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8.02.2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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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우리의 신분(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신분"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벌써 여섯 번째 항목인 "선함"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선함"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보면 "Goodness"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하면 좋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도 이 단어를 "선하다"라는 의미와 "좋다"라는 의미로 모두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인 선한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가리켜 선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울 왕은 다윗을 향하여 "나는 너에게 악을 행하였지만 너는 나에게 선으로 갚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삼상 24:19). 또한 로마서 2장 4절에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대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성령의 열매 가운데 모든 항목이 그랬지만 특히 이 "선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19:16) 로마서 3장 12절에서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라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가 성경에서 선하다는 표현을 찾을 때마다 대부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시편 34편 8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선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지식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란다.", "아 하나님은 선한 분이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선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각자가 직접 맛볼 때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누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정말 선한 분이라는 것을 맛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알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실 것이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선한 것을 주실 것이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집과 오해를 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안돼"라는 말입니다.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만지고 다니는데 만약 아이가 전기 콘센트를 만지려고 한다면 엄마는 얼른 달려가면서 "안돼"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하고 바둥바둥 달리기 시작할 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차도로 달려나가기도 합니다. 그때 부모님은 얼른 아이를 낚아채며 "안돼"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기도회 전에 제가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선일이, 선빈이가 들어왔고 제가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조수현 자매님께 "엄마 저도 컵라면 먹을래요."라고 말했지만, 자매님은 "안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뒤에 교회 1층에 있는 짜장면 집에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선빈이는 짜장면보다 컵라면을 더 먹고 싶었지만 엄마를 따라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자매님이 아이들에게 컵라면을 주지 않고 짜장면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쉽습니다. 짜장면이 더 좋은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안돼"라고 말하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해야할 일은 부모님이 나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시고자함이 아니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만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컵라면을 "안돼"라고 말씀하시고, "짜장면 먹으러 가자"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육신의 욕심을 내려 넣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날마다 맛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 컵라면이 너무 먹고 싶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안돼"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가장 좋고 선한 것임을 인정하고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선하다는 표현이 우리 주 예수님께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선한 목자인가 하면 바로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만큼 선한 목자이십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0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15 아버지께서 나를 알 듯이 내가 아버지를 아노니 나는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친히 길을 잃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멸망당할 죄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목자들을 보면 혼자서 일하지 않고 많은 경우 양치기 개가 함께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양떼의 목자들이 하나의 큰 공동 울타리를 두고 양들을 함께 보관했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어 양떼를 몰고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목자들은 울타리로 오게 되고, 문지기는 목자를 알아보고 울타리 문을 열어줍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섞여있는 많은 양떼 가운데 자신의 양들을 불러냅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신의 양들만을 인도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목자가 앞장을 서고 양들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양떼의 뒤에는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따라옵니다. 보통 이 양치기 개들은 양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양들이 목자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는 않는지를 살피며 목자를 도와줍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도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마리 양치기 개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편 23편 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의 평생에 우리 뒤를 따르며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는 두 마리의 개는 바로 선하심과 긍휼입니다. 

만약 이 개들의 이름이 심판과 공의였다면 우리는 목자를 떠나 다른 길로 가는 즉시 물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선한 목자이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를 따르는 양치기 개가 선하심과 긍휼인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선하게 대하시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망가뜨리고 무너뜨린 것을 주님은 언제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덮어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우리를 계속 인도해오고 계십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분
이제 이러한 선한 아버지 하나님과 선한 목자를 가진 우리들이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기에 오늘 우리는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 예수님의 생명을 영접한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은 피조물들이지만, 우리가 주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에베소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선한 행위와 구원의 관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선한 행위는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해서 구원을 받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요, 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고 구원을 통한 선한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아야만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작품입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우리들은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작품들입니다. 

또한 디도서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종착점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구속을 받고 정결함을 받은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의 백성과 신분이 다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 백성들도 바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 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바쁘고 열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 땅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왕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지옥에 떨어질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형제들과 교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하기 위해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일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금 더 돈을 벌고,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무엇을 성취하려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으로서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함입니다. 영원히 남게될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하여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요일 2:17).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우리의 신분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되었고 우리도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고자 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신입니다. 다함께 로마서 7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과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19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우리의 육신은 모두 죄의 법에 매여있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또 우리의 육신은 사망의 법에 매여있어서 선한 일을 하는데는 완전히 무능합니다. 죽은 사람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사망의 법에 매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익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의 법에 매여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데는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의 비참한 삶에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욱 강력한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만유 인력의 법칙에 따라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지만, 공중의 새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법을 따라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만유 인력의 법칙에 매여 항상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서 마땅히 주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야 하지만 그 능력의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사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만이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하여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욕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주님을 따르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좋은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맛보고 알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한 독특한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선한 것을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같이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과 19절입니다. 
"18 아들 이모데야, 전에 너에 관하여 주어진 대언들에 따라 내가 네게 이 책무를 주노니 곧 너는 그것들을 힘입어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그것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선한 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선한 싸움과 선한 양심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양심은 예수님의 피로써 정결하게 되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깨끗해 졌습니다(히 9:14). 또한 로마서에 따르면 우리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9:1). 우리가 언제나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파선된 배는 다시 항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치고 보수해서 다시 항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시간이 많이 허비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일들을 넘치게 감당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막아서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양심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면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킨다면 그것은 선한 양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 아래 있고 사람마다 가진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한결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주의하며 눈치를 살피지 말고 모두가 각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의 양심대로 걸어야 합니다. 선한 행위를 위해 창조된 우리들은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드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양심의 문제를 매우 엄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기록하면서 양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8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상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일반 고기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형제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상에 올랐던 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형제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자신들의 양심에서 먹으면 안될 것 같은 걸림이 있었음에도 다른 형제들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먹었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먹은 형제들의 양심은 깨끗했지만, 다른 형제들을 따라서 먹은 형제들의 양심은 더러워졌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먹은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문제가 없었지만, 양심을 거슬러 먹은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고 행하지 말고, 나의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다른 형제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나의 양심이 반대하는 일을 나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양심에 문제가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주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양심을 붙들 때에 우리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
이제 우리는 선한 싸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지적할 때 우리 안에는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는 항상 육신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로 관람객이 되지 말고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는 말은 이러한 싸움에서 아무것도 하지말고 손을 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그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고백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육신의 욕심과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앞부분에 보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5절부터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자하는 육신의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게 될 때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붙들고 12절 말씀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우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위한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신분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함께 "우리의 신분"이라는 제목으로, 성령의 열매인 선함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의 신분을 뒤바꾼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이 나타났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 잃은 우리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이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불물을 가리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으며, 우리가 참으로 선을 행하기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도리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비참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늘 일하시며 동행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의 것들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릴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1.23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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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주의 부드러움(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의 부드러움"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아홉 가지 성품으로 표현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벌써 다섯 번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성품은 바로 "부드러움"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품과는 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저는 주로 차갑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 이 주제로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이 부드러움이란 단어를 영어로 보시면 "gentleness"라고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 할 때 신사가 바로 젠틀맨인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gentle"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신사"라고 할 때는 홀을 꽂아 끼우는 띠를 의미하는 "띠 신"자와, "선비 사"자가 합쳐서 홀을 꽂아 끼우는 띠를 띠는 옷을 입는 상류계층, 즉 교양 있고 잘 배우고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어에서 "젠틀맨"이라고 할 때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임스 낙스(James Knox)라는 한 성경교사는 부드러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움(gentle)"이란 단어의 뜻은 친절(kind)하다는 것이고, 친구처럼(friendly) 대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또한 온유하고(meek), 온화하며(moderate), 엄하지 않고(not severe), 과격하지 않으며(not violent) 오히려 예의 바르다(courteous)는 뜻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후서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아주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1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특별히 우리는 3절 뒷부분에 있는 "사나우며"라는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사랑하며 교만하며 사나워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이 없어지고 마음은 강팍해지고 점점 차가워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는 사납고 이기적이며 주님의 성품인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열매맺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 이삭
성경에 나타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이 매우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하나님을 따라 걸어온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당함과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상처와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는 너무나 늙고 힘이 없었지만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부릅니다. "이삭아, 이삭아,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 번제 헌물을 드리러 가야한다." 이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른 두 청년과 함께 번제 헌물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합니다. 이틀의 여정을 지나 셋째 날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두 청년을 남겨두고 이삭에게 번제 헌물에 쓸 나무를 등에 지웁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있고, 아버지의 표정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쉽게 무엇을 묻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삭이 어렵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실 것이다." 그리고 산에 도착한 아버지는 이삭과 함께 제단을 쌓아 올립니다. 제단 손질을 마치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의 손과 발을 묶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삭이 이때에 만약 20세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120세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삭이 아버지를 뿌리치고자 했다면, 달아나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젊음과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정말 어린양같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렇게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내가 번제 헌물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내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이 모자란 자도 헌물로 받아주신다면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에서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에게 생명을 바치기까지 순종하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은 새로운 가장으로서 가정을 인도했습니다. 당시에 광야에서 순례자로서 유목생활을 하였던 이삭에게는 우물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지만 갑자기 나타난 그랄의 목자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냥 주고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팠을 때 또 다시 다툼이 일어나자 우물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물을 팠을 때 다툼이 일어나지 않자, "이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그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싸움을 걸고 우물을 빼앗았던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며 거칠게 나설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따라 부드러움 가운데 걸을 때 주님은 우리의 원수들과도 화목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들 - 요셉
이제 요셉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요셉은 10명의 배다른 형을 가진 막내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으면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였던 요셉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이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요셉의 나이는 17세. 꿈도 많고 미래도 창창한 젊은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려고 형들을 찾아갔던 요셉은 형들의 습격을 받고 옷이 발가벗겨지며 구덩이 던져졌다가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은 충격과 공포로 휩싸였을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상처와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들의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과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형들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예의 신분이 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노예가 된 요셉은 억울해 하면서 복수를 꿈꾸지 않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부리는 자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맡겨진 모든 일을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호위대장인 보디발의 온 집안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에도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걸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분노하여 거짓으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고, 질투의 영에 사로잡힌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억울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라고 말했는데, 요셉 또한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감옥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요셉은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잘 받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감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하루는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와 잔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슬프기에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각각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꿈이나 환상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있던 당시는 창세기조차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요셉의 해석과 같이 빵 굽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잔 맡은 자는 직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잔 맡은 자는 직위가 회복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빼내어 달라는 요셉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파라오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게 되고, 잔 맡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요셉을 파라오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여 앞으로 7년 간의 풍년과 7년 간의 흉년이 있을 터이니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7년의 풍년에 식량을 잘 비축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고, 파라오는 요셉을 총독으로 세워 온 이집트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7년의 풍년이 지나고 7년의 흉년이 임하는 동안, 저 멀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도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제 요셉의 형들은 먹을 것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갑니다. 이제 요셉의 눈앞에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이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들에게 복수할 만한 큰 권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창세기 45장 7절과 8절을 보시겠습니다. 
7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이제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가 되게 하셨으며 또 온 이집트 땅의 치리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또한 창세기 50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를 다 마치자,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합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요셉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해 친히 모든 슬픔과 고통을 감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며 친절히 대하십니다. 요셉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장 나에게 어려운 일이 벌어질지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부당하게 대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부드러움을 붙잡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 다윗
마지막으로 다윗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도 정말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대언자 사무엘이 와서 이새의 집의 모든 아들을 초청하여 주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였을 때 아예 제껴진 막내아들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우와 아버지 대언자 사무엘이 우리 집을 다 초청했다고요? 아들들 다 오라고 했다구요?", "다윗아 너는 형들하고 아빠 다녀올 동안 가서 양 돌보고 있어라."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다윗은 아마 울면서 초원으로 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아버지도 형들도 저를 불러주지 않고 저는 무가치한 아들이요 소외당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여전히 이렇게 못난 저의 목자시지요? 저는 주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요."하면서 주님께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이 가난하고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갈망하는 어린 소년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픔이 있고 서운함이 있고 상처가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가장 선하신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럽고 친절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십니다. 
이러한 아픔 뒤에,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향한 큰 승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향한 어떠한 잘못도 악의도 없었지만 너무나 억울하게도 광야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잡히기만 하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긴박한 도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시편 18편을 보시겠습니다. 18편 맨 처음에 보시면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악장에게 준 주의 종 다윗의 시,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그가 이르되,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부터 보시겠습니다. 
29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나의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 
30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정제되었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
31 주 외에 누가 하나님이리요?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리요?
32 이 하나님은 곧 능력으로 내게 띠를 두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3 그분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나를 높은 곳들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36 주께서 내 밑의 발 디딜 곳을 넓히사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5절 뒷부분에 보면 주의 부드러움이, 주님의 gentleness가 다윗을 크고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완전한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상처 주고 원수처럼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조차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사무엘하 16장을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보라, 거기서 사울의 집에 속한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그는 게라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시므이더라. 그가 앞으로 나오면서 올 때에 계속해서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 그때에 온 백성과 모든 용사들은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빠졌느니라, 하니라.
9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10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내 속 중심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가 갈 때에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이 모습은 마치 성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시는 주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을 따라오면서, 사실이 아닌 것들로 모함하고 저주하는 시므이에게 조차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집에 큰 친절을 베풀었지만, 사울의 자손인 시므이는 다윗을 원수로 여기고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때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친절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원망하고 대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건방지고 오만한 말과 마음을 부드럽게 품어주셨습니다. 

