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7.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35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삼하 8:6,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8장입니다. 사무엘기하 8장 6절과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8장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그 뒤에 다마스쿠스의 시리아에 수비대를 두매 시리아 사람들이 다윗의 종이 되어 예물을 가져오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그를 보존하시니라.
그리고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4 그가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두루 수비대를 두니 에돔의 모든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그를 보존하시니라.
저는 오늘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안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공사장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안전제일”이라는 문구와 함께 위험하다는 경고표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추석이나 설날 명절 때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라기보다는 다만 아무 사고 없이 안전하고 무사하게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구정민 목사님 부부께서 캐나다 밴쿠버에 방문하셨는데, 우리 학생들과 함께 목사님 부부를 위해 기도하면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연스럽게 나왔던 기도는 바로 모든 길 가운데의 안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험천만해 보이는 암벽등반을 즐기기도 하고, 번지점프를 즐기기도 하지만, 안전장비를 충분히 갖추고 확인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어떤 위험해 보이는 활동을 하든지, 결국 사람들은 안전한 가운데 스릴을 즐기기를 원하는 것이지, 결코 위험 그 자체를 즐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했던 한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그는 소년 시절에 혼자서 사자와 곰을 상대했고, 거인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죽이고자 하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된 이후에도 수많은 치열한 전쟁터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그를 보존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안전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다윗은 안전을 추구하거나, 안전을 찾아다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고, 치열했으며, 언제든지 한순간만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죽음과 오직 한발자국만이 떨어진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를 가든지 지키시고 보존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8장의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놀라운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 수 있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어디를 가든지 동행하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지키시고 보존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메덱암마
그렇다면 이제 다윗이 과연 어떻게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잠시 함께 사무엘기하 7장으로 가셔서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왕에게 안식을 주시고 사방의 모든 원수로부터 벗어나게 하사 왕이 자기 집에 앉아 있을 때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안식을 주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방의 모든 원수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다윗에게는 원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화와 안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사무엘기하 8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일 뒤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정복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이 말씀은 “이 일 뒤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라는 것은 바로 다윗이 주의 집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다가,하나님께서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며, 피를 많이 흘렸으니, 다윗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일입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평화와 안식의 사람으로서 주의 집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일 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고 했다가, 도리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나단을 통하여 들은 바로 그 뒤입니다.
이제 다윗은 바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쟁의 사람으로, 주님을 위한 전사로 세우셨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가진 왕이어야 하는지 진로를 새롭게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일 뒤에 다윗은 다만 평화를 누리고 안락함을 누리는 삶을 지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궁전 안에서 안전을 추구했기 때문에, 주님의 보존하심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순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보존하심을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단지 우리 자신의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위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시간과 힘을 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과 드림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먼저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메덱”이라는 말은 “굴레”라는 의미이고, “암마”라는 말은 우리말의 “엄마”와 비슷한데, 바로 “어머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메덱암마”라는 것은 “어머니의 굴레”, “모성의 굴레”라는 의미로, 블레셋의 주요 도시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역대기상 18장 1절에서는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의 도시 가드를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바로 다윗이 얼마 전까지 자신이 종노릇을 하였던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가 있던 바로 그 땅을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메덱암마의 의미를 우리들의 삶 속에 영적 의미로 적용을 해보면, 바로 우리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된 우리들의 천연적인 본성, 즉 “육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이 과거에 자신이 종노릇하였던 바로 그 가드 땅, 바로 그 굴레를 정복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그 동안 우리가 굴레처럼 잡혀 살았던 “육신”을 죽음으로 넘기고, 주님 안에서 자유와 승리를 누리기 원합니다.
** 모압
이제 우리 함께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또 모압을 쳐서 그들을 땅에 내던지고 줄로 재어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이와 같이 모압 족속이 다윗의 종이 되어 예물을 가져오니라.
다윗은 블레셋의 가드 땅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모압을 쳤고 정복하였습니다. 다윗은 모압 사람들의 포로들을 땅에 내던지고 줄로 재어서 두 줄 길이인 2/3는 죽이고, 오직 한 줄 길이인 1/3만을 살려두어서 자신에게 예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키를 일일이 다 재어보고 키 큰 사람을 죽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 인원을 나열해 놓고 1/3만을 살려두었다는 의미입니다.
** 하닷에셀
또한 3,4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3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프라테스 강에서 자기의 경계를 회복하러 갈 때에 다윗이 또 그를 쳐서
4 그에게서 병거 천 대와 기병 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빼앗고 모든 병거의 말은 다리의 힘줄을 끊되 다만 그것들 중에서 백 대의 병거에 쓸 것만 남겼더라.
