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5.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26
나를 초월하는 선하심(삼상 27:1)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27장입니다. 사무엘기상 27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자기 마음속으로 이르되, 이제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멸망하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빨리 도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없도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지경에서 나를 더 찾다가 나로 인해 절망하리니 내가 이와 같이 그의 손에서 도피하리라, 하고
저는 오늘 “나를 초월하는 선하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여 주시고,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하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하는 대로 우리를 대하시지 않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리를 향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친절과 따뜻함으로 대해주시는가,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사무엘기상 27장부터 29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다윗의 어떠한 상태를 완전히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신 길을 생각하고 또 간증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다가도, 그래도 내가 그때 하나님을 잘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시작하였다가, 나의 탁월한 선택으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초월하는 선하심이 어떤 것인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 말씀에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시편 34편 8절 말씀과 같이,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성경에 나오니까,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가 아니라, 정말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무사히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모든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초월하여 베푸시는 풍성한 선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의 실수
그렇다면 이제 우리 함께 오늘의 본문인 사무엘기상 27장 1절 말씀부터 살펴보시겠습니다. 아둘람 동굴에서 새롭게 주님과 걷기 시작한 다윗,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두 번이나 믿음으로 승리하였던 다윗이 오늘은 믿음에서 멀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절 말씀에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께서 여쭙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으로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의 마음을 따라라, “follow your heart.” 생각대로 하면 된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하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고, 상황적인 논리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무리 깊다할지라도, 말씀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헛된 생각이며, 육신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생각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라고 두 번이나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잠언 14장 12절과 16장 25절 말씀처럼, 사람에게 아무리 좋게 보이고, 옳게 보이는 길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를 때에는 사망의 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육신 안에서 생각을 하면서 “이제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멸망하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윗은 언젠가 자신이 사울의 손에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제 더 나아가서 결론적으로 자신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도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빨리 도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없도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세상의 성공도, 영광도, 명예도, 돈도 아니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내게 없도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2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일어나서 자기와 함께 있던 육백 명과 함께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이제 다윗은 육백 명과 함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갑니다. 자기가 처음에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정신 나간 모습으로 행동하기까지 하였던 바로 그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길로 보였습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주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육신의 선택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해치지 않는 면에서, 영적 시험지를 잘 통과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육신 가운데 걷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든지, 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육신 안에서 주님을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매순간 깨어서 주님과 동하기를 원합니다.
** 가드 땅에서
이제 우리 함께 6,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이에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이 날까지 유다 왕들에게 속하느니라.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한 기간이 만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아기스는 자신의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가드 땅으로 넘어온 적국의 장군인 다윗을 자신의 장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비록 가드 출신의 투사 골리앗을 쓰러뜨린 자였지만, 또 한 면에서는 골리앗을 대신할 만한 장군이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신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시글락이라는 도시에 거하면서, 통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아주 교묘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8-10절을 보시겠습니다.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족속과 게셀 족속과 아말렉 족속을 침략하였는데 그 민족들은 옛적부터 그 땅 곧 네가 수르로 갈 때에 이집트 땅에까지 이르는 땅의 거주민이었더라.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자나 여자나 살려 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디로 길을 내었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의 남쪽과 여라므엘 족속의 남쪽과 겐 족속의 남쪽이니이다, 하니라.
다윗은 블레셋 땅에 거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술 족속과 게셀 족속과 아말렉 족속을 침략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제 더 이상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을 다닐 염려도 없었고, 마음껏 이방 민족들을 토벌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또 잠시의 행복을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아기스가 어디로 길을 내었느냐고 묻자 다윗이 처음 입을 열어서 대답한 장소는 바로 10절에서 보신 것처럼, 유다의 남쪽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이스라엘 유다 땅을 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유다의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있는 블레셋 민족을 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 왕 앞에서 이렇게 교묘히 대답을 하여서, 마치 자기가 이제 이스라엘 유다와 확실히 대적하는 입장이 되었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다윗이 남자나 여자를 살려 주지 아니하여 가드에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하며 이르되, 그들이 우리에 관해 고하여 말하기를, 다윗이 이와 같이 행하였으니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도 이런 식으로 행하리라, 할까 염려하노라, 하니라.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이르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를 철저히 싫어하게 하였은즉 그가 영원토록 내 종이 되리라, 하니라.
