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7.05.16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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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요일 4:7-11)

요한일서 4장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9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나니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
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11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 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교회는 지난주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믿음의 여러 방면들 중에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까지도 모두 가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들을 때 너무나 큰 감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나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다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 들을 때 어떤 사람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는 표시는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이 마음이 많이 남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새롭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믿음의 전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또 시간이 생길 때마다 책을 읽는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기 위한 좋은 시도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저는 특별히 제가 소홀히 하고 있던 "사랑"이라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올바른 지식은 자신을 차갑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굳건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양심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 

우리가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교회에 왔을 때 우리가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는 분명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17살 가량 되었을 때 20여명의 형제 자매님들과 복음을 전하러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10인 승 차량 2대를 가지고 다녔는데, 때로는 지방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20여명의 형제 자매님들이 같이 다니면서 평소에는 서로 친절하고 상냥하고 천사 같던 지체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는 깨워도 안 일어나고, 누구는 지저분하고, 누구는 눈치도 없이 많이 먹고, 누구는 텐트 정리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고, 누구는 더운데 차 창문도 못 열게 하고, 누구는 모이는 시간도 안 지킵니다. 누구는 말투가 기분 나쁘고, 누구는 고집이 세고, 누구는 혼자 서두르면서 다른 사람 괜히 재촉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형제 자매님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나로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들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또 한 구석에서는 "절대로 저런 모습은 사랑할 수 없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작게든 크게든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지체를 만나면 쉽게 교제가 되고 금새 친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형제 사랑을 잘 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편중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마 5).

저는 제 안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많은 영화와 노래가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온 세상이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이 세상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손해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때론 멋지게 포장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포장을 풀어버리고 나면 상처를 받지 않으려 하고 결코 낮아지려 하지 않으며 딱딱하고 차갑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결코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수준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린 아이로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 저를 더욱 이끌어 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저 사람이 이렇게 바뀌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천사 같이 바뀐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형제 자매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셨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일서 4장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 4).

사랑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며,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더 풍성해 지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9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9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나니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 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의 사랑의 원천은 바로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이해했는지에 따라 우리의 사랑의 깊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로 죽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른채 방황하며 헛되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재물의 염려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살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귀를 닫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습니다. 사망과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죄의 용서와 구원이란 값없는 선물이요, 공짜로 주어진 은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구원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선물을 주고자 이 천년을 고민하신 하나님께서 갈보리 백화점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라는 상점 앞에서 자신의 독생자의 피를 지불하고 넘치는 용서와 은혜라는 선물을 마련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습니까? 조건을 걸지 않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다같이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처럼"이란 표현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이처럼"이란 단어를 볼 때, 우리 각자가 느끼는 사랑의 깊이가 각자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만큼 다른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에 아직 요구가 많고, 조건이 많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실한 형제는 게으른 형제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꼼꼼한 형제는 덜렁대는 형제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내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덜렁대는 사람인지 알려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전히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하나님,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섬세한 사랑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게으르고 덜렁대는 형제를 조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꾸려할 때는 참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형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참되게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형제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많은 우리들을 변화시킨 것이 나의 결단과 굳은 의지와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었던 것처럼, 다른 지체들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 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기도
오늘 우리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우리 안에 흘러 넘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문제가 많은 우리를 조건 없이 한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옆의 지체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에 푹 잠기게 하시고 나의 요구와 조건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지체들을 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빛을 주셔서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더 알려주셔서 우리의 사랑이 더 온전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12.3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주일설교/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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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만난 하나님(눅 19:1-10) 

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6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안녕하세요? 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에게 이런 뜻깊은 시간에 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우리 그레이스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신 서충원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수요일 기도모임 때 설교를 해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주일날 예배 때 설교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하는 태도로 듣지 마시고,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구하고 찾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는 결코 마법의 지팡이라든지 뭔가 신비한 힘을 가진 지팡이가 아니었고, 일반 다른 나무 막대기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을 때에 이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기도 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한 청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주시고 또 저의 입술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누가복음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저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한 형이 있습니다. 또 그 형에게는 식당을 하시는 외숙모가 계셨는데 그 때 그 형이 그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형이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식당에 가서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외숙모 오늘 삭개오 이야기 들었어요." 그랬는데 외숙모가 설교시간에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약간 당황한 이 형은 아니 성경에 삭개오가 나오니까 설교를 들은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일본 사람도 성경에 나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서도 삭개오의 이름을 듣고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누가복음이 어떤 책인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사복음서라고 불리는데 네 권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사셨는지,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고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서를 기록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기록되었고 그에 맞춰서 왕의 계보로 시작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므로 아무런 족보나 탄생의 기록이 없이 바로 종과 같이 열심히 일하고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은 읽어버려진 죄인들인 우리들을 찾아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여러분 말구유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의 2장 16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말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찬송가 "저 들을 밖에 한 밤 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이 찬송가에 나오는 목자들도 역시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또한 유일하게 예수님의 열 두 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는 복음서도 누가복음입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골짜기를 지나 양을 찾아 기쁘게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서도 역시 누가복음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탕자의 비유 역시 누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잃어버린 동전과도 같고, 길 잃은 어린양과 같고,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나갔다가 모두 허비하고 탕진하여 거지가 된 아들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삭개오의 이야기도 바로 10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가나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전에 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님을 향하여 아프리카 가나로 가서 복음을 전할 뜻을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가나 말고 동남아 필리핀은 안되겠습니까? 아프리카 가나는 의료시설이라든지 아이들 교육시설도 너무 안 좋고 모기 한번 잘못 물리면 말라리아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요. 필리핀도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한국에서 살다가 아프리카 가려니 쫌 그러네요. 주님 아프리카만은 피해주옵소서." 

몇날며칠 오랫동안 이렇게 주님과 씨름을 하며 버티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한국하고 비교가 안되는 하늘에서 살았어. 너 하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니? 내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잃어버린 너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비천하고 가난하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동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거 잊어버렸니? 내 사랑을 아직 모르겠니!?"
그리고 그 선교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잃어버려진 나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을 입으신 하나님!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제가 왜 아프리카에 못 가겠습니까? 한국에서 안락하게 살던 것이 어찌 하늘의 영광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든 보내주옵소서!"

오늘 우리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자
여러분, 이제 2006년 한 해가 지나가고 우리 앞에 새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새 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 내년에, 또 그 이후에 펼쳐질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는 새 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이곳 캐나다에서는 "Happy New Year"이라고 말하는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돈을 아끼고 많이 벌어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구두쇠라고 놀려도 내 지갑에 또는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을 보면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돈을 조금 못 벌더라도 또 많은 돈을 건강식품에 투자하더라도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든지 피부가 아기 피부 같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기 위해 지치고 힘든 삶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각기 다른 생활의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삭개오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행복"이란 친구는 그다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몰려옵니다. 이제 좀 편하겠지 싶으면 또 일들이 뻥뻥 터집니다. 우리들은 아주 잠시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꿈꾸지만 그 꿈은 어김없이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지만 또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인생 길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이별하고 헤어지고 외롭고 혼자 있고 쓸쓸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맞습니까? 
제가 일하는 석기시대라는 삼겹살 집이 있는데요, 99% 이상의 손님이 두 명 이상 짝을 지어옵니다. 가끔 혼자 와서 식사하고 가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을 보면 솔직히 좀 쓸쓸해 보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그다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혼자 보면 재미없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혼자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신랑신부가 탄생되고 우리 청년부는 멋있는 축가를 준비해서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신부가 축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우리 축가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정도구나." 생각을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축가를 부를 때 신랑신부는 몸을 돌려서 우리 청년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에 신부 아버지,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신부 어머니는 울고 계셨고, 그것을 본 신부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기쁘고 축복된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릴까요? 바로 이별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시집을 보내는 거니까. 

저는 밴쿠버에 온지 약 8개월 되었는데요, 한국에서 이곳으로 출발할 때, 제가 외아들인데 저희 어머니는 1년 간 아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에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우셨습니다. 
저는 외아들이어서 어릴 적에 성격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지금도 많이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 있다보니까 이기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유치원 정도의 나이였는데 한번은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노는데 장난감을 제가 하나도 못 가지고 놀게 했지요. "내꺼야." 그리고 그 친구는 조금 놀다가 재미가 없으니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지요. 왜 울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혼자 놀아야 한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느냐면요, 우리 모두가 이별의 상처를 가진 잃어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깊은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버림받은 마음, 잃어버려진 마음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찮은 일을 시킬 노예가 부족하거나 또는 힘든 일들을 처리해줄 일꾼이 필요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나눠주고자 자신과 똑같은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이드신 사모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응애하고 우는 이유는 바로 "버리운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리운 마음", 바로 "버림 받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하여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득의 증대로 만족하지 못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사람의 마음 속에 거대하게 뚫려있는 구멍, 그 구멍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제가 노래하나 불러보겠습니다. 

나는 인생에 산과 들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내가 얻은 건 공허와 깊은 실망 귀한 세월만 다 보냈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어 사랑의 품에 안으실 때
나는 주님께 매혹돼 이끌리어 인생의 참뜻 알게됐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마음,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마음,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완전히 만족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
자, 그러면 이제 삭개오 이야기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삭개오는 1절에 나온 것처럼 여리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리고라는 도시는 저 옛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첫 번째로 무너뜨리신 가나안 땅의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에 살던 사람들의 큰 죄악 때문에 여리고를 저주하셨습니다. 보통 전쟁을 하고 나면 많은 전리품을 얻는데, 이 여리고는 완전히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기고 금과 은과 옷을 전리품으로 숨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은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돌에 맞아죽는 큰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명령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놓을 때 장자가 죽을 것이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가 죽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였는데요, 이것은 아합 왕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히엘이 기초를 놓을 때 첫 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왕상 16:34). 