다윗은 블레셋을 치고, 모압을 치고 또한 하닷에셀을 쳤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전쟁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순종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 말씀에서는 다윗이 하닷에셀로부터 병거 천 대와 기병 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빼앗았다고 하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다소 논란이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기상 말씀과 비교해 볼 때 기병의 숫자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이 부분을 잠시 다루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병거 천 대와 기병 칠백 명과 보명 이만 명을 기억하시면서, 사무엘기하 말씀은 손가락으로 끼워두시고, 역대기상 18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3 소바 왕 하달에셀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자기의 통치권을 굳게 세우러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하맛에까지 이르렀으며
4 그에게서 병거 천 대와 기병 칠천 명과 보병 이만 명을 빼앗고 또 모든 병거의 말은 다리의 힘줄을 끊되 다만 그것들 중에서 백 대만 남겼더라.
여기 보시면 소바 왕 하달에셀이 등장하고 있는데, 사무엘기하에 나타난 하닷에셀과 동일인물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전쟁이 벌어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4절에 나온 병사들의 수를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병거 천 대라는 것이 똑같고, 보명 이만 명이 똑같은데, 사무엘기하에서는 기병이 칠백이라 하였고, 여기 역대기상에서는 기병이 칠천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10배의 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수 차이를 확인하셨습니까?
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들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원본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사본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NIV성경은 사무엘기하의 칠백 명을 아예 칠천 명으로 수정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병사들의 수를 어떤 방식으로 세었고, 어떤 방식으로 분류하였는지를 살펴본다면 이 두 부분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눈먼 두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마가복음에서는 바디매오 한 명만을 언급한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 명이 사실이냐, 한 명이 사실이냐가 서로 충돌하는 기록이 아니라, 두 명이라고 기록한 마태복음도 맞고, 그 중에 한 명인 바디매오에 집중해서 기록한 마가복음도 맞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사무엘기하와 역대기상 말씀에서 하닷에셀을 하달에셀이라고 부른다든지, 메덱암마를 가드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맞습니다.
우리 함께 이스라엘에서 병사들을 어떤 방식으로 분류하였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기하 10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므로 다윗이 시리아 사람들의 병거 칠백 대의 사람들과 기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들의 군대 대장 소박을 치매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여기서 사람들 숫자를 보시면, 시리아 사람들의 병거 칠백 대의 사람들과 기병 사만 명이라고 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면서 역대기상 19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시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므로 다윗이 병거를 타고 싸우던 칠천 명과 보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대 대장 소박을 죽이니라.
여기서 사람들 숫자를 보시면, 시리아 사람들 중에서 병거를 타고 싸우던 칠천 명과 보병 사만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기하와 역대기상을 비교해서 보면, 병거는 칠백 대였고, 그 병거와 관련되어서 싸우던 군사는 칠천 명이었으며, 병사들은 사무엘기하에서는 기병 사만 명이라고도 불리고, 역대기상에서는 보병 사만 명이라고도 불리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확인하셨습니까?
당시에는 기병이나 보병을 철저히 구분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기병으로 출전하였다 하더라도,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싸우게 되면 보병으로 분류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은 기병 사만에, 보병 사만으로 총 팔만 명이 아니라, 기병이기도 하고 보병이기도 한, 사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념으로 우리가 사무엘기하 8장 4절 말씀을 본다면,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기병이 될 수도 있고, 보병이 될 수도 있는 병사들의 수를 굳이 기병 칠백에, 보병이 이만이라고 구분을 해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군사인 보병 이만 명 중에서 기병이 칠백이었다는 의미로, 기병이 보병의 숫자 속에 포함되고 소속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과”, 영어로는 “and”라고 묶어주는 접속사가 대등하게 무엇과 무엇으로 나열하고 구분하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앞과 뒤에 나온 단어가 서로 포함하는 개념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성경에서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의 영토 중 한 도시입니다. “서울과 한국”이라는 말이 나열식으로 이해된다면 매우 이상한 표현인데, 성경에서는 “예루살렘과 유다”라고 해서 결국에는 유다를 가리키지만, 유다 안에 포함된 예루살렘을 강조하기 위하여, 접속사 “and”를 사용하면서, 굳이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용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한 천사는 여인들에게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그냥 제자들이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소속되어 있지만,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던 베드로를 강조하여 언급한 예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속과 포함의 개념으로 접속사 “and”를 이해하게 되면, 기병 칠백과 보병 이만이라고 할 때, 전체 병사가 이만 칠백이나, 이만 칠천이 아니라, 전체 병사는 이만 인데, 그 중에 말을 탔던 기병이 처음에는 칠천이었다가, 전투 도중에 말을 잃고 칠백이 남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기하와 역대기상의 기병의 수가 차이가 나는 것은, 전체 병사의 수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병사 이만 가운데, 말을 탄 기병이 얼마였느냐를, 그 구성을 강조하는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보존하셨는데, 하물며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온전하게 보존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이상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보존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손에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 시리아
이제 우리 다시 다윗의 이야기로 돌아오셔서 함께 사무엘기하 8장 5,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구출하러 왔을 때에 다윗이 시리아 사람들 중에서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6 그 뒤에 다마스쿠스의 시리아에 수비대를 두매 시리아 사람들이 다윗의 종이 되어 예물을 가져오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그를 보존하시니라.