이제 전쟁이 마무리되고 다윗 왕이 다시 성으로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다같이 사무엘하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6절부터 보시면,
16 바후림에 있던 베냐민 족속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하고 사울의 집의 종 시바도 자기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과 함께 요르단을 지나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 왕의 집안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며 또 왕이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게 하려고 나룻배가 건너가니라. 왕이 요르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 왕께 이르되, 내 주께서는 불법을 내게로 돌리지 마옵소서. 또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왕의 종이 그릇되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내가 죄를 지은 줄을 왕의 종이 아나이다. 그러므로, 보소서, 이 날 요셉의 온 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와서 내려가 내 주 왕을 맞이하나이다, 하였으나
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응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이 일로 인해 그가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매
22 다윗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이 날 나의 대적이 되려 하느냐? 이 날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하겠느냐? 내가 이 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느냐? 하고
23 그런 까닭에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오늘 우리는 시므이를 죽이려 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비새는 정당하고 올바른 권리를 말하였지만 그것은 결코 주의 부드러움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상처 준 시므이에게 복수하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모든 권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부드러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고 관대한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상처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조차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삭과 요셉과 다윗은 모두 우리 주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수염을 뽑히시고, 버림받고, 거부되셨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우리를 위하여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비천하게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러움과 친절함으로 대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우리를 주님이 변함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인도하시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제멋대로인 우리들에게 여전히 친절하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친절하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의 부드러움을 힘입어 오늘 용서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용서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교만한 저에게 친절하신 것처럼, 저도 친절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저에게 관대하신 것처럼, 저도 관대하기 원합니다. 
제가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부드러움과 친절하심이 저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도록 주님께 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12.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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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오래 참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서는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언제가는 벌을 내리기 위하여 벼르고 벼르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가 전제된 상태에서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기다리기를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고 계십니다. 또한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 죄 가운데 방황할 때에도 주님은 오래 참으심 가운데 우리를 긍휼로 대하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인데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홍수를 내리시기까지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는 낳을 때에 에녹을 통하여 300년 간 홍수의 심판을 경고하셨고, 므두셀라가 죽기 120년 전부터는 방주를 만들며 말씀을 선포한 노아를 통하여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고, 동물들이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신기한 광경이 벌어진 이후에도 일주일을 더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성경은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재미있는 요나 이야기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오래 참으시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나서 4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요나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께 까불고 대들었던 대언자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땅의 심장 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위대한 이가 여기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요나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구약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요나가 들어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제가 요나서에서 가장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요나는 뭔가 건방진 태도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이해시키고 한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면에서는 아주 꾸밈이 없고 진솔 담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요나를 오래 참으시며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니느웨로 가라
이제 요나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요나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3일 동안 걸어야 다 돌 수 있을 만큼 큰 도시였고,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만 해도 십 이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악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시고 요나를 통하여 경고를 주셔서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하여 부정할 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반드시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신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님이 약속을 더디게 이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들에게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당할 수치를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니느웨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니느웨 사람들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언자 요나를 그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서 욥바로 가더니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배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시 성경 뒤에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뒤에 부록에 보시면 지도 12번 분단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해(지중해)라고 된 곳 오른편에 욥바의 위치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도 13번을 보면 주황색으로 아시리아 글자 위에 니느웨를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과 가까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갈 때는 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라는 니느웨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떠나려고 욥바로 가서 배를 탄 것입니다. 다시스라는 곳은 현재 없는 지명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스페인의 어떤 도시이거나, 사도 바울이 태어났던 다소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습니다. 가라고 하셨는데 다만 안가고 버틴 것이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반대방향으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요나서 4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요나는 당시에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다스린 나라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해서 용서를 받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부르셨고 보내셨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 가운데 이미 용서함을 전제로 니느웨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려 하심을 알고 있었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모두 받아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절대 경고하지 않기로 작정하였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그들이 모두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아마 우리가 요나였다 하더라도 비슷한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를 압제한 일본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가려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를 바꿔서라도 니느웨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열고 음성을 내시거나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요나에게 먼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불통 반역적인 요나를 용서를 전제로 오래 참고 계십니다. 


오 잠자는 자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로 나아가는 요나를 돌이키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말씀에 불복종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큰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종교적인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현실적인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온 배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때 유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있었다면 유서를 써서 유리병에 담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고있는 요나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는 배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눈을 꾹 감고 잠을 잡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는 죽어도 니느웨 못 갑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우리 민족의 원수들인데 어떻게 회개해서 살으라고 합니까? 다 멸망하게 내버려두세요." 

선장이 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또 무거운 짐이 있으면 바다에 던지려고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 잠자는 자여, 어찌 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리라." 선장은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애써 잠을 자고 있는 요나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제 선원들이 모여서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많은 경우 비나 눈이나 폭풍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현상이지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가 들거나 배탈이 나면 춥게 다니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짓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무조건 우리의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요나와 같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환경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과 성령님의 음성을 통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문제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는데도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은 여기 나온 것처럼 이방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아주 분명하게 요나를 지적하십니다.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집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는 어디냐? 너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9절에서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주 곧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하노라."


고래를 예비하신 하나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대로 배를 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마저 사용하셔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는 아마도 이 순간에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는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 죽어도 저는 니느웨 안갑니다."