이후에 헤롯왕이 이 여리고에 많은 요새들을 짓고 도시를 발전시켰습니다.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분위기라기 보다는 로마식 건물과 로마의 분위기가 더욱 강했던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에 대해서 2절에서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였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라고 하면 그는 곧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의 앞잡이로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 바치고 또 동시에 자기도 부자가 되는 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일본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에 있었던 친일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시져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느냐 틀리냐로 상당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말하자면 민족의 배반자요 변절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단순히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의 대명사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당시 여리고에서 아주 악명 높은 세리장이었을 것입니다. 또 부자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뒤에 8절에서 삭개오가 스스로 고백하는 말을 참고해 볼 때 삭개오는 거짓 고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았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동족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삭개오에게 돈을 뜯긴 유대인이라면 삭개오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온갖 욕을 다 퍼붓지 않겠습니까? 너가 사람이냐부터 시작해서 십원짜리, 이십원짜리, 소, 말, 돼지 등 갖가지 욕이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삭개오에 대한 설명이 한가지 더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고 가려져서 예수님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에서는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가지는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삭개오라는 사람은 키가 작은 것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키 큰 사람들은 인기도 많고 사람들에게 대우도 잘 받는데,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접을 받습니다. 보통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봐도 키 큰 친구들은 잘 나가는데 작은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초대 왕을 세울 때 사울의 키가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컸기 때문에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처럼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며 대우하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대체로 버릇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기적인 것이 무엇인지, 버릇없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잘못되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본성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과나무는 너무나 커서 사과를 백 개 열고 어떤 사과나무는 작아서 한 두 개만 열릴지라도 근본 뿌리는 다 같은 사과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큰 죄인이라서 살인 강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조금 착한 죄인이라서 마음 속에서만 미워하고, 마음 속에서만 살인하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근본은 다 같은 죄인, 죄의 나무인 것입니다. 

이 삭개오는 다만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맺힌 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 역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만 열매가 조금 덜 맺힌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이 삭개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던 삭개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고, 또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이 삭개오는 결국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배신감과 상처로 아파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특정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군대를 현역으로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정보통신과라는 부서에 지정을 받아서 시청을 돌아다니며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을 했었는데요, 하루는 기업지원과에 가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장낸 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어떤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앉아서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공익이세요?"하고 질문을 하길래, "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겁니다. 단순히 반말이 아니고 저를 무시하면서 대하는 겁니다. 이건 뭐 나이로 따지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냐 공익근무요원이냐에 따라서 존대말과 반말이 나눠진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이란 존재는, 우리 모두는 아주 단순하고 때론 아주 유치합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고, 내가 무시를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높으신 정치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별 것 아닌 걸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이 사람? 이게 어따 대고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은?", "당신 몇 살이야?" 뭐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한심한 웃음을 짓지만 돌아서면 우리가 다 이렇게 유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말 한마디에 서운해서 더 이상 얼굴을 보기조차 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활짝 열려버리는 이렇게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강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직접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었던 탓에 삭개오는 세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자기 뒤에 로마 황제를 든든한 힘으로 삼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평소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신출내기 세리가 된 삭개오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며 로마 정부에 많은 세금을 걷어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고소를 해서 세금을 왕창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제 삭개오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슬슬 피해 다닙니다. 물론 뒤에서는 욕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삭개오 앞에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덧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크고 멋있는 집에서 하인들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리 마태
이 누가복음에는 세리의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두 가지를 삭개오와 연결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은 한번 같이 펴보시겠습니다. 27절부터 32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7 이 일들 후에 그분께서 나아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등장했던 한 세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레위였습니다. 이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입니다. 이 세리 마태가 바로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기 갈릴리에서 잘나가던 세리 마태가 갑자기 사표를 내더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회에서는 세리라는 사람들이 죄인들이요 민족들의 배반자라고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리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아주 긴밀하게 소식들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신 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와서 자기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유대사회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이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배를 채우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들인 세리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자기들과 한 편이 되어 바리새인이 될 줄 알았던 이 예수님이 갑자기 세리를 제자로 삼다니, 바리새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또한 세리들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유대민족의 왕따 집단인 세리들에게 이렇게 따듯하게 접근하시는가? 

세리 마태는, 아니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마 마태 역시 세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부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의 집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또 많은 세리들이 모였습니다. 또 잔치가 크게 개방되어 있었던지 몇몇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리 마태는 이 잔치를 열면서 그 동안 함께 친하게 지내온 동료 세리들에게 자신이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신이 왜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의 병이 든 우리들을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납니다. 이때 어떻게 해서든 콧물만 막아내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어떻게 해서든 기침을 참으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콧물이나 기침이 아니라 콧물과 기침을 만들어 내는 감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짓말을 조금 덜 하도록 잘 참고, 화를 내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꾹꾹 참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의 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의 병이 치료될 때 콧물도 안나오고 기침도 안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참 의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인들의 대명사라 불리는 세리들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세리의 기도
이제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의 바로 앞에 있는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9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직전에 먼저 등장하는 이 세리의 기도. 아마 삭개오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라새인과 같이 "나는 이렇게 의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했습니다"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가식으로 다가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정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부끄러운 모습, 어리석은 모습, 지치고 힘든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진실한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키가 작으면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 못하면 비웃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수를 하면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기도하며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아주십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하나님
삭개오는 이제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왔고 부자가 되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아직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또 아무리 많은 재산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텅 빈 마음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삭개오를 만나주시려고 기나긴 여정의 방문일정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 거의 6개월 정도전부터 서류와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위험한 일들은 무엇인지 조심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숙지하고, 책도 읽고 인터넷도 보고 여행자 보험도 들고 하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어느새 밴쿠버에 와서 잘 지내고 있지만 여기에 오기까지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삭개오를 방문하시기까지도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우주를 너머선 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이 땅에 방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외로움과 뜻 모를 그리움과 공허함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려고 직접 사람이 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몰려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신 주목적은 바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고생과 수고로 가득한 인생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던 삭개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삭개오는 이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가 기대하며 예수님을 보고자 하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려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뜻하지 않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가 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 삭개오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져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셨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왜 가다가 멈추셨는지 기웃기웃 쳐다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예수님은 오늘 반드시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너가 초대해 주면 내가 가고 아니라도 나는 갈 곳이 많은데 어쩔거야? 빨리 말해. 나 바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리고에 찾아온 목적은 바로 잃어버려진 너를 찾고 구원하기 위한거야."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은 우리들의 손님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은 9절에서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삭개오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거짓 고소하여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의 변화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언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언제 만족할 수 있으며 언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여기 누가복음 19장에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던 한 사람이, 부당하게 취한 돈을 네 배로 갚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삭개오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거는 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였고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시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시끄럽게 지낼지라도 사람의 허전한 마음은 완전히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또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고자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는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은 잃어버려진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특별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거절하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진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 1:15).

초청
다같이 눈을 감아주십시오. 
혹시 이 자리에 나는 아직 한번도 예수님을 나의 개인의 구원자로 영접한 적이 없다, 나는 오늘밤 눈을 감아서 다시 떠지지 않을 때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100퍼센트 확신이 없다는 분이 계시다면 잠시 손을 들어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눈을 떠보니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10년 뒤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기회가 주어질 때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체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할 심판과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의 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된 증거로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감사하게 믿고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믿겠다고 결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기도할 때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의 어떠한 노력이나 의로운 일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이 간단하고도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또한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이미 구원을 받은 형제 자매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지치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날마다 오고가는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항해 중 파도는 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를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날마다 동행하시는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주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이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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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6.11.0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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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만난 하나님(히 11:24-27) 


(히 11:24-27)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27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본다면 "예일전보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도 삶 가운데 경험하기 원합니다. 