다윗은 하닷에셀 만이 아니라 그 지원 병력으로 왔던 시리아 사람들까지도 무찔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자신을 드린 다윗에게 승리와 안전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며, 가만히 조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동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었음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 드림과 봉헌
다윗은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가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보시겠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9-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쳤다는 것을 듣고는
10 그때에 자기 아들 요람을 다윗 왕에게 보내어 문안하고 그를 축복하게 하였으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와 전쟁을 하던 때에 그가 하닷에셀과 싸워 그를 쳤기 때문이더라. 요람이 은그릇과 금 그릇과 놋그릇을 가져왔으므로
11 다윗 왕이 그것들도 주께 봉헌하되 자기가 정복한 모든 민족들에게서 취하여 봉헌한 은과 금
12 곧 시리아와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들과 아말렉에게서 취한 것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취한 노략물과 함께 봉헌하니라.
다윗은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었는데, 그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전리품을 노략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이 이 모든 전쟁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먼저는 물론,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에게 목적하신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나안 민족들로부터 노략물을 얻고, 예물을 얻어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한 재료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자신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수는 없었지만, 다윗은 자신의 아들이 그 모든 것을 순조로이 할 수 있도록 모든 재료를 예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사울 왕의 마음은 오직 노략물에 있었지만, 다윗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이 얻은 모든 노략물을 주님께 드리고 봉헌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이며, 자기 자신 또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들의 시간과 힘과 미래와 인생을 주님께 드린다면, 우리가 가진 어떤 소유나 재능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소유가 된 우리들을 보존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다윗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다윗과 같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려진 삶,온전히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삶, 그리하여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 공의와 정의
우리는 오늘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다윗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 된 첫 번째 이유로, 그가 자신의 안전이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윗이 자기의 유익이나 부와 명예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8장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자기의 온 백성에게 판단의 공의와 정의를 집행하였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통치하였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많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또 수비대를 건축하는 전쟁 지휘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는 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공의와 정의로 판단하며 통치하는 공정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과 같이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왕권에 대하여 초조해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사람들을 차별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걷기를 원하였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대로 공의롭고 정의롭게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이 어디에서나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그가 공의롭고, 정의롭게 주님의 말씀을 집행하고 살아가기를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이나 선호도에 따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에 이끌려서, 진리의 길을 타협하거나 비뚤어진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롭고 공의로운 길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믿음의 좁은 길입니다. 진리의 길에는 언제든지 타협의 유혹이 있을 수 있고, 손해나 핍박이나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정의의 길이며, 공의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길을 가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값을 지불하고, 손해를 담당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죄 값으로 자신의 몸과 피와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오늘 기꺼이,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진리의 길을 위하여 기꺼이 값을 지불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값을 지불한 것보다 훨씬 더 넘치게 보상하시는 주님의 보상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다윗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의 삶은 그 누구보다 위험하고 파란만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디서나 그를 보존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다니고, 창칼이 달려드는 위험한 전쟁터를 수도 없이 누비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길에서 다윗을 지켜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다윗이 자신의 안전이나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기쁨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일어서는 사람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노략물과 바쳐진 조공을 모두 주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위해 봉헌할 만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로 다윗이 타협하거나 물러서거나 현재의 상황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의 공의와 정의를 집행하는 길을 걸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과정은 원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그를 보존하셨다는 결과만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 자신에게,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장 안전한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안전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기쁨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어나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유익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계산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 나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길에서 물러서거나 타협하지 않고, 내가 아는 만큼, 배운 만큼, 주님께서 알려주신 만큼, 순종하며 따라가는 공의와 정의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삶을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보존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주께서 보존하시는 사람으로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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