이제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요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요나와 한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큼직한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류인 물고기냐, 포유류인 고래냐를 가지고 따지고 고래상어나 청상아리다 많은 추측들을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물고기가 무슨 종류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며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 있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폭풍우를 예비하셨고 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아주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 주십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의 이러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돌이키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0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다시 니느웨로
이제 3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3절에 보면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이제 드디어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최소한 3일을 돌아야 다 다닐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4절에 나온 것처럼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주 지멋대로인 대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니느웨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돌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도시 밖으로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이키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이제 사십 일 뒤에는 다 망해버릴거니까 그리들 알어!", "이 저주받은 것들아, 니들 얼마나 가증한 죄를 지었는지 이제 사십 일 뒤에는 그냥 하늘에 불이 떨어지든 땅이 뒤집히든 다 죽을거니까 그리들 알아!" 아마 이런 저주의 뉘앙스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요나야 사흘 길을 다녀야 니느웨에 다 말씀을 전하는데 하루만 하고 나오면 어떡하니?"
"아우 그래도 전했잖아요. 저도 더 이상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멋대로 대언자 요나에게 조차 오래 참으십니다.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만 선포하고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앗시리아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앗시리아의 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의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이에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그들 중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9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돌아서시고 뜻을 돌이키사 자신의 맹렬한 분노에서 떠나심으로 우리가 멸망하지 아니할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한 것을 보시고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셔서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이제 겉으로 보자면 요나의 사역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바울과 사도들은 수십 년을 복음을 전하러 다녔어도 이렇게 요나처럼 수많은 사람을 한번에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루만에 어린이만 십이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를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다 회개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설교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서는 이렇게 성공적인 사역과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4장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이런 멋진 고백을 감사의 눈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서 하는 이 고집불통 요나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조차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럽고 가증한 죄악 가운데 묶여있을 때에조차, 우리가 거칠고 교만하며 어리석을 때에조차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3절에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보면 볼수록 아주 웃기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 거봐요. 내가 이 원수 같은 놈들 그냥 멸망시킬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해 줄지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우리 민족이 죄를 지었어도 이렇게 잔인하고 더러운 놈들을 용서해 주다니요. 저는 분해서 못 살겠습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아우 진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시키면 하는거지, 진짜 말많네. 죽고싶어? 그럼 니 소원대로 그냥 죽어버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요나의 마음을 얻고 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요나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멸망하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하여 도시의 동쪽 편에 앉아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사십 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거짓말하지 마옵소서. 이제 삼십 구일 남았나이다. 삼십 구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소서. 저 원수들을 제발 좀 멸망시키소서."
아주 건방지지만 그러나 진솔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절에 "주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 넝쿨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심히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 볕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야 니가 뭘 잘했다고 자꾸 고집이야, 아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하면서 숲 속에서 곰이나 사자를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요나는 그늘이 생겨서 너무 좋아하면서 계속 도시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삼십 팔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소서. 우리 민족의 원수를 나의 눈앞에서 멸망케 하옵소서. 믿슙니다. 아멘!"

7절에 보면 하나님께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르러서 이제 막 시원한 감이 없어지고 해가 막 뜨려할 때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그늘이 필요하기 시작한데 때마침 넝쿨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8절에 드디어 해가 뜹니다. 해가 뜰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또 뜨거운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요나 한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대한 폭풍에서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교제하시며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는 기진맥진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은 줄줄 흐르고 뜨거운 동풍에 숨은 팍팍 막히고 아주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요나는 발라당 누워서 "주님 죽여주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내게 더 낫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가 응수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 하지도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11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무리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뭐가 대단하길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을 들여가며 상대해 주십니까? 우주 저 멀리서 바라볼 때 한낮 점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뭐가 이쁘고 뭐가 잘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십니까?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십니다. 요나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예비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시고,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작은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요나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득하시고 또 알려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구하고,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땡깡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해가 안되면 따지고 죽겠다고 드러눕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고 용납하면서까지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진실한 친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해를 주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살았습니다. 우리가 악하고 교묘하게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주님은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더욱 사랑해 주셨습니다. 누가 성령을 따르는 가운데 오래 참을 수 있습니까?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리 오래 참을지라도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답답하고 못마땅할 뿐이지만, 나를 오래 참아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낮아진 사람은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오늘도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11.28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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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하나님의 화평(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화평"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세 번째로 화평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화평은 영어 단어로 "peace"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말로 "평?quot;, "평강", "평화"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성경에서도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할 때 이 "평강"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열매인 "화평"과 같은 단어 "peace" 입니다. 우리가 찬송집도 피스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평화"라는 의미의 피스가 아니고, 찬송가 종이들을 조각조각 모았다고 해서 조각을 의미하는 "piece"인 것 같습니다. 


화평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아무튼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화평"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는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창시자"(the author of peace)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국가의 통치자와 교회의 감독자와 가정의 아버지라는 권위가 세워졌고 그 질서대로 운영될 때 참된 화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여러 곳에서 화평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거스르고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아무리 똑똑할지라도, 성도들이 아무리 영적일지라도, 자녀들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자신들 위에 세워진 권위와 질서를 거스를 때 화평은 깨어지고 혼란만이 가득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평화의 통치자"(the Prince of Peac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왕국들이 연합하여 유엔을 세우고 세계 평화를 아무리 추구한다 할지라도 평화의 통치자인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왕이 되시기 전에는 결코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심판자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서 결단코 가질 수 없었던 화평을 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또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같이 성령님의 열매가 바로 화평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화평의 창시자이시며, 아들은 평화의 통치자이시며, 성령은 화평을 열매맺는 원천이십니다.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화평"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영어로 "peacemakers" 라고 되어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고 우리가 그렇게 불려질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 가운데 화평을 만들어내고 평안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 화평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사람들에게 화평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화평의 모든 면을 다 살펴볼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화평을 누릴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기적으로 나 혼자만 평안하고 안락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하고 지치고 힘든 형제 자매들에게도 하나님의 화평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화평을 충분히 공급받고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화평"이라는 열매 자체가 아니라 "화평"의 열매를 맺으시는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알아가고 더 닮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주님과 같이 화평을 주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니들이 그러고도 제자야? 베드로 어딨어? 네 이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참되게 따르게 된다면 우리도 우리를 배반하고 상처 준 이들에게 하나님의 화평과 축복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평의 삼각대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우리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에서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제 손에 캠코더를 들고 모든 집회 순서를 다 찍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제 손이 자꾸만 조금씩 떨려서 화면이 흔들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손 떨림을 없애기 위해서 왼손으로 받쳐보기도 하고 했지만 자꾸만 떨려서 안정된 화면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캠코더를 올려놓을 수 있는 삼각대가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멋진 작품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을 보면 항상 삼각대를 들고 다닙니다. 결혼식 사진사도 그렇고 사진방 사장님들도 모두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놓습니다. 축구 경기장에서도 기자들은 경기장 주위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멋진 사진을 담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진사라 할지라도 미세한 손 떨림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루어주신 멋진 광경들을 담으려고 할 때에도 우리의 손이 자꾸만 흔들려서 멋진 작품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화평의 삼각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삼각대 위에 놓고 찍으면 손 떨림이 없기 때문에 아주 멋진 작품 사진을 찍을 수가 있습니다. 이 화평의 삼각대는 모두 세 다리로 되어있는데 첫 번째 다리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 다리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다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세 다리가 온전히 세워질 때 우리는 화평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멋진 광경들을 담을 수 있고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말고도 더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기억하기 좋게 삼각대를 연상하면서 하나님의 화평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 - 믿음
첫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 같이 빌립보서 4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7)하신 욥기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 에는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다양한 염려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와 걱정거리들이 우리를 방문할 때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리고 걱정하며 어려워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이 금새 해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토록 약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오늘 걱정과 염려가 있으신 분은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야 하기 때문에 먼저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에게 호흡할 수 있는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걸을 수 있는 건강한 다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하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 죄 많고 고생 많은 세상에서 저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신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오늘 저를 부르신다면 이 모든 문제들이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릴 때 오늘 저에게 닥친 이 어려움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함을 고백합니다. 저 같이 부족한 자에게 구원을 받고 함께 주님을 섬기는 가족들과 교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염려와 어려움이 닥칠 때 그 걱정에 사로잡혀 고통 받지 마시고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렇게 감사로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의 모든 환경이 주님의 선하신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제게 닥친 어려움이 주님의 사랑과 긍휼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주신 이 환경 가운데 제가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발견하게 해주세요. 주님 저에게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선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 주세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도 아니고 "그리하면 모두 응답해 주시리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고 우리의 생각은 요새와 같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걱정과 염려의 불화살을 쏘아서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할 때에 주님은 즉시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내리셔서 걱정과 염려를 물리치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종결되고 마무리 되어서 화평을 갖는 것이 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하나님의 화평은 아무리 큰 문제가 내 앞에 버티고 있을지라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사람의 이해로는 알 수 없는 이상하고도 신기한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잘 훈련받은 군사들이 황제의 궁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지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걱정과 염려로부터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화평은 바깥의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오지만 우리가 언제라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평강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2.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함 - 순종
화평의 삼각대의 두 번째 다리는 순종입니다. 바로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려면 먼저 육신의 욕심을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강이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에게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가지고자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하고 욕심을 부리는 마음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어른들은 그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고 은밀하게 또는 매우 영적이고 선하게 포장하는 법을 터득했을 뿐 욕심이 없는 고차원적인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욕심"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lust"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 성경에서 "정욕"이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욕심과 정욕은 모두 육신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너희의 정욕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 우리에게서 화평이 깨어지고, 마음에 평강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다툼이 있고 전쟁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속에서부터 나오는 욕심과 정욕 때문임을 성경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화평이 없는 이유는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육신을 못 박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못 박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은 못 박혔다고 말하지 않고 못 박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의지를 사용하여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매순간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든, 일의 성취에 대한 욕심이든 우리가 어떠한 욕심에 이끌려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길을 잃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질서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아내는 남편에게, 성도들은 목자에게, 국민들은 법과 권세자들에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반대되지 않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질서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원하는 바와 욕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거역하게 되고 하나님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의 근원의 육신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비롯된 일은 욕심에 근거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일은 순종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화평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질서와 위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3.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함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이제 마지막 다리입니다. 화평의 삼각대를 세우는 마지막 다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26절을 보시면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은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에 이어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시기하며 분쟁합니다. 누군가 나의 수고와 노력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불안정하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나쁘게 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평안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를 은근슬쩍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자 하고 나를 변호하고 정당하게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심으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지식과 학력과 사회적 지위와 인맥과 자신의 경험과 경력,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육신의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헛된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피곤하며 지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하니라." 가장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때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땅에서는 평화도 우리들을 향한 선하신 뜻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는지 어떻게 오해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고들은 몇 가지 제한된 사실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서 "아, 저 사람은 이래서 틀렸고 그래서 나는 맞아. 아, 저 사람은 저게 문제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더 옳아"하는 생각 역시도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하며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화평을 공급하며 존중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보다 영적이고, 내가 누구보다 앞서있고 하는 것은 다 헛된 영광에 불과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평가하시는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의 정당함과 억울한 사정을 모두 아시고 나의 수고와 헌신을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간직하셨다가, 장차 영원한 왕국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겸손할수록 좋고 낮을수록 좋습니다. 나의 입술은 나를 정당화하지 않을수록 좋고 나를 자랑하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컵은 언제 떨어져 깨질지 모르지만 바닥까지 낮아져 바닥에 놓인 컵은 더 이상 떨어져 깨질 위험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평안할 수 있습니다. 