구약의 대표, 모세
만약 우리에게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을 한 명 뽑으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대언자 중의 대언자 엘리야, 지혜의 왕 솔로몬 또는 모든 현자들의 으뜸인 다니엘. 이러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뽑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모세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구약과 율법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를 그 대표로 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모세라는 사람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작지 않습니다. 모세는 성경에서 그의 탄생부터 인생을 마치기까지 모두 기록된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란을 떠난 75세부터 기록이 되었고, 다윗의 인생은 소년 시절부터 기록이 되었지만, 이 모세의 인생은 그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어떠한 청년기를 보냈고, 어떠한 삶을 살고 인생을 마쳤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일생을 설교 한번에 다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일생들 가운데 몇 가지 포인트를 찍어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의 부제목은 "예일전보의 하나님"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캐나다에 와서 더욱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저의 앞길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한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도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나타나시거나 천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예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11장 24절 앞에 있는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대로, 이집트 파라오 왕의 압제 가운데서도 그 수가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 왕은 이들의 수가 많아지면 나중에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레위인 아므람과 요게벳을 모세의 부모로 예비하셨습니다(출 6:20).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특이한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임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갈대로 만든 궤를 준비하여 모세를 넣고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손안에 있었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옵니다. 그리고 부들 사이에 놓여있던 궤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시녀를 시켜 궤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궤 안에 있던 모세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얼른 달려와서 "아이의 유모를 구해와 아이에게 젖을 주도록 할까요?" 묻고 파라오의 딸은 삯을 주면서 자기를 위해 아이를 기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파라오의 딸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사람 모세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위해 부모를 예비하셨고, 누나를 예비하셨고, 파라오의 딸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모세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언제까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지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모세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절부터 다시 보시면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요, 인도자로 예비하신 것같이 모세도 믿음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한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그것을 따라갈 자유도 있고 그렇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나 운명론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사람의 뜻으로는 좋든지 싫든지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지라도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의 믿음의 결심이 합쳐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그가 스스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했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모세의 선택이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자,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야말로 하나님께서는 모세 자신을 예비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이 되도록 다른 모든 환경을 예비해주셨지만 정작 모세 자체는 아직 예비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서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 23 그가 정확히 사십 세 되었을 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더니 24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당한 일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치니라. 25 그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건지려 하심을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정확히 사십 세가 되었던 모세의 이 상태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고 아주 자신 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려 하셨다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에게 이집트 왕자로서 어떻게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이끌며, 백성을 다스리고, 행정을 처리하며, 재판을 하는지 등을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이제 모든 것이 예비된 이 상태에서, 모세는 자신이 드디어 영웅과 같이 나타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고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자손을 때리고 부당하게 대한 이집트 사람을 가서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도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스스로 좋게 보이는 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자손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다시 멋지게 등장하여 싸움을 중재하고 다스리려던 모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스라엘 자손들조차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파라오도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모세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하나님 일에 덤벼든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 이제 두 번째로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느덧 80세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이곳 미디안 땅에서 십보라라는 아내를 맞이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대상 23:15)을 낳았습니다. 모세의 현재 직업은 목자입니다. 하는 일은 아침에 양을 몰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오후에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이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시냇물이 없습니다. 무조건 우물에서 힘들게 수십 번을 물을 떠올려야만 양떼가 다 마십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픈 데는 없는지 이곳저곳 살펴주고, 양털 깎고, 양털로 천막 짓고, 우유 짜고, 버터 만들고 아주 고생하는 일만 매일 반복됩니다. 
한때 잘나가던 이집트 왕자가 어느새 시골 양치기 할아버지가 되어있습니다. 재기를 노리고 있던 모세, 언젠가 다시 이집트에 돌아가서 위대한 역사를 이뤄보리라고 생각했던 모세,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난 예비된 사람이거든."하며 결심을 다졌던 모세도 어느덧 80세가 되고 보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있는 시편 90에서는 모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10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실패와 좌절과 수고와 슬픔만이 가득한 모세의 일상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모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망이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미래도 없을 것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이제 난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건가보다. 내 인생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이집트 왕자로 사는게 좋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시도했다는게 의미가 있을거야. 내가 너무 건방지고 교만해서 일을 그르쳤지만, 에휴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러분이 한번 모세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모세가 매일 보는 것이라곤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과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양떼들입니다. 특히 이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은 가시덤불과도 같아서 나무를 베어 탁자를 만들거나 막대기도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태울 때 쓸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아주 볼품 없고 광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무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런 떨기나무들이 건조한 열풍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불이 붙는 광경도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모세는 아마 그러한 떨기나무를 볼 때마다 "꼭 나 같네."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재도 안되고 뗄 감도 안되는 쓸모 없는 떨기나무. 

어느 날,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 모세는 역시나 양 떼를 몰고 사막을 돌아 호렙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광경대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한가지는 그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타지 않는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한 음성이 나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숨겼습니다. 지금 모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나타나셨는가? 그것도 왜 이제야, 나이가 80이 다 되고 나서야 나타나셨나? 

"7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을 직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8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처소로 이끌려고 내려왔노라. 9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렀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며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10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갑자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뭔가 큰 사건이 벌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일상 가운데 자주 보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떨기나무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식당의 손님들일 수도 있고 동훈이 동우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또는 사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하고 대단하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만나고 접하는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현재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비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제 세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80세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이 빠진 이 모세를 이집트의 사역지로 파송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일까요? 왜 모세가 아직 40세였을 때, 본인도 열정적으로 일해보려고 하는 그 때에는 침묵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일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내 바라던 소망 다 허사가 될 때 내 아버지 도움은 시작일세."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가 되고 더 이상 아들을 가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섬김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냥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인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지체들, 나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능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 가운데 어떤 일들은 정말 내가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어떤 일들은 솔직히 주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배운 이 지혜, 그리고 능력 있는 이 나 혼자만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어."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한 교만,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 교만을 완전히 꺾는데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교만하지만,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교만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 자체가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일을 하고 나서도 내 마음 속에서부터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할 때 그 앞에서는 "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속에서부터는 "암, 자네가 뭘 좀 아는군. 사람 볼 줄 아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를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주님은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자랑할만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사람인지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은연 중에라도 자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정말 마음 속에서부터 겸손할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 40년 간 광야학교에서 배운 모세는 참된 겸손, 참된 온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이까?" 대답합니다. 또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위에 능하던 모세는 간데 없고,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만큼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 12:3).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무엇인가 나쁘게 말할 때 조차 "아멘"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 비방할 때 "아, 그때는 내가 이집트에서 쫓겨나서 도망간 때였다. 그리고 이혼을 하는 것은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적하려고 책 잡는거 아니냐?"하면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만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저는 그 당시에 율법을 몰라 이방여인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자격 없는 자를 긍휼로 대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이러한 자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러한 겸손은 사실은 내가 뛰어난데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참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겸손은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빛과 계시가 임하여, 내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빛을 구하여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전능자로서 이 땅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보상하시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두 보상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지옥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원래 이르렀어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경주를 달릴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영광"일 것입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들만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사역만을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앞으로 임할 영원한 왕국에서 받을 놀라운 영광을 또한 예비해 주셨습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영광으로 여기며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던 모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 힘이 없고 주님을 향해 크게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무시 받고 조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영광으로 보상하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죄의 쾌락들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리
마지막으로 다 함께 고린도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6절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4절에 보면 이 빛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빛을 더 많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7절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모두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쉽게 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서 뛰어난 권능이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게 하시도록 질그릇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이제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 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탄생과 성장과 일생을 예비하셨고 또한 영원한 영광까지 예비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떨기나무와 같이 볼품 없고 평범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영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능히 섬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모든 능력을 공급하시며 다만 겸손하게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따라오도록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 겸손하며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수고와 고생이 너무나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낄 정도의 무겁고 뛰어난 영광으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한 영광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이러한 영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전능한 손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영광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 더욱 넘치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모세와 같이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이집트의 보화들을 거절하고, 잠시 누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대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상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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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6.09.20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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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만난 하나님(행 13:21-22)


(행 13:21-22)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켜 세우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성취하리라, 하시고』
(삼상 16:5-13) 『5 그가 이르되, 평화롭게 오느니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은즉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나와 함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자, 하고 그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청하니라. 6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 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이에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그 때에 삼마를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다시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니라.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서서,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하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이 그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13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일어나서 라마로 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곳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13장 21-22절을 보시겠습니다. (읽는다.) 이제 사무엘상 16장 5절부터 13까지 보시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길고 자세하게 그가 지나간 길과 행적이 기록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이 짧은 설교시간을 통하여 다윗의 생애를 모두 알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생애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주목하여 살펴봄으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었는가를 주의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다음 아들이었던 셋으로부터 인류는 새롭게 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5대손인 에녹이 살았을 때부터 이미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기 시작했고, 아담의 8대손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호흡하는 생물을 홍수로 심판하셔야 할 만큼 타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롭게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셨지만, 모든 인류가 한 곳에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흩으시고 많은 민족들의 구분과 경계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한 민족을 만들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하여 결국 70명이라는 자손이 이집트로 들어갔고, 400년 만에 그들은 모세와 함께 약 200만이라는 엄청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이동하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재판관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가나안 민족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벌하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 때로부터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450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을 주셨습니다(행 13:20). 

이제 재판관들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대언자 사무엘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게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왕국을 거부하고 다른 민족들과 같은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크고 잘생기고 능력이 많은 용사를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모든 백성은 한번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를 외칠 만큼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의 평가와 눈을 더 주의하는 왕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 외에는 결코 드려서는 안되는 제사를 전쟁이 두려워 떠나가는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스스로 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민족의 왕과 모든 기름진 양과 소를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떠나갈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보다는 그래도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양이라도 내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자신의 경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다윗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6장의 말씀이 등장하게 됩니다. 16장 1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기름을 네 뿔에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주님은 아직 누구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다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들어가니 모든 백성을 인도하던 대언자 사무엘의 방문에 모두들 놀라고 떨며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마을의 장로들이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평화롭게 오시나이까?" 사무엘은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준비를 하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한번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온 민족을 재판하고 이끌던 장로 중의 장로, 대언자 사무엘이 마을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치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한 것같이 베들레헴에서는 엄청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의 장로들이 다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은 특별히 "이새의 가족"을 지명하여 초청하였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 가운데 한 명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도 이 기름 부음을 받을 자가 사울을 대신한 왕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큰 파장이 올 것이기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기름을 붓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백성들도 묻는 것을 두려워해서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첫째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으로 옵니다. 이 엘리압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용사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보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감탄하면서 기름 부을 준비를 합니다. 주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러한 놀라운 말씀,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와 같은 말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섬겨온 사무엘조차 사람인지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게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비나답, 삼마 이렇게 일곱 아들들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어떤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확인차 묻습니다. "네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새가 대답한 뉘앙스를 잘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막내 녀석이 있는데, 그 놈은 양치고 있지요. 막내 녀석은 아직 이런 자리에 참석할 놈이 아니죠. 형들 다 왔으니 양이나 보고 있으라 시켰죠."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사무엘이 왔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줘야지, 그것도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대한 잔치요 거룩한 자리인데, "너는 가서 양이나 쳐라."하고 부르지도 않았으니 다윗이 가족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안 봐도 뻔할 뻔 자입니다. 막내로서 형들의 수중을 들고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고 모든 아들들을 초청한 가족 행사 때에조차 따로 남겨져 양을 돌봐야하는... 아들이면서도 아들 같지 않은 대우를 받았던 다윗을 그려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의 가족들을 특별히 초청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많은 베들레헴 주민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작은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축제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시끌벅적대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 들판에는 혼자 남겨져 양을 보고 있는 다윗이 있습니다. 

