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8.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설교/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36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삼하 9:6-8)
이승선
안녕하세요?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9장입니다. 사무엘기하 9장 6-8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6 이제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얼굴을 대고 엎드려 경의를 표하니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매 그가 응답하기를, 보소서, 주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인하여 반드시 네게 친절을 베풀고 네 조상 사울의 온 땅을 네게 도로 주리라. 너는 계속해서 내 상에서 빵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저는 오늘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님의 마음도 다 이해하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합니다.
저희 승연이는 밤에 잠자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데, 엄마아빠가 잠을 재우려고 할 때마다, 왜 잠을 자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왜 떠들면 안 되는지, 기도할 때는 왜 눈을 감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승연이보다 조금 더 자란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마음대로 놀 수는 없는지, 왜 이렇게 숙제가 많은지, 왜 세상 음악을 들으면 안 되고, 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지, 왜 화장을 하면 안 되고, 왜 PC방에 가지 못하게 하고, 노래방에도 가지 못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 찬송가의 제목처럼, 하나님께서 왜 날 사랑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은 전혀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데, 자격도 없는데, 왜 날 사랑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이라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도 자신에게 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 사람은 바로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라고 말하면서 다윗에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사무엘기하 9장의 말씀을 통해서, 므비보셋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친절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 넘치게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 므비보셋은 어떤 사람?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므비보셋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9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서 아직 남아 있는 자가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인하여 그에게 친절을 베풀리라, 하니라.
먼저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사방에서 안식을 누리고, 또 전쟁마다 승리하던 바로 그 시점에, 소위 말해서 아주 잘나가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은혜를 기억하였습니다.자신이 비천한 처지에 있고, 위기 가운데 있을 때,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요나단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이나, 아쉬운 때에는 도움을 찾지만, 모든 어려움이 지나가고, 우리가 잘나가게 될 때에, 도움을 주었던 그 사람을 기억하고 감사를 표하는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요나단이 아니라, 그가 이미 죽고 사라진 시점에서, 바로 그의 자손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만을 돌아보고, 가꾸고,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또 다른 이들을 돌아보고, 베풀고, 섬기기를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아니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주님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교회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서 아직 남은 자가 없느냐? 내가 그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리라, 하니 시바가 왕께 이르되, 요나단에게 아직 아들 하나가 있는데 그가 두 발을 저나이다, 하매
다윗은 사울의 집에 속한 종이었던 시바라고 하는 종을 불러다가 사울의 집에 남은 자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때 그 종은 요나단에게 아직 아들 하나가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귀띔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그가 두 발을 전다고 덧붙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두 발을 전다는 것은 단순히 절뚝이면서 걷는 것이 아니라, 혼자 걷는 것이 불가능하여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당시에는 휠체어도, 자동차도, 엘리베이터도 없었기 때문에, 므비보셋은 혼자 힘으로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조금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을지는 몰라도, 어디론가 다니면서 외부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사울의 종이 므비보셋에 대하여, 두 발을 전다고 덧붙인 이유는 그가 왕의 친절을 받기에 자격이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왕께서도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고, 그는 그 모든 친절을 받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려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의 할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이었으며,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몰락한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며 장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잠시 사무엘기하 4장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를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전에 예스르엘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소식이 왔을 때에 그가 다섯 살이었더라.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도망할 때에 급히 도망하였으므로 그가 떨어져서 발을 절게 되었더라. 그의 이름은 므비보셋이더라.
므비보셋은 다섯 살이었을 때,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우면서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부터 두 발을 절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을 가다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두 발을 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므비보셋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고작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거나, 오늘의 현실을 괴로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에 대하여 소개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늘 본문인 사무엘기하 9장 8절 말씀과 같이 “죽은 개”라는 단어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므비보셋은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모든 인생의 비참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런 소망도, 확실한 목적도, 가능성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절망 가운데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살고 있던 지역은 “로드발”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말은 “목초가 없다”는 뜻입니다. “로”라는 것은 “없다”는 의미이고, “드발”이라는 것은 “목초”를 의미합니다. 므비보셋은 목초가 없는 곳에서, 메마른 땅에서 방황하고 있는 하나님 없는 인생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의 부름
이제 우리 함께 이러한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가 두 발을 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에 대하여 전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치료될 가능성은 있는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다만 므비보셋을 직접 만나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9장 5,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그때에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에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라.
6 이제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얼굴을 대고 엎드려 경의를 표하니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매 그가 응답하기를, 보소서, 주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다윗은 즉시로 므비보셋을 데려오게 하였고 므비보셋은 왕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때 므비보셋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왕이 나를 불러주었기 때문에 기쁘고 자랑스러웠을까요?