정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멋진 풍경들을 온전히 담아 누리고자 할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화평의 삼각대입니다. 이 화평의 삼각대는 말 그대로 세 다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다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순종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편안히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언제나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아무런 염려 없이 평강 가운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주관자와 책임자는 주님이시고 나는 다만 종으로서 순종하기 때문에 내가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면 우리는 평강 가운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용서받은 죄인들일 뿐이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화평의 삼각대가 우리 안에 온전히 세워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 인생에서 그려나가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멋진 광경을 온전히 담아 누리는 멋지고 행복한 카메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은혜와 평강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10.3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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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기쁨이라는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기쁨이 없고 걱정과 염려와 실망뿐이라면 우리는 살아갈 아무런 의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작은 기쁨이라도 있다면 그 기쁨으로 인하여 다른 많은 문제들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생활할 때 기쁨이라는 열매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러 종류의 기쁨들 사이에는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장난감을 선물 받고 기뻐하는 아이의 기쁨과 기뻐하는 자녀를 보며 기뻐하는 부모의 기쁨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또 한가지 기쁨의 특징이 있다면 기쁨의 차원이 높이 올라갈수록 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드컵 결승전을 하는데 3:0으로 이긴 팀은 그저 웃으며 기뻐할지 모르지만, 3:0으로 지던 상황에서 역전의 드라마를 일구어 우승을 이룬 팀은 눈물로 기뻐할 것입니다. 마라톤을 하는데 어릴 때부터 건강해서 금메달을 딴 선수와 그의 가족은 웃으며 기뻐할지 모르지만, 어려운 사고나 시련을 겪은 뒤에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와 그의 가족은 눈물로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본다면 우리는 그 기쁨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최상의, 가장 높은 차원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열매로써 나타나는 기쁨을 맛본다면 그것은 잔잔한 감동에서 시작되어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주님께 기쁨의 찬송을 외치게 할 것입니다. 

다함께 오늘의 본문 1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육신에서 비롯된 기쁨과 성령 안에서 나온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기쁨은 자신의 욕심이 이루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성령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에 근거합니다. 육신의 기쁨은 자신의 행함에 근거하지만, 성령의 기쁨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근거합니다. 육신의 기쁨은 우리가 높아질 때 찾아오지만, 성령의 기쁨은 우리가 낮아질 때 넘쳐납니다. 육신의 기쁨은 일시적이고 환경에 따라 급변하지만, 성령의 기쁨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한 계속됩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는 기쁨은 나의 상태에 근거하거나, 환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위치한 최상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가질 때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고, 환경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기쁨이 성령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설교의 구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이고,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한 기쁨이고, 세 번째는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 두 번째 고난, 세 번째 교회입니다. 


1.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
첫 번째로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함께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보시겠습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9 참새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그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31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여기에 일 앗사리온에 팔리고 있는 두 마리의 참새가 있습니다. 한 마리씩은 팔지도 않고 두 마리 묶어서 일 앗사리온입니다. 일 앗사리온은 16분의 1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하루에 16 앗사리온을 번 일꾼은 그 중 일 앗사리온을 주고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모두 참새를 산다면 모두 32마리의 참새를 살 수가 있습니다. 

참새를 사고 파는 사람들은 아무도 참새를 긍휼히 여기거나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흔해빠지고 어디를 가든 널려있는 참새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치킨을 먹을 때 닭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참새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집에서 나오면서 참새가 떨어져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참새를 보면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복음서를 주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렇게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지만 서로 비교하면서 볼 때 우리는 더욱 깊이 있고 또 흥미로운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을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 참새 다섯 마리가 이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혀지지 아니하느니라.
7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이제 날씨가 점점 쌀쌀해 지고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붕어빵입니다. 캐나다에서 붕어빵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다니는 서울침례신학교 건물 앞에도 붕어빵 아저씨가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붕어빵을 살 때 어떤 곳은 세 마리 천원, 그리고 일곱 마리 2천원에 파는 곳이 있습니다. 2천원이면 여섯 마리여야 하는데 한 마리는 서비스로, 덤으로 주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 참새도 똑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참새 두 마리에 일 앗사리온이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다섯 마리에 이 앗사리온이라고 했습니다.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이면 네 마리가 이 앗사리온이어야 하는데 여기에 한 마리가 덤으로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다섯 번째 참새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 이 참새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나마 앞의 네 마리는 값이 치러진, 가치가 인정된 행복한 참새들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다섯 번째, 아무런 값도 치러지지 않고 무가치하게 여겨진, 모두에게 잊혀지고 계산되어지지 않은, 서비스요 덤으로 팔려간 이 마지막 참새.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혀지지 아니하느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로는 이 다섯 번째 참새와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고, 기억해 주지 않고, 바라봐 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 속에 슬퍼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혀지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여러분 오늘 아침 머리를 감으시면서 몇 개의 머리털이 빠졌는지 세어보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시는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5 여인이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16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이 계속해서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사 49:15,16).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잘것없이 여겨지고 다섯 번째 참새처럼 사랑 받지 못한 것 같은 우리를 손바닥에 못 자국으로 새기시고 절대 잊지 않으시며 여전히 우리를 광대하고 세심한 손으로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또한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오늘 우리의 기쁨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돌보심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가 좀 못나고 모자랄지라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고 동행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며 원동력입니다. 


2. 고난으로 인한 기쁨
이제 두 번째로 고난을 통한 기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이며,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향해 가져야할 목표는 자녀의 행복이 아닌, 자녀의 성숙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목표로 삼을 때, 자녀는 나약해지고, 버릇이 없어지며, 책임감도 없어지기가 쉽습니다. 자녀의 행복을 목표로 삼은 부모는 자녀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며, 모든 필요한 것을 착착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녀의 성숙을 목표로 삼은 부모는 자녀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잘 조절하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잠시 거두기도 합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돌보고 계신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우리의 성숙을 목표로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축복과 행복이지만, 그러한 축복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성숙의 그릇을 먼저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재벌가인 아버지라고 해서 무턱대고 중학생인 아들에게 아파트나 자동차를 선물할 수 없듯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도 무턱대고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때때로 어떠한 환경들은 우리를 속이는 마귀의 역사일 수 있는데, 이러할 때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참새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러한 어려운 환경이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릇을 넓히시고 더 큰 축복을 담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에게 닥친 상황과 환경에 근거하지 않고, 그러한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 때 주님은 좋고 평탄한 환경들로 자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지만, 우리가 조금씩 주님을 따르게 될 때 주님은 우리가 따라올 수 있는 만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내하시는 가운데, 자상하게 우리를 성숙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환경은 다 주님의 사랑의 돌보심입니다. 

다같이 히브리서 12장을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또한 자녀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권면의 말씀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8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9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써 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10 진실로 그들은 며칠 동안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이제 어떤 징계도 그 당시에는 기쁘게 보이지 아니하고 슬프게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참새를 돌보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더욱 귀하게 보시며 우리를 섬세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많은 어려움과 고난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환경은 우리의 성숙하지 못한 점들을 사랑으로 바로잡으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혼내고 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로서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생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는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고 우리는 이러한 징계를 통하여 단련되어서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베드로전서 4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가 넘치는 기쁨으로 또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느니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우리의 삶에 불같은 시련이 닥칠 때, 우리는 자주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운 환경은 우리를 단련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더욱 성숙한 자녀로 만들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운 환경이 올 때 우리는 육신을 따르지 말고 성령님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닥친 징계와 시련의 목적입니다. 주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시려는 악한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련 가운데 주님께 철저히 순종할 때에 우리 마음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영광의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 

한 장 넘겨서 베드로전서 5장 6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이 우리를 억누를 때, 불같은 시련이 닥치고 어려운 환경이 우리를 억누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저항하여 벗어 던지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며 주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이 올 때 하나님이 나를 정말 돌보시는가 염려하지 말고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한 손으로 누르고 계신 것은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만 정금 같은 우리의 믿음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주의하여 살피는 때는 도자기가 불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입니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불 속에서 꺼낼 때만이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가 있기 떄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다면 그 시간은 내 인생의 그 어떤 시간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주시하여 바라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환경을 보지말고 하나님의 강한 손을 보아야 합니다. 환경을 볼 때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다섯 번째 참새마저 잊지 않으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숙이라는 그릇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기쁨의 한계가 넓어질 것입니다. 