들판에서의 다윗
어찌보면 외롭고 쓸쓸하고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고 소외당하고 왕따를 당한 것 같은 한 소년이 양을 지키며 앉아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 나타난 말씀들을 통해 다윗이 어떤 모습으로 양들을 돌봤는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잠시 들판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내 일어나서는 하프를 타고 주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찬송시를 직접 지어서 노래를 붙여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금 양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 마리 한 마리 어디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때 어디선가 곰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양들이 흩어지고 다른 양치기 품꾼들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곰은 어린양 한 마리를 움켜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와 돌팔매 기구를 가지고 추격합니다. 작은 양치기 소년과 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거대한 몸집의 곰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저 곰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고 내가 오직 아버지의 양들을 충성되게 지켜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소서." 

어린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작은 양치기의 입에는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노래하는 찬양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라. 가족들 가운데서도 막내에 불과하고 양치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가 이렇게 양을 지키는 목자이듯이 주님은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목자시로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외쳤을 것입니다. 
다윗은 날마다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며 모든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겨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섭섭하고 허전하고 울적할 때마다 다시 주님께 나아가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주님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 속에 깊이 잠겨서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다윗을 누군가 부르고 있습니다. 
"이봐, 다윗! 야! 내 말 안들려? 너 출세하겠더라? 지금 빨리 사무엘 대언자께서 너를 불러오라고 하셨어. 너가 오지 않으면 앉지도 않겠다고 서서 기다리신단 말야. 빨리 와봐."
이렇게 해서 다윗은 영문도 모른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 위에 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한편 사울 위에 있던 주의 영은 떠나가고 오히려 악한 영이 와서 사울을 괴롭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신하들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하여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이 괴로울 때에 하프를 타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괴로울 때마다 하프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사울은 상쾌하게 되고 낫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크게 사랑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병기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벌어지자 사울은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다윗의 큰 형들 중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는 용사로서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윗은 다시 여전히 아버지의 양을 먹이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간 큰 아들들을 걱정하여서 다윗에게 음식을 주며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잘 있는 증거물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보냅니다. 왕 앞에서 하프를 타고 병기를 드는 역할까지 했던 다윗이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목동이요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한편 전쟁터에서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키가 약 3미터나 되는 거인 투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입은 쇠 그물 옷은 놋 오천 세겔이라 하는데 이것은 대략 196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던 창은 베틀 채 같았고 그 창의 촉 무게만 해도 쇠 육백 세겔로 대략 20킬로그램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놋 투구와 어깨 사이의 놋 방패, 정강이가리개 등의 모든 무장을 합치면 이 골리앗은 수백 킬로그램의 무겁고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쟁에 능한 앨리트 신동 전사로서 블레셋의 영웅 중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골리앗이 40일 동안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리치기를 모두가 전쟁할 필요 없이 한 사람만 나와서 자기와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전에 우리 서 목사님과 제가 좋아하던 삼국지 게임을 보면, 일기토라는 전쟁 옵션이 있는데 전쟁 중에 대장인 장수 두 명이 나와서 대표로 싸웁니다. 뒤에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 있더라도 대표 장수가 패하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골리앗은 지금 일기토를 해서 전쟁을 끝내자고 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컸던 사울 조차 골리앗 앞에 서서는 작고 약해 보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골리앗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하였습니다. 

"22 다윗이 자기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자기 형들에게 문안하고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보라,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에서 가드 출신 블레셋 사람 곧 이름이 골리앗이라 하는 투사가 올라와 똑같은 말들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삼상 17:22,23). 
이 말을 들은 다윗이 흥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느냐?"
이 말을 들은 엘리압이 다윗을 향해 분노를 발하며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막내 주제에 자기를 대신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못마땅한데 지금 모두가 두려워 떠는 상태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다윗을 보고 흥분한 엘리압은 다윗을 향하여 무례하고 교만하다고 호통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향해 열심을 내다보면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들 안에서 말입니다. 너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교만할 필요 없다, 너만 왜 유별나게 그러냐, 그러나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리를 격려하는 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의 내용처럼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이 때 갑자기 믿음이 생겨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 아니라 평소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구해내신 하나님을 평소 그대로 신뢰하며 동행하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45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도전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이 날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게서 네 머리를 취하고 또 이 날 블레셋 사람들 군대의 사체를 공중의 날짐승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주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온 땅이 알게 하겠고 47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든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시리라"(삼상 17:45-47).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만 사용하신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섬길 수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맞는 것을 보시고 이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없었으면 저기 저 시골에 가족들 중에서도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목동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놀라운 역사와 간증을 일으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좀 모자라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이 아직 주님과 온전히 합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흥분해야 할 때 차분하려고 노력하고, 주님을 위해 잠잠하고 인내해야 할 때 앞서 나가 흥분하여 화를 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여 주님께 가까이 나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너무도 멀기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능력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둔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해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바로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죄를 지은 다윗
이제 이야기를 많이 뛰어넘어서 다윗이 왕이 된 뒤에 일어난 사건 한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못지 않게 너무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바로 다윗이 간음과 계획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군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서도 동침하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죄가 폭로될 것을 가리기 위하여 헷 족속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의 선봉으로 세워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된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음과 계획 살인은 율법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이러한 죄를 위한 번제 헌물은 아예 항목이 없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위하여서는 도피성읍이라도 예비되어 있었지만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으로 죄 값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하는 자와 살인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주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사울 왕은 간음이나 살인이 아니라 다만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제사를 본인이 직접 수행한 것과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족속 중 좋은 것들을 남겨놓은 죄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 더욱더 중한 죄를 지은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계속해서 왕의 자리에 앉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의 보좌가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까지 얻게 되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죄로 인하여 다윗의 집에서 간음과 살인과 반역이라는 일들로 다윗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대언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가난하여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 없던 그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흥분하며 일어나서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하며 반드시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단이 대답합니다.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
자신의 죄가 발각되었을 때 사울왕은 백성의 눈을 의식하여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였지만, 다윗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에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크신 친절한 긍휼에 따라 내 범죄들을 지워 주소서. 6 보소서, 주께서는 속 부분에 있는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나로 하여금 은밀한 부분에 있는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14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그리하시면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 16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러저러한 행위들이나 기름진 번제물들을 가지고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되게 돌이키고 깊은 속에서부터 통회하며 다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전하게 회복하였습니다. 

호세아 대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느니라"(호 6:6). 주님은 죄를 지으면 희생물을 가져오고, 기계적으로 자백하고, 번제 헌물을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죄에게 정복당하여 종노릇하며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속마음이 하나님과 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
이번 주 중고등부 학생들과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만날 때에만 참되게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혼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것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가 있어도 혼자 극장에 찾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좋은 관광지가 있어도 혼자서 찾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어울리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지내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외로움과 허전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실된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청년들은 친구들과 즐기는 쾌락으로, 장년들은 돈과 명예와 자식들의 성공으로, 노인들은 손주들의 애교와 사람들의 존경으로... 허기지고 오그라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노력하지만 블랙홀 같이 끊임없이 빨아드리는 요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도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웠던 무식하고 불품 없던 한 양치기 소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마음과 마음의 진솔한 교제,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오늘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벌하고 저것을 하면 상주는 계산이 빠른 컴퓨터 시스템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오늘 나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9.06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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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 (요 21:15-17)