왕이 자기 같은 사람을 불렀을 때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그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끝까지 죽이려고 추격하였던 사울 왕의 손자였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왕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든지, 그는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를 찾을 필요라고는, 오직 사울의 집을 멸족시키고 복수하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은 벌벌 떨면서 왕 앞에 엎드렸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7,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인하여 반드시 네게 친절을 베풀고 네 조상 사울의 온 땅을 네게 도로 주리라. 너는 계속해서 내 상에서 빵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다윗이 벌벌 떨고 있던 므비보셋을 향하여 가장 먼저 말했던 것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얼마나 은혜로운 말이며, 감사한 말입니까? 내가 여기 온 것은 심판을 받고, 복수를 받아 죽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는 므비보셋에게 이 말은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구원의 말씀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으로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반드시 친절을 베풀고 사울이 개인적으로 소유하였던 온 땅을 돌려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친절을 베푼 이유는 오직 요나단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므비보셋의 어떠한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잘생긴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아무것도 계산되지 않았습니다.므비보셋에게 베풀어진 친절은 오직 그가 요나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친절이 베풀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지, 아무것도 계산되지 않습니다.오늘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랍고 신기한 하나님의 친절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심판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영광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떠한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친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놀랍고 신기한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친절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두 발을 저는 므비보셋과 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을 놀랍게 사랑해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사랑하기 원합니다.
다윗은 또한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왕의 식탁에서 빵을 먹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9장 11절의 중간부터 보시겠습니다.
...므비보셋에 관하여는 왕이 이르기를, 그가 왕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처럼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였더라.
다윗은 목초지가 없는 곳인 로드발에 거하던, 궁핍하던, 므비보셋을 불러다가 왕의 만찬에서 매일 식사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의 식탁에서 빵을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이것은 다윗 왕이 그를 아들처럼 대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교제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몰락한 가문의, 두 발을 저는 므비보셋이 왕의 아들처럼 왕의 식탁에서, 왕과 교제하면서 풍성한 식사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말씀의 빵과 생명의 물로 먹이시면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교제하시고, 함께하고 계십니다.
** 여전히 은혜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9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처럼 므비보셋이 계속해서 왕의 상에서 먹었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었더라.
사무엘기하 9장의 마지막 구절은 이제 므비보셋이 계속해서 왕의 상에서 먹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또 다시 그가 두 발을 절었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기하 9장 말씀을 읽으면서 그가 두 발을 전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여기서 또 그 안타까운 사실을 강조하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함께 로마서 15장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말씀은 특별히 구약의 말씀들을 언급하면서, 어떤 말씀이든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말씀과 같이, 사무엘기하 9장의 가장 마지막 문장을 통하여,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두 발을 다 절었더라.” 므비보셋이 두 발을 다 절었다는 말이 왜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될까요?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 시간 동안 왕의 상에서 빵도 먹고, 왕과 교제도 나눴으면 이제 좀 걸어야 되는거 아닌가? 그 정도 시간 동안 믿음 생활하고, 교회 생활 했으면, 주님 같아져야 하는거 아닌가? 그 정도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웠으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물론 우리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더욱 거룩하고, 더욱 겸손하게, 더욱 사랑이 풍성하게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두 발을 절었던 므비보셋의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오늘 주님 앞에 자격이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여전히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변함없이 베풀어지는 왕의 만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끝까지, 그에게는 자격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는 동일한 은혜와 친절이 베풀어졌습니다. 단 한 번도 므비보셋이 자격이 있어서, 왕의 만찬을 먹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였습니다.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 9장으로 돌아오셔서 8절 말씀을 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그가 무엇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랑받을 만하고, 친절한 대우를 받을 만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다윗이 은혜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다윗이 요나단을 기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어떠한 자격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쁘니까 사랑을 받고, 무엇을 잘하니까 사랑을 받고, 또는 무엇이 없으니까 동정으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예뻐지려고 하고, 뛰어난 실력을 갖추려고 하고, 착한 척을 하고, 영적인 척을 하고, 때로는 불쌍한 척도 합니다.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관심을 받기 위해 바쁘고 지치게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때로는 사랑을 받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합니다. 나보다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깎아내리면, 내가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만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더 공허하고 곤고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여러분, 우리는 이미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발을 저는 자와 같고, 죽은 개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면, 이처럼 사랑하셔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더럽고 비좁고 누추한 우리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고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온갖 더러운 생각과 교만과 고집과 이기적인 마음과 거짓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늘 우리를 참아주시고, 긍휼로 대해주시고, 친절을 베푸시면서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숨을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인가를 볼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앞을 볼 수 있는 눈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들을 자격도 없는데,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았습니다. 어디론가 걸어갈 자격도 없는데 튼튼한 다리를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만질 자격이 없는데, 두 손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자격이 없는데,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질 자격이 없는데,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주셨습니다.
주의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
오늘도 우리는 두 발을 저는 므비보셋과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여전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사랑과 친절과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다른 곳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기진하며 헤매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든지, 지금 이 순간 주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나를 먼저 불러주시고,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친절과 긍휼을 베풀어 주신 주님과 함께 만찬을 누리며, 교제를 누리기 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만족이 되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비록 두 발을 다 전다할지라도, 왕의 만찬에 나아오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기 원합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잘 걷는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 우리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대로 주님 앞에 그대로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처럼,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그렇게 조건 없이 형제자매들을,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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