캐나다에서 이번에 위암 수술을 받기 위해 오신 장 형제님께서는 위암 선고를 받고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님 그래도 내가 교회도 다니고 나름대로 주님 믿는다고 했는데 왜 복은 안주시고 이런 병을 주셨습니까, 하면서 원망이 들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나 같은 사람과는 멀리 계실 것 같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손을 나를 만지고 계시다고 느껴져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나님께서 몇 번에 걸쳐 신호를 주셨는데 내가 그 순간만 슬쩍슬쩍 넘어갔었다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셔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 인생에 개입해 주셨다고. 사랑의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3.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
이제 마지막으로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한 기쁨, 이제 세 번째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베드로전서 5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위에 8절에 나오는 마귀를 대적하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므로 우리 곁에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을 함께 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형제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힘이 없고 위로가 필요할 때 눈을 돌려 옆의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우리 형제들이 나와 동일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님을 사모하며 함께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해와 비방과 모든 시련 속에서 함께 주님을 소망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들 곧 나의 기쁨이요 왕관인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과 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관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있을 바로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 받은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형제의 고난이 오늘 나의 고난이 되고, 한 형제의 기쁨이 오늘 나의 기쁨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홀로 믿음의 길을 가야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라고 우리를 이렇게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어렵고 복잡할 때에도 나와 동일하게 복잡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여전히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우리 형제 자매님들을 생각할 때 많은 위로가 되고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지체들과 한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께 순종하고자 이렇게 달려가는 형제 자매들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기초합니다. 완전 버려지고 계산되지 않은 것 같은 다섯 번째 참새조차도 잊지 않으시며 모두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귀히 여기시며 섬세한 손길로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며 기쁨의 감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나를 여전히 잊지 아니하시고 돌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승리나, 우리의 성공에 있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근거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은 고난에 기초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대우하시는 증거입니다. 불같은 시련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돌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서 겸손히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가며 성숙할 때마다 우리의 그릇은 넓어지고 더욱 큰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우리는 환경을 보며 낙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실 작품을 기대하며 다만 순종하는 가운데 기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쁨은 우리 옆에 형제 자매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각자 모습도 다르고 생활도 다르지만 모두가 주님을 따르고자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주님께 전진하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한 형제의 일어섬과 돌이킴이 우리에게는 큰 감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감상하며 기뻐하고 서로 격려하며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귀한 형제 자매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영원히 멸망 가운데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귀한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으로 동행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7.09.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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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가장 먼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도록 만들어진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데도 자꾸만 이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서 만족을 찾기 때문에 여전히 굶주려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으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가득 채워져야 함을 또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말씀의 제목을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다른 모든 이방 종교들도 사랑을 외치고, 교회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단지 간절하고 뜨겁고 담대한 사랑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써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사랑의 열매는 다만 겉에서 보기에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아닌 깊은 속에서부터 성령을 통하여 나온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한 사랑의 특징
오늘의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랑의 특징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사랑의 특징은 욕심이 섞여있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아무런 계산이나 조건이 없지만, 육신의 사랑에는 요구가 있고 원하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이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면서 뭔가를 계산하고 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육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한 육신의 사랑은 결코 사랑을 하는 우리나 사랑을 받는 대상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사랑은 결국 우리도 힘들게 하고 상대방도 힘들게 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우리도 상처 입히고 상대방도 상처 입힙니다. 육신의 사랑 안에는 욕심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욕심이 얼마나 영적으로 선하게 포장되어 있느냐와 상관없이 욕심이 들어간 사랑은 성령의 사랑이 아닙니다. 육신의 사랑은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질투와 증오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이 성령 안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성령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상대를 지치게 만들지만 성령의 사랑은 상대를 안식하게 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감정적이며 한시적이지만 성령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성령 안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은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할 수 없는 나를 십자가에 넘겨드리고 성령 안에서 걷는 삶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흘려내는 길입니다. 

이제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랑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랑이며 율법으로 억지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해야한다"는 너무나 옳고 합당한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을 알고 있지만 잘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이 법을 지키고자 할 때 우리는 육신을 따라 걷게 됩니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해야한다"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사랑은 자연스러우며 평강이 흐르지만 율법 아래에서 나오는 사랑은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나오는 사랑은 힘이 들지 않지만 율법 아래에서 나오는 사랑은 사랑을 하는 우리를 더욱 메마르게 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사랑은 높은 표준의 사랑을 이루고서도 여전히 겸손하지만 율법을 달성하여 사랑을 이룬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해도 은혜 가운데 감사하지만 율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실패할 때 크게 낙담합니다. 성령의 사랑은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전히 사랑하지만 율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상처를 받고 미워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사랑을 해야한다"는 법을 지키는데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눈 딱 감고 못마땅한 사람을 한번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랑의 말씀들 가운데 3가지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주 예수님의 사랑이고, 세 번째는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먼저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혹시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으로 나온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창세기 22장입니다. 한번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백 세가 되어서 얻은 유일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알고 계셨는데도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시고 잔인하시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과 헌신, 이러한 내려놓음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이삭을 사랑했지만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했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은 잘 생각해보지 않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 헌물로 바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 사건을 신약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사랑"과 연결하여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번 신약에서 가장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입니다.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나타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을 번제 헌물로 드리는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 헌물로 드리는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삭을 바칠 때 아팠던 그 만큼 하나님의 마음도 아팠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을 향한 사랑의 마음만큼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삭이 말합니다.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 헌물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그리고 신약을 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동정한 만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아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들을 위해 아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크고 작은 조건들과 요구들로 나에게 짐을 지울 때에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나의 결심과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흘러서 넘치는 그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사모합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
이제 두 번째로 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안위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인정이나 긍휼이 있거든"
빌립보서 2장 말씀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이것은 1장의 문맥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1장 뒷부분의 문맥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사랑과 겸손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나 성령의 열매들을 추구하거든" 

2절과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일치하여 내 기쁨을 성취하라.
3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족들과 또한 교회의 지체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한마음으로 일치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다툼이 일어나고 교만이 있을 때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되며 겸손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못마땅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과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을 고쳐주시라고 기도하면서 그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없고 겸손이 없는 우리들을 먼저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 사랑하고 겸손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문맥은 사랑과 겸손으로 복음의 삶을 사신 우리 주 예수님을 모범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들을 사랑하신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과 높은 지위를 다 버리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을 냄새나는 말구유에 태어나게 했으며 비천한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게 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머리를 둘 곳조차 없게 하였고 해가 지도록 설교하여 몹시 피곤한 때에도 병든 자들이 몰려오면 한명씩 일일이 안수하여 고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데려다가 왕을 삼고자 할 때 자리를 피하여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들에게로 향하는 것이었고, 주님의 사랑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겸손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던 무지한 군중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었으며,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랑과 겸손을 날마다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자. 헛된 영광, 육신의 욕심, 미래의 야망 다 버리고 나와 함께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자.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바울의 사랑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사랑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고린도전서 8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고린도교회에서는 우상들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러 교회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혼란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가 추석 때 친척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명확합니다. 우상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반 음식과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어도 더 낫지 아니하고 먹지 않아도 더 못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으나 안 먹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식이 없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한 번 신전에 제물로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는 믿음이 좋은 형제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고기를 사다 먹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을 성결케 하여 주시고 이것을 먹고 제 몸이 더욱 건강해서 주님을 더 열심히 섬기게 하여주옵소서." 그러나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약한 형제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실족합니다. "어떻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그 고기는 분명 부정한 것이다. 저 형제는 죄를 짓고 있다." 또 어떤 약한 형제들은 "믿음 좋은 형제도 먹으니까 나도 먹어도 되겠지."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 사람을 따라 행동하므로 믿음이 망가집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올바른 지식을 가진 형제들은 우쭐해서 그렇지 못한 형제들을 무시한 채 고기를 먹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 자체는 하나님께 죄가 아니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다는 것에서는 죄가 되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12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사도 바울의 행동의 원칙은 어떤 것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었고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 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형제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무엇이 옳습니까? 고기를 먹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잘못되었습니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만약 반드시 고기를 먹으라는 순종의 문제라면 우리는 뒤로 물러설 수 없지만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권리와 자유의 문제라면 우리는 충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정당함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형제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형제 자매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우쭐하고 있다면 우리는 2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만을 가진 고린도 성도들은 우쭐대며 다른 형제들을 개의치 않았지만, 지식과 사랑을 함께 가진 사도 바울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랑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꾸려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육신 안에서 지식에 의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잘못된 것만 고치는 길을 가고 있지 않고 형제를 위해 기꺼이 나의 옳고 그름도 내려놓는 길을 가야 합니다. 


정리
우리는 오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를 번제 헌물로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은 형제를 위해 자신의 정당함과 권리마저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옳고 그름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한없이 부어졌기에 오늘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 참아주셨고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따라올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한 가지씩 알려주시며 한 걸음씩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진 자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요구하고 판단하라고 함께 길을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부어진 그 넘치는 사랑으로 더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를 함께 가게 하셨습니다. 서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08.29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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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온 세상의 외침 - 사랑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탱크와 같은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안전할 수 있고, 가이드와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만이 율법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로 언급되는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아홉 가지로 언급된 성령의 열매가 모두 중요하지만 특별히 첫 번째로 언급된 이 사랑이라는 주제는 너무나 크고 중요합니다. 이 사랑의 열매에 대하여는 앞으로 한두 번 정도 더 나눠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몰랐던 뭔가 심오하고 난해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마음에 "맞아 사랑해야지"하는 머리에서부터 비롯된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러일으켜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캐나다에 있을 때 석기시대라는 삼겹살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웨이터 일을 해보니까 좋은 점이 가끔 까다로운 손님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정신적인 노동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일하는 내내 서있어야 하고 계속 음식을 가져다주어야 하기 때문에 다리는 좀 피곤하지만, 일하면서 때로는 설교구상도 할 수 있고, 때로는 장래에 대한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도 있고 일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식당에서는 한국 유행가를 계속 틀어놓았는데, 평소에 유행가를 듣지 않던 저에게는 또 다른 경험이 되었습니다. 유행가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담고 있는 노래인데, 그 노래의 가사들을 가만히 들어보니 대부분의 노래가 바로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신나고 경쾌한 노래들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래들이 "충족되지 않는 사랑",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현재의 상처받은 마음", "잃어버린 마음에서 비롯된 공허함과 허전함"을 주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노래들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손님들을 대해보니 그들 모두가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무엇을 주문하고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져줄 때 손님들이 아주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골손님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해주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기억해주고 그에 맞춰서 서비스를 해주면 사람들이 아주 즐거워합니다. 그리도 팁도 더 많이 줍니다. 다른 자리에 음식을 전해주고 지나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무엇이 필요하겠구나 생각을 하고 가져다주면 자신들이 미리 말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딱 가져다주는 서비스에 손님들이 감동을 합니다. 