(요 21:15-17) 『15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요한복음 21장
이번 주일에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진화론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화론 공부를 마치면서 잠시 성경에 대하여 기초적으로 알아야할 상식을 공부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무엇이냐? 바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그렇다면 신약의 처음 네 권은 무엇이냐?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성경의 순서와 찾는 법을 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사복음서 모든 곳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탕자의 비유와 같이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영광스럽게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씀과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여주시고 또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며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과 함께 끝나는 듯 하더니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복음서의 맥락대로라면 이쯤에서 "아멘." 한마디만 더 나오고 끝맺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21장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시작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만약 요한복음마저 이렇게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비통하게 울었던 베드로, 이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는 잠시 사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 베드로가 만난 주님을 우리도 만나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만남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은 요한복음 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루를 함께 머무르며 좋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1,4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가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인즉 게바라 부르리라, 하시니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라."
저의 법적인 이름, legal name은 현균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부르는 이름은 승선입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불리던 이름도 승선입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로빈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베드로 역시 이러한 식으로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어릴 적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새로 붙여주신 게바란 이름은 아람어, 수리아어로 돌이란 의미이고, 이것을 그리스말, 헬라말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자마자 "너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이제는 너를 게바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이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튜헨리는 성질이 급하고 난폭했던 베드로에게 돌 같고 반석같이 굳건하고 차분한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라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붙여주신 것이 아닌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 사도행전 4장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무식하고 못 배웠다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게 되고" 아하, 머리가 돌 같은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비상한 사람이 되는구나. 
또 다른 한 심리학을 전공한 성경교사는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구분을 따라 베드로를 볼 때 베드로는 때로는 행동파이면서도 잘 바뀌지 않는 고집 세고 굳건한 사람이므로 그 특징을 살려 돌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실 때도 세 번, 부인할 때도 세 번, 다시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도 세 번, 사도행전에서 환상을 보여줄 때도 세 번, 이렇게 세 번씩은 해줘야 변하는 돌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볼 때 베드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출신이었고, 뱃사람이었던 만큼 때론 아주 거칠고 아주 적극적인 행동파이면서도 때론 쉽게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침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가서 하루 밤을 지내며 대화를 나눌 만큼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아니면 확신이 가지 않았는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다시 고기잡는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의 두 번째 만남은 마가복음 1장(16절부터)과 마태복음 4장(18절부터)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자기들의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기를 했지만 아직 계속해서 어부로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을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안드레는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지만, 베드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시니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 역시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와 품꾼들을 배 안에 남겨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 말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왕과 같이 권위 있는 분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부정한 영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소리칠 때에 그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회당에서 나오셔서는 안드레와 시몬의 집을 방문하셔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초청하셔서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또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까지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어떠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까요? 처음에 자기 형제 안드레가 오더니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해서 한번 가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상상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워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생 바다 위에서 태양과 파도와 싸워온 자기 못지 않게 햇빛에 그을린 예수님을 볼 때 베드로는 실망을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한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너를 돌이라 부르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안드레에게 "메시아 맞아?"하고 반문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장모와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을 가지고 다만 열심히 고기잡이를 할 뿐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사람을 그물로 낚을 수도 없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일단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고, 부정한 영이 예수님을 가르켜 하나님의 거룩한 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며 놀라고, 예수님의 한 말씀에 부정한 영이 나가는 것을 보며 놀란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의 집에 방문하셔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또 이분은 도대체 왜 무식한 어부에 불과하고 죄 많은 나에게 이렇게 찾아오시는가?" 

세 번째 만남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지만 여전히 어부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 번째 만남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려는 백성들을 갈릴리 바닷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바다로 조금 나아가도록 청하셔서 바닷가에 서있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상 한 마리라도 잡혀야 직성이 풀릴텐데 끝내 못 잡았으니 상당히 피곤하고 기분이 나쁜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배 안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고 건성건성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신다기 보다 왠지 모르게 베드로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일부로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셨고 시몬 베드로를 배에 태운 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자"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이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아마도 안드레가 같이 배 안에 있었고 저기 멀리에는 친구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한번 던져서 끌어당기는데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이봐! 야고보! 요한! 좀 도와줘!" 야고보와 요한이 능숙하고 신속하게 배를 몰고 와서 함께 물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와 함께 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올려 양쪽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우니 얼마나 무거웠던지 배가 가라앉으려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갑자기 무릎을 꿇습니다.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까 떠나세요! 나는 주님을 대면하여 대화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사람 잘못보신거 아닙니까? 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어부일 뿐 아니라 뱃사람이라 거칠고 죄 많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뭐라고 응답하셨을까요? "알아, 너 죄인인거 다 알아. 그래서 내가 너를 찾아온거야. 용서해주고 고쳐주려고. 이제부터 너는 나와 함께 사람을 낚아 구원하는 어부가 되는거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오해하기 때문에 주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르는 두 가지를 알려주기 원하시는데, 한가지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거칠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악하고 어리석고 둔한 사람인지 모를 때에만 교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과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기 원하시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감사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의 빛 가운데 더 가까이 나아가서 자신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본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크게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죄 많은 자인지를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므로 주님께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베드로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도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불러주신 의아하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
우리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듯이 돌이란 이름을 가진 베드로는 뭐든지 아주 분명하게 알고서야 넘어가는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꼭 나중에 따로 찾아와서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는 제자가 베드로였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건너 제자들에게 올 때에 정말 주님이시라면 자신을 바다 위를 건너오도록 불러달라고 요청한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다음날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언급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실 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장막을 셋을 짓겠다고 말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하셨을 때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다, 침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이다, 예레미야다" 말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확신에 차서 고백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서 집중하여 듣고 집에 가서는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는 훌륭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시고 왕이 되실 때에 자기도 열두 보좌 중 한자리를 맡아서 통치할 영광을 그리며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사모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꾸짖기까지 하면서 소리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통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람의 아들이 배반을 당해 넘겨지실 것과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일으켜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큰 소리로 예수님을 만류할 수 없게 된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하시려는 일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배반당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나만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도 실족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이 죽으셔야 한다면 나도 같이 죽으리라." 아주 비장하게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들은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 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안다는 것을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실패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모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셨고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집회장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사람들이 앉은 곳에 함께 앉았습니다. 어떤 하녀가 베드로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헛기침을 하며 "새벽날씨가 쌀쌀하지요?" 한마디 건넵니다. 하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에이 이 여자가, 나는 그 사람 누군지도 몰라." 말하며 자리를 일어납니다. 자리를 떠나 현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또 다른 사람이 "너도 그들과 한패지."라고 묻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난 아니야." 이제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지 궁금하고 걱정되던 베드로, 또 두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충격을 받은 베드로,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아주 자신 있게 단언하면서 말합니다. "너 갈릴리 사람이고 또 말투도 들어보니까 딱 예수님과 한패 맞잖아!" "아 진짜 내가 맹세한다 맹세해! 내 말이 틀리면 내가 저주받는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 "꼬끼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즉시 수탉이 울더라.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
이때 주님은 어떠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까요? "너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해?"하면서 째려보셨을까요? "거봐 내 말이 맞았지? 역시 넌 안돼."하면서 비웃는 눈빛으로 보셨을까요? "그래도 널 가장 믿었는데, 실망이야 베드로"하는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베드로와 마주친 주님의 눈빛은 여느 때와 똑같이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온유한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돌이킨 뒤에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죄 많고 자격이 없던 나를 불러주셨던 주님인데, 내가 이렇게 저주하며 맹세하며 예수님을 배반하다니! 나는 정말 더럽고 가증한 사람이로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죄인이로구나. 이 세상 그 누가 나만큼 죄인일 수 있을까! 이제 주님을 다시 볼 수 없을거야. 난 더 이상 제자가 될 자격이 없어." 주님이 알고 계셨던 베드로의 모습을 베드로는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이제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려고 준비했던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베드로를 위하여 특별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라고 하시며 베드로를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이 소식을 들은 요한과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와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평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의 믿음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특별히 무대를 설정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만나기는 했으나 예수님이 안 계신 지금 딱히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던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너도나도 덩달아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너무 오랜만에 그물을 던진 것인지 밤새도록 잡아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었고 바닷가에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이보시오, 물고기 좀 잡았소이까?" "못 잡았는데요?!" "배 오른편에 던져보시오!"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 외치자 그물을 끌어올리던 베드로는 어부의 덧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리기를 포기하고 배와 그물을 함께 바닷가로 끌고 옵니다. 밤새 고기를 못 잡았다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은 상황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하며 엎드릴 때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세 번째 만났을 때 벌어진 일인데, 지금 이 일 역시 부활하신 주님과 세 번째로 만나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똑같은 무대를 설정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같이 추운 새벽바다에 흠뻑 젖은 베드로는 물고기와 빵이 놓여있는 숯불과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숯불을 바라보는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날 밤에 앉아서 불을 쬐던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느라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빵과 생선을 구워 배불리 먹여주십니다. 

