾸밀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선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분수에 넘치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겸손과 온유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하는 것이 저에게도 계기가 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또 실제로 이러한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도록 가르쳐주시기 원합니다. 


마무리
온유와 겸손은 사람의 육신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매순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할 때에 우리는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다 불러주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메마른 목을 축이고 우리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통해 다른 메마른 이들에게도 물을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의 지친 혼에 안식을 얻고 아직도 안식을 얻지 못한 다른 많은 연약한 이들의 짐을 함께 지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은 더러운 말구유의 길이고, 비천한 나사렛의 길이며,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종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모세가 지나간 길은 이집트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린 광야의 길이요, 비방을 받되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교회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잘 가르치는 사람은 많은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없습니다. 제가 그러하고 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멍에를 지고 주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배우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4.1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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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중요성)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느덧 끝이 보입니다. 오늘은 "믿음"에 대하여 살펴볼텐데, 앞으로 믿음과 온유와 절제, 이렇게 3가지 항목만이 남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나타내시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처럼 세상에서는 돈이 돈을 낳고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가 더욱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에게 더욱더 큰 믿음을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은 1절부터 40절까지 한 장 전체가 믿음이라는 주제로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진 분이시기에 사람이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 손해나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거나 슬프시게 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한 가지 방법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자신이 계시는 것과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기도회로 모인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만약 날짜가 되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나온 분이 계시다면, 지금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을 열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라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않은 상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다만 안타까운 상태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히브리서 3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 있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아니하도록 조심하라." 믿지 아니하는 마음은 바로 악한 마음입니다. 심지어 로마서 14장 23절에서는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악한 마음이며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대단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아담이라는 문을 통해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고, 죄라는 문을 통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문을 만드셨고 누구나 그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 하면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면 사람이 영원히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고 하는 문제를 사람의 믿음에 맡기실 정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지만, 최종적인 구원의 여부는 사람의 믿음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멸망할 죄인들이었지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새 생명은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인생은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우리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이제 주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구원받을 때 한번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기분대로 사는 것도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이며, 믿음이 없는 상태는 악하고 죄를 짓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사람이 구원을 받는 문제까지도 사람의 믿음에 맡겨놓으셨고,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을 가져야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믿음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살펴보면 "믿음"이 곧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의 판단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지식도 경험도 부족하여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받아들이지 않고 판단하고 걸러서 듣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 8절에 의하면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옥의 존재를 믿고 세상 사람들이 다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복음 선포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존재를 믿고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섬김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다 드리며 순종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을 통하여 "믿음"이 "거절하고 선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모세에게 부와 명예를 보장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를 거절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고난 받기를 자처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보입니까? 미쳤습니까? 아닙니다. 이집트의 쓰레기 같은 보화들보다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크고 값지다는 것을 모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말 계시고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세상을 거절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이어받아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2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자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에게는 우리를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할 때 바통을 넘겨주듯이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전달받았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같은 구약의 성도들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바울에 이르는 신약의 성도들, 그리고 현재 2008년에 이르기까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 온 인생을 드리며 살아온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성도들이 가져왔던 믿음의 바통을 이제 우리들이 이어받았습니다. 과거에 믿음의 경주를 달렸던 우리의 선배들은 이제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되어 우리를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장과 광화문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던 우렁차고 가슴벅찬 응원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더 영광스럽고 웅장한 응원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시며 그 수치를 멸시하셨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멸시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통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파도가 어떤지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유행이 무엇인지, 트랜드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약한 사람인지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 - 믿음이 없다
