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10.04.09 / 설교 장소 : 서울침례신학교 설교학 10분 설교/로빈28세
내게 배우라(마 11:28-30)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내게 배우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이렇게 밤늦은 시간까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참된 일꾼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사역자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준비하고 있습니까?
누가 어떤 질문을 해도 성경을 그 자리에서 척척 펴서 보여주고 해설해 줄 수 있는 뛰어난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도 있고, 또 놀라운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눈물과 감동으로 주님 앞에 이끌어 오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형제자매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역하는 놀라운 기도의 사역자가 될 수도 있고, 많은 귀한 찬송을 통해 지체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찬양의 사역자가 될 수도 있으며, 주옥같은 글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진리를 보급하는 문서 사역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모습의 사역자들을 묶어서 한가지로 길을 정해보자면,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 같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어떠한 인상, 또는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아, 저 형제는 참 똑똑하다. 아,저 형제는 참 말을 잘한다.”라고 느끼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않는 영혼들이나, 형제자매들이 우리를 볼 때에, “아, 내가 예수님이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저 사람은 진짜 예수님 같다. 저 형제는 저런 면은 주님을 닮았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우리에게 그것보다 큰 기쁨과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소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봐주는 것이 소원이 아니죠? 정말 우리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 또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 바로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에 나만의 독특하고 더러운 냄새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뿜어져 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역자가 되기에 앞서서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생을 드려 가야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본론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전능하고 권위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지혜롭고 명철하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원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은 바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28절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오늘의 본문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을 때, 곧 마음이 무겁고 피곤할 때 짜증을 잘 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피곤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즐거워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평소에 아무리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지친 경우에는 신경이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 훈련소에서 야간행군을 했었는데요. 처음에 출발할 때는 다들 서로를 독려하고 응원을 외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중에서 앞부분에 서서 걷는 키 작은 친구가 있었는데, 10분마다 “힘내자” 이렇게 외치면 뒤에서 따라가는 동료들이 “힘내자”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런데 1시간 정도 걷고 나서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 작은 친구가 또 다시 “힘내자”라고 외치는데, 맞장구치는 소리가 점점 없어지더니 나중에는 그 친구에게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입 다물고 그냥 걷자. 짜증난다.” 함께 파이팅을 외치던 동료들이 무슨 이유로 짜증을 냈을까요? 네,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하고 지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며, 신경이 날카롭고 상처 주는 말들을 쉽게 내뱉는 거칠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다 불러주셔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여 주셨기에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어리석게 행하는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감히 안식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긴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적하였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조차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셨습니다.
제임스 낙스라는 목사님께서는 성령의 열매 중에서 온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온유를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들어 벽에 던지면 벽은 상처를 입으면서 돌을 튕겨냅니다. 또한 유리병을 들어 벽에 던지면 벽은 유리병을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그러나 돌을 들어 호수에 던지면 호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잔잔하게 흐릅니다. 온유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비방을 하고 상처를 줄지라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잔잔한 강같이 모든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서 지적하는 사람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연스럽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29절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오늘의 본문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배우기 원하십니까? 전천년주의적 종말론, 교회의 시작, 간극이론, 뱁티스트 브라이드, TR이냐 영킹이냐 등등. 우리에게는 많은 신학적인 이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신학적인 많은 지식들을 배우기에 앞서서, 또는 다른 지식적인 부분들을 다 배운 후에라도 그 무엇보다 힘써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내게로 와서 내게 배우라.”라고 언급하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바른 지식과 놀라운 재능과 은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정말 많은 지식을 가지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학자들을 봅니다. 또 정말 설교를 잘하고 사람들을 감화 감동시키는 놀라운 설교자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는가, 그들이 정녕 온유하고 겸손한가를 볼 때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역자로 준비되기 원합니까? 우리가 또 한명의 그저 그런 신학자, 또 한명의 일반적인 목회자가 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께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가서 배우려하지 말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가지신 마음이 무엇입니까? 다함께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7절에 나온 것처럼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셨고,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기 원합니다. 누가 참된 사역자인가의 여부는 지식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물론 바른 성경적 지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른 지식 그 자체는 우리를 참된 사역자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된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원한다면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고, 명성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습니다. 종이 되면 될수록 좋고,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자처럼 여기고 무시할수록 좋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러한 것을 염려하지도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원하는 모든 형제들은 마음속에 있는 영적 야망을 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넘겨야합니다. 내가 놀라운 사역을 일으켜서 위대한 사역자가 한번 되어보겠다고 하는 그런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를 다 십자가로 처리해야합니다. 침례 요한이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려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쇠하는 길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며 낮아지는 길입니다. 무명한 자가 되는 길이며 스스로 종이 되는 길입니다.
마무리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종의 마음이며 온유와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지식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성품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있을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떨어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온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온유하신 주님께 꼭 붙어 동행하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온유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사역자는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하려고 노력해서 되지 않고 겸손하려고 노력해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모든 수고와 짐을 내려놓고 안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도 늘 가득하기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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