이제 주님이 말문을 여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부르셨던 그 이름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만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다가도 누군가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넘어질지 어떻게 실패할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참되게 만나게 된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이 죄냐 아니냐, 큰 죄냐, 어디까지 지켜야하는 의무이냐를 따지고 계산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베드로를 먼저 찾아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매순간 방문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로 채워질 수 없듯이 오늘의 우리의 삶도 주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사랑하신 주님,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변함 없이 찾아와 주시는 주님을 더 많이 만나기 원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8.02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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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만난 하나님(행 17:22-28)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바울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에 오게 된 사도바울은 이 도시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 너무나 애통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이르러서 사도바울은 마르스 언덕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경배하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말씀이 구원받지 않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을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하나님, 또는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 먼저 만나고 알게 된 하나님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 된 하나님, 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을 우리도 알게 되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저번에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겉에서 바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고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이 자라난 배경
먼저 우리는 바울이 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오해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직접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 3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얻어맞고 있을 때 로마군의 한 총대장이 와서 바울을 구출하며 나눈 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출생지에 대하여 "미천한 도시가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다소라는 도시는 뛰어난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지적 문화의 일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소 출신의 많은 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로마에 가서 많은 지식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에서 나오는 아마, 염소털, 모직물 등의 특산물로 인해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들거나 천막을 제조하는 수공업이 잘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미천한 도시가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말할 때는 별 볼일 없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주 발달된 도시인 다소 시"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2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말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말을 잘한 정도가 아니라 다소 출신이면서도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율법박사 밑에서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장 넘겨서 24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총대장은 로마 시민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성장한 가정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쉽게 말해 자수성가하신 분들입니다. 바울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시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철의 로마제국이 유대민족을 압제하며 억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를 얻고자 수많은 피를 뿌렸습니다. 몇몇 동족들은 세리가 되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삶을 안락하게 꾸려나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왔던 바울의 부모님은 결코 그러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대 땅 어느 곳에 살고 있던 바울의 부모님은 로마의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다소 시로 이사를 갑니다. 떠듬거리는 그리스말로 정보를 알아보며 새로운 땅에 정착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치열한 사투와도 같았습니다. 때로는 유대인 동족들로부터 민족을 배반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밤낮 쉼 없이 천막을 깁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악당 같은 세리들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 바울의 부모님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사게되었고, 이제 로마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가정을 세워나갔을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태어납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베냐민 지파로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그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따라 자신의 아들을 "사울"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이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부모님이 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 사울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태어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주었고, 당시 다소 시에서 배울 수 있었던 철학과 헬라의 모든 발전된 문화와 지식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조기유학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이라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모를리 없는 랍비 중의 랍비 밑에서 높은 학비를 지불하며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바울에게 지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천막 깁는 기술까지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을 가지고 대략 이렇게 그림을 그려볼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 성장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수성가하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고 요구 당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랍비 중의 랍비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서도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으며 그것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해내면 모두가 나를 칭찬해 줄거야. 여기까지 해내면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거야."
그러나 이렇게 요구받고 성취해내고 또 다시 요구를 받는 사도바울의 삶에서는 어떠한 쉼도 안식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었던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유명하고 촉망받는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람들의 기대라고 이름지어진 더욱더 높고 무거운 요구에 억눌려 그것을 이겨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년 사울이 지금까지 알아온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위대하셔서 그 기준을 맞춰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에 의로 말하자면 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따라가도 만족시켜 드리기 힘든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무한히 요구하시는 하나님, 끝없는 기준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의 회심
사울은 어느새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 있습니다.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치열하게 따라갔던 사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죽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당신을 섬기고 내 모든 것을 드리는데 나는 왜 만족이 없을까요? 왜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요?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누구보다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던 사울의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큰 공허와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거짓 증인들 때문에 잡혀와서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사울은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러한 자들은 다 죽이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였고 공회에 앉아있던 모든 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다가 분을 참지 못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가 내 던지며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던 스데반은 죽는 그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모든 증인들은 하나같이 촉망받는 공회의 젊은이 사울 앞에 옷을 모아둡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얼굴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죽으면서 외친 말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맞다면 그는 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으로 벌할 것을 기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그렇게 죽는 순간에서조차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었는가?"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겉으로는 아무 열매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이 사울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의 요구와 율법의 기준과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로 인하여 너무나 억눌리고 메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강하게 일어서고자 다마스커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다 잡아올 수 있도록 편지를 요청합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돼. 사울! 여태까지 잘 해왔잖아! 그러한 평안 따위는 다 잊어버려. 나는 사람을 섬기는게 아니라 끝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려면 더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수밖에 없는거야. 스데반 그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사니까 평안해 보인 것 뿐이야. 흔들릴 필요 없어."

그리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가운데 태양 빛보다 더욱 밝은 한 줄기 빛이 사울 위에 둘러 비춥니다. 사울은 즉시 눈이 멀어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그가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울은 만약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자기는 즉결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예수님은 사울에게 "너 이놈,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끝이 없구나.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내게 반역하려느냐?"하면서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울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너는 지금 가시 채를 걷어차고 있구나. 걷어차는 네 발이 더 아프지 않느냐? 사울아 너가 그렇게 길을 가면 갈수록 너의 마음에 더 큰 갈급함이 있고 메마름이 있구나."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바울이 만난 하나님
이렇게 해서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17장 24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27절,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알아낸 하나님이 아닙니다. 직접 바울에게 방문하시고 만나주시고 교제하여 주셔서 알게 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참되게 만난 하나님은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알아오던 하나님, 알지 못하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엄격하고 늘 요구하며 높은 기준에 이를 때까지 다그치고 책망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풍족하신 하나님,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멀리 계셔서 감히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두려운 분이었으나, 바울이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두 눈을 다 감고 더듬어서라도 찾기 원하면 만나주시고 발견되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그러나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딤전 2:15,16).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딤후 1:12).

우리는 오늘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떠한 모습과 상관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날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과 같이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맡기지 않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이 만나고 알게된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채워주시는 풍성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을 더 만나고 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손해를 당하셔서 분노하시고, 또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분을 섬기면 도움을 받아 기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한 행동이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욥기 35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 하늘들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더 높은 구름들을 바라보라. 6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 혹은 그대의 범죄가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느냐? 7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느냐? 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느냐? 8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 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며 무엇을 요구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더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하며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친밀하고도 깊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입니까?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도 전파하고 교회에서 성도들도 섬겨야하고 여러 가지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고는 요구받고 기준을 제시받아서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7.05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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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누릴 수 없는 선물들(고전 12:1,12-27)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그리고 1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모르면 누릴 수 없는 선물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우리교회는 현재 "교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올 준비를 하면서 여러 홈페이지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나가서 외국 친구들을 사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유학생이 중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등등 여러 나라의 룸메이트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다같이 모여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로 자기 나라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친구들이 갑자기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유학생에게 "한국에 대해서도 자랑해 보라"고 물었습니다. 이 유학생은 88올림픽, 2002월드컵 외에는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며 부끄러워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가 자기 나라, 자기 민족, 또는 자기 학교, 자기 집안과 같이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단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그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를 모르고, 우리가 어떤 교회의 모습을 이루려하는지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크고 중요한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이 "교회"라는 주제 또한 너무나 크고 방대해서 한 두 번의 설교로는 다 설명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대표해서 "교회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 교회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하나님, 교회는 언제부터 계획하신 건가요?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또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좀 그러니까 그냥 모아 놓으신거죠?"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를 보여주시며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획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의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이 세상에 비춰주는 교회의 모습을 저 우주의 태양 빛을 반사하여 지구 위에 비추는 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교회에 대한 놀라운 말씀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림을, 저 오래 전에 아담이 이브를 얻기 위해 죽음의 잠을 통과했던 것으로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지어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은 이브의 죄를 씻거나, 이브를 구원하기 위해서 잠든 것이 아니라 오직 이브를 얻기 위해서 죽음의 잠을 통과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면으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지시려고 죽으셨지만, 그 뿐만 아니라 아담이 이브를 얻기 위해 죽음의 잠을 통과한 것처럼,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은 빨리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당신을 구원하신 주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 너무 재밌는게 많아서 빨리 가기는 아쉽지요?"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을 보여주며 "내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자살을 하여서라도 주님께 가는 것이 훨씬 좋지만, 나는 지금 교회를 위해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원래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을 부르셨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야 되니까 교회를 세워서 사람들을 모은 것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여주며 "아닙니다. 나는 나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 생활을 유지하며, 그렇게 번 돈을 교회를 위해 다 소비할지라도 나는 교회를 세워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아주 많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목자를 따르는 양떼와 같고,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군대와 같으며, 신랑을 기다리는 순결한 신부 같고,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과 같고, 진리를 지탱하고 떠받치는 기둥과 같고, 약하고 병든 자들이 치유 받는 병원과 같으며,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일깨움을 받고 배우는 학교와 같고, 부모 없는 고아같이 방황하며 헤매는 자들을 돌보는 아버지 집과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터뷰에 대답하신 것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만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또 사도 바울이 인터뷰에 대답한 것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만큼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목적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음식과 바꾸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 있는 교회를 알지 못한다면 당장 눈앞에 직면한 나의 정당성과 나의 만족을 얻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다 희생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셨지만 각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알고 믿음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영적 선물들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 영적 선물들에 과하여 듣고 알고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적 선물들"이란 바로 "은사들"을 말합니다. 4절부터 11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이 말씀에서는 아주 여러 가지의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선물들, 기적들, 대언함, 영들 분별함,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 타언들 통역함 등등 많은 종류의 선물들, 은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러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 "영적 선물들에 관해 모르면 안된다고 했어"하면서 이 은사들의 항목에 대해서 집중하여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선물들... 이렇게 세어보니 항목들이 모두 9개구나. 로마서 12장에는 또 다른 항목들이 나왔는데 겹치는게 뭐뭐 있고 다른 것이 뭐뭐 있나 한번 찾아보자. 일단 여기에 나온 지혜의 말씀을 풀이해 보자면 영적으로 말씀을 잘 적용하여 지혜와 훈계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은사가 아닐까, 지식의 말씀이란 진리의 지식을 교리적으로 말씀을 잘 나누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믿음이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본적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그런 은사가 아닐까, 병 고치는 은사들은 초기 사도들 시대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진 은사이고... 등등등" 하면서 이 은사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암기하고 나면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공부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선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영적 은사들"에 관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4절부터 7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읽는다) 그리고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읽는다)
먼저 우리가 영적 선물들에 관해서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영적 선물들의 종류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다양한 선물을 주신 성령님, 주님,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7절에 나온 것처럼 이렇게 각 사람에게 다양한 선물들을 주신 이유는 바로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11절을 보면 성령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선물들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이렇게 다양한 선물들을 가진 우리 한 명 한 명의 각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각 개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2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 우리가 각각 떨어졌을 때는 한 지체이지만 다같이 모였을 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서신을 직접 받아서 읽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아주 뛰어난 지체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한 명 한 명 살펴볼 때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성경 지식이 아주 뛰어났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아주 열정적이었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몹시 사모하였고, 여러 가지 필요한 일들을 능력 있게 처리하며 주님을 섬길 만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지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경쟁하며 자기를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들이 주님이 주신 영적 선물들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제 우리가 읽은 12장에 이르러서는 영적 선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 몸에 속한 지체들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지체는 눈의 역할을 하여 잘 볼 수 있고, 어떤 지체는 손의 기능을 하여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귀의 역할을 하여 다른 이들의 고민을 잘 들어 줄 수도 있고, 또 어떤 형제님은 입의 역할을 하여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능들을 선물로 주신 목적이 바로 전체 몸 안에 속해 있는 지체들 모두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가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잘 설명하는 형제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제님에게 그러한 은사, 그러한 재능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제님에게 그러한 기능을 주신 목적은 스스로를 높이고 우쭐하며 잘 설명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섬기고 돕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 찬송을 아주 아름답게 부르는 자매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매님에게 그러한 목소리와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다른 지체들 가운데는 음치도 있고 목소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매님에게 그러한 기능을 주신 목적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뽐내고 자랑하며 노래 못하는 지체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러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할 때 다른 지체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유익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형제님은 꼼꼼하고 세심하여서 다른 지체들이 실수로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담대하여서 모두가 걱정하고 주저할 때 앞장서서 전진해 나가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다른 지체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동안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하는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표현과 나타남이 어떤 형태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러한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발의 기능을 주셨다면 나는 그 기능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눈의 기능을 받은 지체를 정죄하면서 "너는 맨날 눈만 꿈뻑꿈뻑 거리고 쳐다보기만 하면서 직접 걷는 법을 전혀 못 배웠구나!"라고 호통을 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의 기능을 하는 지체는 "자기는 맨날 엉뚱한 방향으로 쓸데없이 걸어다니면서, 제대로 볼 줄이나 아느냐!?"하고 반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한 지체에 불과하며, 우리는 이미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나를 높이고 다른 지체들을 업신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지체의 장점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몸 안의 모든 지체가 눈일 필요가 없고, 모든 지체가 손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기능들을 선물로 주신 것은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며 주님을 섬기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없는 다른 기능들을 다른 지체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그 지체로 하여금 나를 돕고 섬기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면에서 나는 섬김을 받고 그 선물들로 인하여 감사하며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기능은 몸을 위한 것이고, 다른 지체에게 있는 기능이 또한 교회를 위한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 지체로서 받은 선물들을 가지고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갑자기 그 동안 하던 일을 다 청산하고 하루 종일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밀림 속에 들어가서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일이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지만 꼭 그렇게 크고 놀라운 일들 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속하게 하신 지역교회 안에서 한 명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입의 기능을 주셨다면 나는 입의 기능을 받은 그대로 역할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으면서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고 섬길 수 있도록 선물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공급받고 채움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지체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전에 저는 공익근무를 하면서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사무실에서 작은 커피자판기를 새것으로 바꾸면서 그 전에 쓰던 커피자판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커피자판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달라고 해서 공짜로 얻어온 적이 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시청까지 오셔서 자판기를 받아 가셨고 깨끗이 씻고 작동이 잘 되는지 테스트를 해서 예배당에 잘 배치해 두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그런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토요일날 모임을 가졌는데, 들어오는 성도님들마다 커피자판기를 보면서 어디서 났느냐고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또 다른 형제님이 서 계십니다. 그 형제님은 엔지니어이신데, 무엇을 설명하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일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 형제님은 아예 커피자판기 옆에 서서 들어오는 성도님들이 궁금해 할 때마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전혀 짜증을 내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아주 즐겁게 모든 지체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 이거요, 승선형제가 시청에서 얻어온 거에요. 사무실에서 커피자판기를 새걸로 바꾸는데 이걸 어디에 처리할지 고민하는 걸 얻어왔다고 하더라구요. 커피 한번 드셔보세요. 여기 옆에 설탕이랑 프림 따로 있는데 더 넣어드세요." 