우리는 먼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았고, 또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고, 세상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며,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 없고, 생활이 피곤하고,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이러한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맞습니까? 저에게도 문제는 신학교 공부도 해야하고(이번 주에 시험기간입니다), 공부는 해야겠는데 머리는 안 돌아가고, 또 중고등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잘 나오지도 않고, 열심히 준비해서 말씀을 전해도 별 반응이 없고, 앞으로 결혼하려면 돈도 벌어야겠고, 서울침례신학교 졸업하면 미국에 PCC도 가야겠고, 또 무엇보다 저에게 있어서 큰 문제는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텐데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따듯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각자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쌓여있습니다. 한숨이 푹푹 나오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무거운 짐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우리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책임지려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돈 걱정, 자식걱정, 진로걱정.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진행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그만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며, 세상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며, 주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믿음을 성숙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안배하심입니다. 우리는 문제 가운데 빠져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지말고 먼저 믿음을 배우려고 해야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상황 속에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환경을 바꾸고, 문제를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도망 다니는 중에 두 번이나 사울을 직접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안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조급하게 달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자라나는 원칙 - 하나님의 말씀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해야 더 자라나고 더 커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좋은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다같이 로마서 10장 1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

성경은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누가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며, 누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겨듣고 묵상하며 암송하고 탐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훌륭한 성경교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영적인 사람의 삶이 성경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뛰어나고 경건한 사람의 체험이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논리정연하게 보이는 과학과 철학 이론들이 성경보다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사람의 말을 신뢰한다면,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이 변하게 될 때 우리의 믿음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성경이 일점일획도 변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 또한 변치 않고, 더욱더 견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두고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지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과 기준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이 없이는 구원도 없고, 심판이 없이는 은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사랑과 은혜의 주제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경 기록을 우리에게 영감으로 주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리를 따지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사랑하고 섬겼는지를 보시지, 얼마나 교리를 잘 지켰는지 묻지도 않으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러한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고 어떻게 보면 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우승하려고 애써도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관을 얻지 못하며"(딤후 2:5). 하나님께서는 규칙대로, 말씀대로, 성경의 교리와 가르침대로 달렸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과거에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때, 하나님의 교리, 하나님의 방법대로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의 자손들이 어깨로 옮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수레에 싣고 소들이 끌고 가게 하였습니다. 땅이 울퉁불퉁 하였기 때문에 언약궤가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마침내 결정적으로 수레가 너무 기울어져 궤가 넘어질 뻔 했습니다. 옆에서 궤를 보고 있던 충성스러운 웃사가 주의 궤가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만졌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웃사는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의 자손들도 언약궤에 달린 고리에 손잡이를 끼워서만 들 수 있었던 그 궤를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웃사의 마음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웃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비뚤어진 상태에서 겉으로만 말씀을 지키는 것도 온전하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은 더욱더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해서 모든 비성경적인 것들을 다 덮어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규칙대로 달렸는지를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회계보고는 졸업식이 아닙니다. 졸업식에서는 시상식만 있지만, 회계보고에서는 책망도 있고, 해명하고 대답해야 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나 전할 때, "너무 딱딱한가, 너무 메마른가, 좀 더 은혜롭고 사랑이 흐르는게 좋은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진리의 말씀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며 일점일획도 빠질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어떠한 교단이나 정부 단체 위에나 아래에 소속될 수 없고 오직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오직 목사와 집사이며 이것은 한 가정의 머리가 된 형제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제사장, 즉 만인제사장이며, 성경은 어떠한 성직자 계급 제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과 확신은 오직 진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뜨거운 감정이나 느낌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데에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체된 것 같을때, 믿음이 더 성장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오늘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성령의 열매인 "믿음"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악한 마음이며 죄를 짓는 상태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듣기가 좋든지 나쁘든지, 나의 생각과 같든지 다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나를 부인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격주로 오후예배 후에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시간이 널널하고 별로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나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거절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세상이 싫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어나서 세상을 거절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상황을 바라보거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나의 어떠함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떻게 어렵든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평가하든지, 내가 어떻게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많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고, 어떤 상황에서 벗어버리는데 우리에게 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운 믿음을 갖는 데에 우리에게 길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너무나 불안하여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지만 우리가 영원치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믿음을 세울 때 우리는 말씀을 힘입어 견고하며 신실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은 믿음을 열매로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요, 또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진리 가운데 우리를 이끄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며 산다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갈 길은 오직 성경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우리에게 다른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그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 우리의 판단과 상상은 다 허망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오직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의 기분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어떤 말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힘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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