이 세상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들도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밴쿠버에서나 한국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굶주린 마음을 만족케 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상처만 주고받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 창조된 사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제 핸드폰 벨소리가 이 노래로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모든 것을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산과 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작은 한 송이 꽃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누리고 즐기며 안식할 수 있는 장엄하고도 섬세한 모든 환경을 설계하시고 제작하셨습니다. 
그 뒤에 사람을 만드시되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요구하고 짐을 지우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홀로 만족하시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주고 또 주기 위하여 사람이란 존재를 자신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질그릇과 같아서 상처받기 쉽고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곰이나 늑대 같은 단단한 가죽이나 따듯한 털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독수리와 같이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없고, 독수리의 눈처럼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거나 땅 위의 작은 토끼나 쥐가 움직이는 것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올빼미나 부엉이같이 밤에 볼 수 있는 눈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낙타와 같이 갈증을 견딜만한 물혹도 없고, 카멜레온과 같이 자기를 숨길 수 있는 보호색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모두 너무나 연약해서 쉽게 상처받고 깨지는 연약한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동물들에게 제각각 뛰어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주시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이란 존재를 이토록 약하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것입니까? 

여러분 혹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출생의 문학가인데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던 중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생에 대한 공허함을 느끼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톨스토이란 사람이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삶의 공허함을 느낀 한 문학가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이윽고 명작 중의 명작이라 불리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무엇으로 산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과연 뭐라고 말했는지 궁금해서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놀랍게도 이 작가는 여러 단편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돈이 없고 몸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존파였는지 막가파였는지 모르겠지만 극악무도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그 사람들이 기자들 앞에서 외친 말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사회가 우릴 버렸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과 같지 못하고 일그러진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랑으로 온전케 되지 못한 면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격에 문제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이 사랑 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누군가 성격이 좋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잘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나마 사랑을 좀 더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자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열매 중 사랑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열매라는 것은 생명의 활동을 통하여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밖에서 모양을 만들어 달아놓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무리 화려하고 눈부시다 할지라도 그것은 생명의 활동을 통하여 나온 열매가 아니므로 모두 가짜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을지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나온 열매여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이 사랑을 모조해서 달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열심을 따라 사랑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망치고 다른 형제를 망치며 영혼들을 망치게 될 뿐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긍휼을 받아본 사람이 그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결심이 부족하고 성경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한없이 넘쳐흘러서 우리를 주체할 수 없도록 전율시키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도록 이끄시는 그 사랑의 권능을 아직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다른 이에게 물을 줄 수 없고, 굶주린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음식을 양보할 수 없듯이 우리가 아직 사랑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나오려면 우리 안에 먼저 사랑이 가득가득 넘쳐흘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서 그러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굶주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랑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찬송가 기억하십니까?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땐 나는 만족하였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린 가운데 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살아갑니다. 관심 받고 싶고, 칭찬 듣고 싶고, 대우 받고 싶고, 존중 받고 싶어서 자기를 으스대며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를 개발시키고 피곤하게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갑니다. 너무 과시하면 또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적당히 과시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자기를 낮추는 아주 치열하게 밀고 당기는 피곤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서로가 사랑에 굶주린 존재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만족시킬 수 없고 피곤하게만 만들뿐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들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찾는 한 우리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찾고 원하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사랑에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계산하고 판단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 같으면서도 깊은 속에서는 나의 영광과 칭찬과 유익을 계산하지는 않았습니까? 나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부모님과 형제들과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무관심하게 상처 주는 말을 쉽게 내뱉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힘들어하는지는 개의치 않으면서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만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매순간순간마다 마음으로, 눈빛으로, 입술로 짓는 모든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간증
저는 외아들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에도 스스로 외로움을 많이 탔습니다. 성격은 뭐든 내 생각에 옳은 대로 해야 하고 고집도 셌기 때문에 어릴 때는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주로 동네에서 내 말을 잘 따라주는 동생들과 어울리며 골목대장 역할을 했습니다. 해가 지면 다들 집에서 형제들과 노는데 저는 혼자서 집에 앉아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친구를 사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반에서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습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저마다 공부 잘하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축구 좋아하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만화 그리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컴퓨터 게임하는 애들끼리 어울렸습니다. 저는 담배피고 싸움하는 애들을 제외하곤 가능한 모든 아이들과 다 어울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연필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빌려주고 어떤 분야든 두각을 나타내야만 아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도움 요청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했습니다. 물론 그 나이 때 그런 계산을 다 해서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볼 때 저의 마음에는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들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서도 저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설교도 잘하고 뭔가 두각을 나타내야만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열심을 냈습니다. 물론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도 있었지만 육신의 여러 가지 계산이 섞여있었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칭찬을 듣고 격려를 들을 땐 무엇보다 기뻤고 마음에 만족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실한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맡기면 믿음직하게 해내는 형제, 똘똘하고 지혜로운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제 작년 공익근무를 하면서 저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이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시청에서는 공무원들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시간에는 집에 앉아서 쉴 수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책임자에, 청년부 회장에, 교회 홈페이지와 녹음 담당을 하고, 수요일엔 격주마다 설교를 하고, 토요일엔 교회 청소와 주보 만들기까지 하면서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에 비협조적인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은사가 많은 형제니 훌륭한 형제니 하는 칭찬도 더 이상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아니 주님 이거 너무한거 아닙니까?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됩니까? 사람들 칭찬 다 필요 없습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다들 일 시킬 때만 나 부르고 아주 짜증납니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뭘 힘들어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다가 일 시킬 때만 전화하고 내가 무슨 일하는 머신입니까? 내가 만약에 아무 능력도 없고 일도 못하면 아예 신경도 안 쓸거면서 일 시키려고 전화해서 괜히 미안하니까 안부 한마디 묻는거 아주 그냥 짜증납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온 그 길의 결과는 제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시청에서 막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교회 안에서는 최소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조차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있는 힘껏 꽉꽉 누르고 지냈지만 시청에서는 함부로 행동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합리하면 직원들하고도 싸우고 계장님한테도 대들었습니다. 마치 건들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였습니다. 마음속에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마음과 외로움이 죄책감과 뒤엉켜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인생이 허무해지고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을 내고 모든 희생을 감수했는데 내게 돌아오는 것은 더 많은 일들과 책임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왕따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고 모든 의욕은 상실되었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슬픔과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나도 원래 이기적인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보여주겠다고, 다른 사람 도움도 필요 없고 다시는 나도 누구든 안도울거라고, 내가 얼마나 외로움을 잘 참고 혼자 잘 사는지 보여주겠다고 내가 모두를 왕따 시키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해주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셨습니다. 생활 중에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분의 손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인도하시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그 전부터 진행되던 어떤 일들과 만나면서 퍼즐과 같이 맞춰지고 모든 어려움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해결되는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손길 앞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모든 인생과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들려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망나니같이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는 더욱 부드럽고 따듯한 손길로 저를 품어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고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데요? 왜 못살게 굴다가 잘해주는데요? 이제 와서 잘해주면 뭐 바뀌나요?" 따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상처받기도 싫고 실망하기도 싫어서 이를 악물고 굳게 닫아버린 저의 마음에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왜 이런 나를 사랑하냐고요! 나 좀 내버려 두세요!"하고 외치던 저의 마음은 이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못난 놈까지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성실하려고 사랑받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날 사랑하신다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까지도 그대로 사랑하신거라고. 하나님의 사랑엔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시작하신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이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사랑받고 안식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다 나처럼 사랑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군가의 모가 나고 잘못된 행동 뒤에는 사랑의 굶주림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결핍증에 걸려있습니다. 세상의 노래와 영화와 유행을 따라가며 허기진 마음을 채워보고자 치열하게 달려가지만 결국 얻는 것은 더 큰 수고와 공허함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높고 깊어서 우리가 평생을 마시고 누린다 할지라도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충분히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분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며 우리가 더욱 주님께 이끌리기를 원합니다. 아멘.