주님을 섬기는 일은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상하실 섬김이란 뭔가 특별하고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속한 교회 안에서, 내가 오늘 속한 몸 안에서, 하나의 지체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해내며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며 보상하실 섬김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이며, 내가 지체라면 나는 이미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선물은 한 면에서 내가 하나의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기능이고, 또 한 면에서는 다른 지체들이 가진 다양한 기능들이 또한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각자가 받은 선물을 조금씩 가지고 다 모였을 때 우리는 한 몸으로서 모든 기능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눈 혼자서는 보는 것만 할 수 있지만, 눈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눈은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가 몸을 건강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데 한가지씩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들을 보며 서로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감사하고 누리며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로 발견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5.2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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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1) 

제목 :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집중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을 더 알고자 하여 샅샅이 찾아보고 외우고 필기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군사로서 또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종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갈급하고 목마르며 허기진 양으로서, 갓난아기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고 너무 맛있어서 한번 듣고 읽었던 말씀, 내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묵상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할까요? 학생처럼, 군사처럼, 종처럼, 또 양처럼, 갓난아기처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원래 설교를 훈련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우리 서 목사님께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설교를 훈련하는 입장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유익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요?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그 말씀이"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에 의하여"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는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그 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5절은 "그 분 안에", 즉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요, 빛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 나온 침례인 요한은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온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다시 "그가 세상에 계셨고"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도 문맥을 따라 계속해서 "He"라고 불리는 "그"는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11절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드디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우리 주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원래의 이름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타난 "그를 영접한 사람들"과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 "그 말씀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기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영접한 분의 이름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말씀"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에서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고 주의 자애하심과 주의 진리를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이름, 주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이름 중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섯 군데만 성경을 함께 찾아서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 5:5-7)『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외에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니,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
6절을 볼 때 "물과 피로 오신", 즉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로서 나타나실 때는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요? 다만 지식으로, 명령으로, 법칙으로 대하기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대하듯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사모함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는 다만 명령과 법칙을 대하면서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2. 현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까지 하늘에서 가지셨던 이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함이 어떠한지를 알리고자 하셨으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합니다. 26절을 보시면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이 더럽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2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분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며 애쓰노라."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성령충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풍선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호스에서 버튼만 누르면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바울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섬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속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거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리스도는 이상한 느낌이나 감정이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바로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유익을 다 발견하자면 평생을 묵상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신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절과 7절의 앞부분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은 4절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하시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태초부터 하늘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안에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살아 계신 주 예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러한 주 예수님을 더 알게되기 원합니다. 

3.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13절은 다같이) 이 부분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을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면,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오셔서 온 땅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13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명백히 드러내시며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실 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주 예수님의 이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접한 분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원하십니다. 또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이며,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시인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이며,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알거나 모르는 지식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키고 못 지키는 율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셨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거하시고, 앞으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실 살아 계신 주 예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또 우리 각 지체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살아 계신 주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을 알고 무엇을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았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많은 지식과 의로운 행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역사와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목표와 소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친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5.03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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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마 11:28-30)


제목 :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
마태복음 11장 28-30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이라고 잡아봤는데,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염려해독제 투"입니다.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고 나서, 같은 주제로 반복하여 여러 말씀들을 살펴보면 좀더 분명하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기 때문에 지난 주일날과 동일한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언급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잃어버린 혼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안식과 쉼에 대해서 설명하고 초청할 때 자주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시작하는 말
저는 지난 목, 금요일에 트레이닝을 잘 받고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석기시대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낮에는 이사를 잘 마치고 처음으로 새벽 1시까지 식당에 있었습니다. 12시가 넘으니 손님이 딱 2테이블에만 있었습니다. 한 테이블에는 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옆 테이블을 청소하면서 우연히 그 청년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몇 억을 벌었다더라, 이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을 많이 보다가 이렇게 나름대로 진지하게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까를 생각하는 청년들을 만나니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든 설령 돈을 많이 벌다 할지라도 그 길에는 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청년들은 옆에서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제가 더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자랑하시기를 온 땅에 그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신 욥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욥 5:7)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이집트의 모든 영화를 누리고, 광야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하나님의 사람 모세, 12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기력이 쇠하거나 눈이 흐리지 않았던 모세는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어도 그 연수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니, 그것이 곧 끊어지면 우리가 멀리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시 온 땅에서 지극히 지혜롭고 영광스러워서 저 멀리 동방의 시바 여왕이 찾아와 직접 대면해보기를 원했던 솔로몬 왕은 (시 127:1,2) 『주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읍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밤 늦도록 자지 않고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전 1:8) 『만물은 수고로 가득 찼으나 사람이 그것을 표현할 수 없으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도다.』(전 2:23)『이는 그의 모든 날들이 슬픔이며 그의 수고로운 비탄이요, 정녕,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함이니 이것도 또한 헛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리의 인생이 고생과 수고로 가득찼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헤매며 사람들 속에서 허덕이고 또 죄의 짐에 눌려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잃어버린 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거센 풍랑 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수고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이후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 안식과 쉼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다지 큰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죄인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여러분 예수님께로 나아와 쉼을 얻으십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당신이야말로 쉼이 필요한 것 같군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참 안식과 쉼을 주시는 주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본문인 28절의 말씀대로 다 주님의 초청에 임하여 영원한 안식과 쉼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28절까지만 읽고는 "아멘!"하고 성경을 덮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 이어지는 29절과 30절까지도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9절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우리가 우리 혼에 쉼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로부터 배운다면 우리는 우리 혼에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멍에와 우리 자신의 짐을 지고 수고하며 지치고 걱정과 염려 속에 메말라가면서도 너무나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지고자 하지 않는데서 발생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모르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외적으로 돈이 없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기초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복음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다만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티켓 한 장이 아닙니다. 다만 죄가 있었는데 용서해줬다는 사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물건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 개인에게 구원자요,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요일 5:12)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의 중심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식과 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 면에서는 맞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안식을 주시는 주님 자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자신,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메며 나를 따르고 내게서 배우고 내게서 쉼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과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지치고 눌려있고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염려와 무거운 짐들 속에서 지치고 수고한 우리에게 참 안식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 14:27)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온유와 겸손
오늘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이나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아주 작고 주목받지 못한 도시였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만큼 아주 볼품 없는 빈민촌에 불과했습니다. 나사렛의 목수들은 자기 목공소를 가질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고, 나사렛 주민들도 가구를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의 목수들은 망치하나와 못 통을 들고 "문짝 고치세요. 식탁 고치세요."하고 외치며 갈릴리 주변을 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오십 세가 조금 안된 것으로 보일 만큼 태양에 그을리고 볼품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날 성화같은데 나오는 금발머리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사 53:2)『이는 그가 그 앞에서 연한 싹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이며, 그는 모양도 장엄함도 없으시니 우리가 볼 때에 그를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음이라.』