* 설교 일시 : 2007.07.3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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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성령 안에서 걸으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간증으로 시간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짧게 하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걸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앞으로 저에게 수요설교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저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전체적인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16,17절 성령 안에서 걸으라
오늘 우리에게 미약하면서도 강렬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깊은 마음 속에서 가지는 간절한 원함은 바로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원은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이러한 열망이 더 커지고 더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가 되므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럽고 천연적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생명과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결코 조화되거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욕심"이 동기가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말들로 포장될지라도 여전히 육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떠한 원함이나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심과 성령의 원함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원함은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나의 유익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되 그분의 말씀이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스스로 옳게 보이는 사망의 길로 급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라고 할 때 멈추는 것이지만, 육신의 욕심은 유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손해가 있을 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1928년 일본이 중국 만주에 침략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일지사변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일지사변이 일어난 뒤 3개월 간의 전쟁을 통해서 중국은 많은 숫자의 탱크를 잃어버렸고 더 이상 일본군의 탱크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중국군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군 탱크가 지나갈 때 숨어있던 저격수가 총 한발을 쏩니다. "팅" 총알은 탱크의 표면을 맞으면서 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한 발을 쏩니다. "팅" 역시 소리만 날 뿐입니다. 또 다시 얼마가 지나고 한 발을 쏩니다. "팅" 그런데 갑자기 탱크가 멈추더니 드디어 탱크의 운전수가 도대체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보기 위하여 탱크의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게 됩니다. 이때 탱크의 뚜껑을 겨누고 있던 저격수는 운전수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당깁니다. 탱크의 운전수는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신경쓸 것 없이 탱크 안에만 있으면 완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탱크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탱크의 뚜껑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게 됩니다. 죄와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 연합군이 되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육신의 욕심을 거스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결단력이 강하고 신념이 굳센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단이 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성령 안에서 걷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18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18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성령 안에서 걸으라." 18절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이 두 표현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억지로 오 리를 동행해 주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십 리까지도 기쁘게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감추고 억누르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외적인 말과 행동만을 조심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마음 속의 동기와 의도까지도 주의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교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겸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을 따지며 자신의 유익과 손해를 계산하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지치고 피곤하고 복잡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단순한 기쁨과 화평 속에 안식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아닌 많은 좋고 선한 것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몇 주전에 캐나다 동부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는 "안개 속의 숙녀호"라고 해서 배를 타고 폭포 앞까지 가는 관광코스가 있었습니다. 매표소 앞에 봤더니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서 "아이고 이거 한번 타는데 시간 다 가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행 가이드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이드는 그곳에 일하는 사람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더니 모든 줄을 앞질러서 옆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은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가이드의 인도를 받아서 온 저와 다른 몇 분은 일반적인 규칙 아래 있지 않고 특별한 규칙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빨리 "안개 속의 숙녀호"란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까지 가서 시원한 폭포의 물안개를 맞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성령님이라는 가이드, 인도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할 때에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게 되면 율법을 초월한 생명의 성령의 법, 자유의 법에 적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19-21절 육신의 욕심의 결과
19절부터 보시면 여러 가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은 성적인 죄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자야하는 수면욕은 죄가 되지 않지만 질병이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자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하는 식욕도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남용하여 탐식할 때 죄가 됩니다. 성적인 죄악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서 욕심을 부리게 될 때 죄가 됩니다. 간음과 음행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는 모두 순간적인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더 좋고 중요한 것들을 버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특징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며, 성령의 특징은 더 좋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서는 "우상 숭배와 마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죄악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게 절에 가서 불상에게 직접 경배하지는 않지만 은밀한 우리 마음 속에 수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육신의 욕심과 탐심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에게 늘 긍휼과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여전히 섬기고 거기에 더하여 많은 축복을 줄 것 같은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지만 거기에 더하여 많은 좋은 것들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욕심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우상들이 무가치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0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그리고 21절에 "시기와 살인"의 죄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의 특징은 모두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과 연관해서 짓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증오가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경쟁하고 진노하고 다투고 폭동을 일으키며 파당을 짓고 시기하며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목록들 중에서 경쟁하고 다투고 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간음이나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이 큼직하고 무거운 죄악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시기하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육신의 욕심 가운데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 취함과 흥청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짓는 죄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배움이나 섬김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며 흥청대는 것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망치고 자멸시키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2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비결은 단 한가지인데 바로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육신의 욕심을 따라 다른 형제들을 시기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주님의 일들을 섬기는데 나의 육신의 욕심이 첨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오늘날 성령을 따르고 성령에게 심는 사람만이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둘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영존하는 생명은 영원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가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았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많은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푯대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사역이나 섬김도 우리의 욕심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섬기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 해주고 나를 따르는 것을 바라는 것도 육신의 욕심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육신의 욕심으로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썩는 것이 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22,23절 성령의 열매
22절부터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오늘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앞으로 설교를 하게 될 때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은 육신의 모조품이 아닌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공한 그리스도인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 입니다. 지식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으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자녀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다스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 가운데 화평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열매는 불화와 경쟁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신 것같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참아주셨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문제가 많은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주님이 참으시는 것같이 나도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부드러움입니다. 우리에게 까다롭고 거친 모든 이들에 대하여도 우리는 어린양 같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볼 때 부드러움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은 거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며 걸림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부드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선함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악착같이 달려드는 태도는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스스로 보상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나에게 선하게 대하신 것같이 우리들도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데 이것 역시 육신의 열심이나 욕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겸손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교만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는 절제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특징이 욕심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육신의 특징이 급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신은 답답한 상황을 못 견뎌 일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의 열매는 말과 행동을 절제하며 주님께 순종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울은 대언자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으나 급하게 스스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급하게 왕이 되려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사울을 넘겨주신 기회가 왔을 때에도 절제하였습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25). 

오늘 우리의 원함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에 그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는 이러한 열매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은 교묘하게도 영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육신을 따르는 많은 믿는 이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율법을 강조하면서 할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영적인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육신과 성령은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육신과 성령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게는 영적인 모양이 있지만, 성령님께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실제적인 순종과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가 금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모든 뿌리가 욕심에 기초하며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하며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익과 손해를 크게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26절에 나온 것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심게 될 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존하는 생명과 영광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탱크 밖으로 나와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꾸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 기웃기웃 거리며 다니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 때에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 설교 일시 : 2007.07.1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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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전 8:1-3)


고린도전서 8장
1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전서 8장 전체와 로마서의 한 부분, 에베소서의 한 부분을 함께 펴볼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잘못된 사랑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듣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 처음 가게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해 줍니다. 또 세상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노래들이 "사랑"을 주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이며(단 12:4), 많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이러한 지식도 가지고 있고 저러한 지식도 있으므로 나는 부유하며 풍부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하고 우쭐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서로 배반하며 미워하고 불법이 만연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딤후 4:1-5, 마 24:10-12). 이 시대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며 쾌락적입니다.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다 있겠지만, 전체적인 세상의 흐름은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랑이 점점 메마르고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 사랑은 없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랑"이 실제로는 없으면서도 "사랑"이라는 외침만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며 지옥과 심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죄와 지옥에 대하여 경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멸망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며, 그 길로 더 이상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은 축복의 길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편에서 이와같이 이렇게 거짓되고 잘못된 사랑에 반발하여 일어난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또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랑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치우치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사랑을 거부하는 동시에 실제로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형제사랑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란 말만 울려 퍼지고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며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도 일반 다른 음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우쭐대게 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올바른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높아지며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만에 반대하는 단어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나 스스로를 세워주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지식은 나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에게 유익을 줍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지만 사랑은 우쭐대지 않습니다. 

2절에 보시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지식이 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아는 줄로 생각하게 되지만,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때 그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내 옆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지식으로 충분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게 됩니다. 그가 지식만 가졌을 때는 몰랐던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분께서 그 사람을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아, 내가 교만하구나. 나는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하여 우쭐대고 있었구나."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식만을 가지고 우쭐대며 스스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지식
이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6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가지고 있던 지식은 그 음식들이 다른 일반 음식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우상들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쭐해집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 음식은 보통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몇몇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좋은 형제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이런 죄는 지어도 되나보다"하면서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습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리고 타협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약한 형제를 사랑하므로 진리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내가 올바른 지식을 따라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될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의 기준은 다만 올바른 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게 되며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당시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이미 신전에서 한번 제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지어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신전에서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묻지 말고 먹으라고까지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고전 10:25). 

사도 바울은 내가 고기를 먹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옳고 합당할지라도, 지식이 없는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아예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을 따라 살아갔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언급된 말씀
이와 똑같은 말씀이 로마서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약하여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에서의 문제가 로마에서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어떤 성도들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먹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 믿음이 약한 어떤 성도들은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들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신전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먹느냐며 채소만 먹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보며 올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무식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보면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생각 때문에 먹지 못하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자기들의 양심을 거슬러서 강한 형제들을 무조건 따라서 먹으므로 그들이 약한 양심이 더럽혀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로마 교회에서는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알고 또 주 예수님을 통해 확신하거니와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으되 어떤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하니라." 

이것을 다시 말하면 어떤 음식도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도 그 자체로는 먹는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더럽히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해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제 네가 사랑으로 걷지 아니하나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식으로 인하여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의 형제가 근심하는 것을 보거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지식 안에서 걷기보다 사랑으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2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고 그가 세워지게 할지니라.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를 강하게 하며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식만을 추구하면 나 홀로 서게 되지만, 사랑을 겸하게 추구하게 되면 교회와 함께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대신 짐을 져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연약함을 못마땅히 여길 것이 아니라 담당할 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마도 유럽인지 미국인지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여행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난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우리 옆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고 사신 귀한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격에 고칠 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때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하신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하셨다면 우리는 질려서 도망쳐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옆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잘못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모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격들을 발견합니다. 때론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발견하고 바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지 말고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잘못된 지식들과 문제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잡기 전에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알려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히 엎드리며 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안다고 나의 올바른 지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려고 하지말고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앙배경이 어떠한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지식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때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정말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진리 한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젊은 부자 청년에게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하시면서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은 허공에다 진리를 따발총처럼 외쳐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귀한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 위에 믿음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인 우리들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말씀
다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4절부터 보시면 사도 바울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14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15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무엇을 빌고 있는지 잘 주목하여 보십시오.