가족들에게는 배척받고 고향에서는 거부당하고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심을 하거나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삼십 대 초반인데 오십 대로 보인 것 때문에 충격을 받고 외모에 대해 걱정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머리 둘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로 완전히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또한 주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외부의 여러 가지 환경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이러한 주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예수님이 가진 화평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는 성격이 부드럽고 잘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성품은 사람의 성품이 아닌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아무리 온유해 보여도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온 열매가 아니라면 결코 참된 온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를 가리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 것을 정죄하고, 또 모세만이 선지자가 아니라 아론과 미리암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고 하면서 모세를 시기하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이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잠잠하였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온유한지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속으로는 화가 나고 불타는데 겉으로만 참은 것일까요?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인식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겸손과도 연결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눈치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만을 주목하게 해줍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며 겸손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리며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의 무거운 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시험과 걱정거리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항해 중에 자꾸만 파도가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의 초청에 더 잘 응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서 더 무겁게 짓누르시거나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수고한 만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만큼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울 왕으로부터 늘 도망 다녀야 했던 다윗, 자기 아들로부터 배반을 당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셨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과 친밀하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화평이란 외부의 걱정거리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배우고 알게 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이 나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 때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6.03.0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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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마 18:1-6,10,14) 

제목 : 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
본문 : 마 18:1-6,10,14
1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하매 
2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
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늘은 아마도 제가 캐나다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기대가 되고 또 큰 축복이 있었는데 이번에 하는 설교가 형제, 자매님들을 오랫동안 떠나기 전에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까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3ㆍ1절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주님에 대해 설교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 요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말씀을 준비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어떤 것일까, 모세가 간절히 보기를 사모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 바울이 세상의 쓰레기와 같이 되면서도 그러한 모든 고난이 가벼운 것은 그 영광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들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지난 5년 동안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작은 부담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어떤 말씀을 나눌지 다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기름 부어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요즘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전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낳아서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라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더 커졌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비의 부담 때문에 점점 아이들을 낳지 않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주님께서는 우리교회를 넘치게 축복하셔서 시끌벅적하고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하니 무엇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참 막막했습니다. 설교원고도 새로 써보고 성경본문도 바꿔보고... 나름대로 끙끙대다가 우선 가볍게 우리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일학교의 주제가인 "갈보리 어린이"라는 찬송을 보면 3절 마지막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한가지 소원 주님의 사람되는 것 더 많이많이 자라나서 섬기고 싶어요." 이제 6학년이 된 창원이가 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하루는 창원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창원이 어머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창원이가 대답하기를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학교에 원수 같은 친구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우선 창원이가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에, 또 창원이가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작게나마 소원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또 그 문제로 나름대로 깊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원수였을 때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더 깊이 알게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작년 여름, 가을 즈음에 아이들에게 카드 붐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올 때마다 카드를 한 뭉치씩 가져오곤 했습니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용과 괴물과 악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빼앗기도 하고 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4학년에 올라간 재선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재선이의 어머니께서 재선이에게 사도행전 19장에 예수님을 믿은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가진 은 오만 개 어치나 되는 책들을 모두 불태운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그 카드를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선이는 그 당시 울면서 그 카드를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재선이의 생일이 되었을 때 한 친구가 다시 그 카드를 한 뭉치 선물한 것입니다. 그 때 재선이는 조금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그 카드를 버렸습니다. 재선이 어머니는 재선이에게 왜 좋아하는 그 카드를 버렸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재선이는 대답하기를 "카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가잖아요." 하였습니다. 

재선이의 친구인 건주가 있습니다. 건주는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였는데, 마태복음 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을 읽은 건주는 정말 이 말씀이 진짜인지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건주에게는 한 친척형이 있는데 명절마다 그 형과 함께 노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평소에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먼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주는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그 형과 만나서 놀게 해주세요."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어느 날 건주가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할머니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형이 마침 그 집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명절도 아니었고 서로 시간을 맞춘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멀리 사는 그 친척형이 와있었던 것입니다. 건주의 어머니는 건주가 그렇게 기도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건주는 너무나 기쁘게 "제가 엄마한테도 말 안하고 정말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했는데 드러나게 응답해 주셨어요!"하면서 자랑하였습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주영이가 있습니다. 주영이는 불교를 믿는 외할머니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우 답답해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영이는 손에 돌멩이 하나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내밀면서 "할머니, 할머니는 이런 돌한테 절을 한다는 말이에요?"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800년대 놀라운 부흥의 통로가 되었던 설교자 디엘 무디는 자신의 설교 이후에 한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아이가 헌신초청에 응답하여 앞에 나온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한 사람 반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은 그 기도의 의미를 물었고, 디엘 무디는 대답하기를 "이 어른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많이 허비하여서 반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주보고 또 쉽게 지나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깊고 진지한 생각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고자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될까하는 고민이 있고, 카드가 너무나 좋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단호하게 버리려는 결심이 있고,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히 기도하여 응답 받는 간증이 있고,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표현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이고 우습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과 교제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논쟁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이들을 잘 양육해서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실족시키고 길을 잃게 만드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실 정도로 주님은 우리 아이들을 앞길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오늘날의 우상, 교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다니엘서에 예언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입니다(단 12:4).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물질과 쾌락 그리고 교육입니다. 이 세상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교육의 대열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여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바로 사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시스템에 정복당하여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한 초등학생이 자살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학원을 조금만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육이라는 우상은 아이들을 바쁘고 지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안에도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영어를 잘 못하고, 수학을 못하고, 과학을 못하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돈을 쓰고 학원에도 보내지만, 자신의 자녀가 주님을 모르고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혼내기도 하고 답답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교회의 초등부 아이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한달 동안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하거나 상식과 흥미를 위해 구입하는 책들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성경은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성경을 가져다 읽으라고 하는 것과 자기 소유의 성경,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된 내 성경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주님을 알아 가는 것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상식과 교양을 위하여 읽으라고 강요하는 책들은 너무나 많지만 성경을 읽으라고 말하는 소리는 너무나 작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오늘의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님은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워놓고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바램일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특징 가운데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 식어지리라"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심이 험악해졌다.", "세상 살기 무서워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이 식어졌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대명사는 바로 부모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이 바로 사랑이 식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구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여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5년 간 아이들을 대하고 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복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 라는 사실은 아이들이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옥이 있다는 것도 알뿐 아니라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뭔가 부족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아이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이라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순수하고 열려있는 마음 속에도 복음이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나이를 먹는다고 자라나지도 않고, 몇 번의 성경공부로는 심어주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제 때에 징계하느니라"(잠 13:24). 
"아이를 징계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 이는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할 것임이라.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잠 23:14). 

사랑이 식어진 오늘날은 자기 아이를 때리지 않습니다. 제 때에 징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배우지 못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고, 권위를 거슬러 마음대로 행동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얼마나 크게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죄인인지 인식할 수조차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철저하게 맞으면서 배운 아이들은 거짓말을 지적할 때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다만 말로만 경고를 받고 타이르고 구슬리는 방식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그런 것을 별로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어떤 아이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혼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할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으로 아이들을 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초리가 아이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지옥에서 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회초리를 아낀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며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현재 잘못된 것들을 고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더 멀리 본다면 그를 지옥에서 건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제 때에,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잘못을 알려주고 징계하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구주 예수님을 찾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아이들의 미래
우리 아이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구원만 달랑 받고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영원한 영광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목적이며 소망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저의 말을 듣고 배우기보다 저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따로 배우고,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만 적당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짓과 표정과 어조와 행동을 관찰하며 실제가 무엇인지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흡수하고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참되게 이끌 수가 없습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어른들은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어머니께서 예배당에서 통성기도를 하시면서 아주 큰소리로 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보았는데, 그 때 저는 "엄마 왜 울어, 엄마 왜 울어, 울지마." 하면서 마구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씩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잘 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님들! 아이들 앞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많이 우십시오.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를 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또 아이들에게 자기 전에 기도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지 삶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 습관적으로 만나는 악세사리 같은 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나를 인도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도요청
원래 저는 다니엘,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의 자녀들, 소년 다윗, 디모데 이런 성경 인물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할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또 아이들이 유치한 것을 가지고 웃고 좋아할 때 어떻게 같이 웃어줘야 하는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면서 쉽게 업신여기고 간과하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수요기도회입니다. 저는 기도요청을 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한 어린 형제가 그 동안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섬기면서 힘들고 지치고 실패하고 부끄러웠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대하고 섬기면서 주님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이없어하고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다가도 이 아이들보다 더 심한 나를 오래 참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섬길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아이들에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진리만을 전달하고자 했을 때 나의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나의 마음상태와 관계없이 언제라도 아이들을 기쁘게 대해야하는 섬김의 위치는 때로 부담스럽고 힘든 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잠시 다른 위치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주님이 다시 부르시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주님을 알아 가는 이 귀한 자리를 사모하며 돌아오기 원합니다. 아이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여러 가지 핑계로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축복하셔서 많은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섬길 지체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섬김의 자리를 사모하여 헌신하며 감당할 지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 아이들을 이끌어주며 함께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선생님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9장 13,14절을 다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그 까닭은 하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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