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많은 심오한 지식과 교리를 모르는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우쭐댈 만큼 많은 지식은 있으나 참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서 지식으로 걷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20절부터 또 보시면,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안에서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능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식에는 권능이 없지만 사랑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일할 때는 밖에서 내가 일하지만 사랑으로 일할 때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먼저 사랑이 있는 가운데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권능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형제를 망치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은 많고 사랑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고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결핍되면 그 지식은 형제를 망치게 되고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마땅히 알 바를 모르게 만드는 어두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부하지 아니하며 자긍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지식은 있다 해도 사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분의 제자가 되고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다 아시고도 천천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를 우리가 따라오고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알려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우쭐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 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1,2,3,4,5번 순서대로 마구 제시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과연 어떠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시는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식은 함부로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주의깊이 듣게 만듭니다. 지식은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며 배려하게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지식은 진리의 권능이 되어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사랑이 없는 지식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하면서 우쭐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성도들은 옳게 행하였으나 형제를 망쳐버렸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은 형제를 업신여기며 논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식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지식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하지만, 사랑은 먼저 나 자신을 바로잡게 만듭니다. 진리의 지식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전달되는 지식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선포되는 진리의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우쭐대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애통하며 주님께 사랑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한 것처럼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를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7.06.13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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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하나님(엡 1:17-19)


에베소서 1장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그분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19절을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으로 "영광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보자면 우리가 지난 3주간 설교말씀을 들은 것과 같은 주제로써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라고 달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옛날 옛날에 어떤 농부와 나무꾼과 어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신이 있다면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나무꾼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보게들 신은 분명히 산에 계셔. 자네들 이른 새벽에 나무하러 산에 올라가 봤나? 아침에 자욱하게 안개 낀 숲 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으면 그 공기만으로 신을 느낄 수가 있어. 어쩔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단 말야. 나도 모르게 내가 저지른 죄들이 막 떠올려지면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거든. 그리고 산신령이라고 들어봤지? 아무튼 신이 있다면 산에 있을 거야."

그러나 어부가 대응합니다. "어허, 신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바다의 신이지. 용왕님이라고 들어봤지? 그리고 서양에서는 포세이돈이라고 부른다구. 산신령은 우리나라에만 있는거잖아? 그러니까 바다의 신이 그야말로 진짜 신이지. 신이 있다면 그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파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바다의 신이 분명해. 

그러자 잠잠히 듣고 있던 농부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눈을 들어서 하늘을 좀 보게나.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있겠어? 신이 있다면 바로 태양신이지. 아니 빛이 없으면 곡식도 자랄 수가 없고, 산에 나무는 물론이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갈 수도 없단 말이야. 그리고 자네들 공부 좀 해보면 알겠지만 이 바다에 바람이 불고하는 것도 다 태양신이 이 땅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이지. 비오는 것도 결국 다 태양신이 하는거야.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태양신 라아라고 부르잖아. 하여간 무식하면 안된다니까."

이렇게 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해봤지만 결국 정답 없이 서로의 생각만을 주고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늘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경험과 관념에 빠져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가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 알게 하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지각의 눈을 밝히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권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알게 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기도와 같이 "주님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광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친절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많은 특징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부분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태초에서부터 영원까지 계획하신 시작이요 결말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의 소원은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으며, 사무엘상 4장에서 비느하스의 아내는 주의 임재를 상징하는 주의 궤를 빼앗겼을 때 주의 영광이 떠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구구절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라고 외치고 있으며, 이사야 6장에서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람의 죄가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린 것에서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면 이 세상 왕국들을 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다가올 영광을 보시고 십자가의 수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시며 견디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우리가 장차 받을 영원한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은 아주 짧고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 이곳저곳을 살펴볼 때 "영광"이라는 주제는 계속해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힘이 없고 잠든 것 같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 영광을 향한 경주로의 초대
사람들에게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이요, 지옥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관점에서 죄의 대가가 형벌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영광의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을 조금 더 풀어서 써보자면,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조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의 멸망에 처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했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화살이 표적을 벗어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영광이라는 표적을 향해 활을 당겼는데 인간의 죄로 인하여 표적에서 빗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만 멸망할 죄인을 지옥에서 건져낸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실격처리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달릴 수 없게 된 우리들의 위치를 회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릴 수 있도록 출발선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끝이나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요 출발인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계획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을 가리켜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5:10). 

또한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의 위치는 예정을 받은 것만이 아니요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아니요 의롭게 된 것이며, 다만 의롭게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목적은 바로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게 영광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에 성공하여 재벌이 되어서 그 영광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어 국민의 영웅이 되고 모든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영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수나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환호를 한 몸에 받는 영광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사람들 뿐 아니라 때론 매우 소박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와, 당신은 매우 성실하군요.", "당신은 정말 깔끔하군요.", "당신은 정말 책임감이 강하군요.", "당신은 아주 순수하시군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워하고 때로는 그러한 영광, 칭찬, 평가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렇게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악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결승전을 치르지 않은 어떤 우승후보가 벌써부터 금메달을 딴 것처럼 미리 기뻐하는 것같이 아주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것은 장차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시상해 주실 것이지 우리가 아직 이 땅에서 경주하는 동안에 누려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경주를 다 달린 후에 주어지는 것이지 경기 중간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경기를 달리는 중간중간 관중들을 바라보고 멈칫하고 주춤한다면 그는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려고 한다면 이렇게 주변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
저는 오늘 말씀의 부제목을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지옥과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만이,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알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얼마나 절실한지를 분명히 알 때만이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한 젊고 유능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똘똘하고 계산이 빠른 형제였습니다. 또한 이 형제는 아주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한 일주일 하다가 그만두는 일도 이 형제는 일 년이 지나도록 지속하고, 남들이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도 꼼꼼하게 따지고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는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는 무슨 훈련을 받아서 이렇게 된게 아니라 그냥 천연적으로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주 훌륭한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는 스스로 느끼기에 십자가가 별로 필요 없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할 수 없는 육신이어야 십자가가 필요하지, 성경공부면 성경공부, 구령이면 구령, 설교면 설교, 교회봉사면 교회봉사, 아주 다방면으로 교회의 지체들과 비교해 볼 때 그다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 육신이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말이 상당히 멀리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사랑했던 이 형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깊은 속에 있는 갈망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께서는 이 형제의 기도에 "아멘!" 응답하시고 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속에 있는, 영원한 목적이 바로 영광스러운 교회였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그림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가죽옷이라든지, 아벨의 피의 제물이라든지, 유월절 어린양이라든지 하는 많은 예표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예표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그것들이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 죽임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는 이 형제에게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아담이 자신의 아내인 이브를 얻기 위하여 죽음의 잠을 통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남편이신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음을 통과하는 모습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가 유의하여 볼 것은 이 때 아담이 이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브가 존재하지도 않을 때에, 이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죽음의 잠을 통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사람에게 죄의 문제가 없었다할지라도 이미 영원 전부터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계획하고 계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치료책이 아니라,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계획하고 계셨던 영원한 목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러운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지혜와 영광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타낼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 그 목적은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이것은 곧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또 5장에서는 "25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 16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 27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목적하신 것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주님의 몸이요, 주님의 신부인 교회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를 목적하셨습니다. 
이제 이 형제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형제의 목적은 다만 "내가 주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얻으시도록 섬겨야지"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지"하는 개인적인 이유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형제는 이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얻으시도록 지체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야지"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기도하고 책보고 성경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던 이 형제는 이제 교회의 지체들과 어울리고 함께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형제에게 왜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알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자기 자신의 영적인 성장만을 생각하던 이 형제가, 교회의 전체적인 하나됨과 성장을 고려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섬겨야할 일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섬김의 빈자리들을 알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섬기는 힘의 근원은 그의 타고난 성실함과 책임감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하던 이 형제는 어느 날 이상하게도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주님을 섬기고 나서 은혜로 가득 차야할 그의 마음은 오히려 그와 같이 섬기지 않는 지체들에 대한 못마땅함과 정죄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과 같이 주님의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지체들을 보면서 판단하고 스스로 교만하여 지고 딱딱하며 차가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지체들이 이 형제를 칭찬하면서 하나님께서 귀한 형제를 우리교회에 주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되찾아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자신이 지체들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발견하였고, 또 많은 일들을 잘 처리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사람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얻으시도록 더욱 뜨겁게 지체들을 사랑해야할 판에 교회를 섬긴다고 많은 열심을 부리고 나서 오히려 지체들을 향하여 차갑고 비판적이며 못마땅한 마음이 가득한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더욱더 겸손히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모든 일들을 잘 섬기고 나서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쳐오는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서 열심을 부리는데 왜 지체들을 더 미워하게 될까요? 하나님,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데 왜 주님을 섬길수록 주님의 영광을 훔치는 자가 될까요?"라고 기도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너가 육신으로 교회를 사랑하려 할 때, 너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려 할 때, 오히려 교회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너가 육신으로 주의 영광을 위할 때, 너의 타고난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때,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 자신 안에는, 너의 육신 안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이 선한 육신이든, 성경지식이 가득찬 육신이든, 성실한 육신이든, 육신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할 수 없다."라고 못박고 계십니다. 
또한 로마서 8장 8절에서는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지혜로운 육신이든지 상관없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히려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한 면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할 수 없는 육신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또 한 면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과 경배를 탈취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무리 좋고 선할지라도 우리가 이 육신을 십자가로 넘겨서 처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양육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꿀꺽꿀꺽 집어삼키며, 이기적이고 교만한 왕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리
오늘 우리가 처음 읽은 에베소서 1장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17절에,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그분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오늘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고 처음 위치를 회복한 우리들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릴 수 있도록 선발되어 경기장에 들어온 선수들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모든 지체가 주님의 몸으로서 다 함께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경기하는 한 팀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시고 하늘에서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장차 하늘에서 영광을 얻도록 달려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광을 받을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철저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의 영광을 구한다면 장차 하늘에서 받을 보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에 위선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마 6:2).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잠깐의 칭송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성취하게 되면 내가 의도하지 않게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져야할 영광을 탈취하여 나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섬길 때에만이 우리는 모든 일을 섬기고 나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침례자 요한이 고백한 것과 같이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육신이 처리된 사람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음에 넘겨진 사람만이 오직 100%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을 다시 보시면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지극히 크고 강력한 권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권능으로 활동하시며 자신의 일들을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만이 온전하며 모든 일을 다 섬기고 난 뒤에 내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진 섬김과 수고들을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인 적도, 사람의 귀에 들려본 적도, 사람의 생각과 마음 속에 상상되어본 적도 없는 너무나 과분하고 황송하며 뛰어난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영광을 계획하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신 모든 은혜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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