다윗은 블레셋의 도시들을 토벌하면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아서, 아무 소식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기스에게는 자기가 마치 유다 땅을 침략한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윗은 아기스 왕의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기스 왕은 이제 철저히 다윗이 자기의 신하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다윗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였고, 앞으로 아주 평안하고 안전히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전쟁의 시작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8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전쟁을 위해 자기들의 군대를 함께 모으므로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확실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싸움에 나갈 것이니라, 하매
2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이 행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반드시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런 까닭에 내가 너를 영원토록 내 머리 지키는 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사울로부터 안전하게 아주 잘 지내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모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기스는 아주 확실히 다윗을 전쟁터에 데리고 나가고자 하고 있었습니다.아기스는 아마도 모든 블레셋 민족들 앞에서, 그리고 온 이스라엘 앞에서 다윗을 자랑스럽게 자신의 신하로서 내세워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앞세워 승리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시점에서 과연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전히 즐겁고 평안했을까요? 다윗은 아주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안전하게 지내보겠다고, 가드 땅으로 건너왔을 뿐인데, 이제 자기가 직접 이스라엘의 형제들을 치고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앞장서서 사울 왕과 싸워야하는 상황까지 예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가드 왕 아기스를 속이면서, 자기 자신이 마치 유다를 치고, 또 이스라엘과 완전히 대적 관계가 된 것처럼 행세를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러 나가지 않겠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꼼짝없는 상황 속에 스스로 갇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선택은 언제나 우리를 더욱 극심한 고생과 고통 속으로 몰고 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장에는 좋아보였는데, 그리고 일시적으로 정말 즐겁고 평안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는 늪과 같이 우리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나를 위하는 길이고, 나를 위한 선택이었는데, 알고 보니,나를 해치는 길이었고, 나를 망하게 하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아서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 길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지혜롭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행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길은 그것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결국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주 태연한 것처럼 아기스 왕에게 응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종이 행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확실히 아시리이다.” 뭔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서 사울 왕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라든지, 온 이스라엘 땅에 블레셋의 깃발을 꼽겠습니다, 라는 분명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종이 행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확실히 아시리이다.” 무엇인가 확신에 찬 말이긴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기에 나름인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다윗은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위기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임기응변과 지혜를 최대한 짜내고 있는 것입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지만, 애써 단호한 척을 하지만, 이렇게 아기스에게 말하고 나서 다윗은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붙잡고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가드 땅에 오지 말걸 그랬나,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이 나갔다가 싸우는 척을 하고 몰래 나올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알아볼 텐데 어쩌지, 사울 왕이 죽게 되더라도 내가 다시 이스라엘에 가면 정말 왕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다윗은 그제서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여쭙지도 않고, 제 생각대로 가드 땅에 넘어왔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다윗은 밤새 한숨도 못자고 주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 거부당한 다윗
이제 우리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시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사무엘기상 29장의 말씀들을 빠르게 훑어보겠습니다. 먼저 2,3절을 보시겠습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의 영주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나아가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후위대에서 나아갔더니
3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통치자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나이까? 하매 아기스가 블레셋사람들의 통치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은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이 여러 날 혹은 이 여러 해 동안 있었으되 그가 내게로 넘어온 날부터 이 날까지 내가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 하니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을 위해 모였을 때에, 블레셋의 영주들은 다윗을 보고 아기스에게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아기스는 여러 해 동안 다윗에게 아무런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었다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4,5절도 보시겠습니다.
4 블레셋 사람들의 통치자들이 그에게 노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의 통치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자를 돌려보내어 그가 왕이 그를 위해 정해 준 그의 처소로 다시 가게 하소서. 그가 우리와 함께 싸움터에 내려가게 하지 말지니 그가 싸움터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염려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자기 주인과 화해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가 아니니이까?
5 그들이 춤추며 서로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던 자가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라.
아기스가 다윗을 변호하는 것을 듣고, 블레셋의 통치자들은 오히려 아기스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전쟁 중에 뒤에서 배신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뒤에서 우리들의 머리를 베고 사울 왕에게 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8-11절을 보시겠습니다.
8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이 날까지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당신이 당신의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들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매
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눈앞에서 하나님의 천사같이 선한 줄을 내가 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통치자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싸움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였나니
10 그런즉 이제 너와 함께 온 네 주인의 신하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너희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밝거든 곧 떠나라, 하매
11 이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예스르엘로 올라가니라.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오히려 큰소리치면서, 어찌하여 내가 가드 왕 아기스를 위하여 싸우러 갈 수 없냐고 서운한 척을 하고 있지만, 정말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면, 다윗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드 왕 아기스가 미안해하면서 다윗을 전쟁으로부터 제외시키도록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육신 가운데 걸으면서 자기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자신이 직접 칼을 들고 이스라엘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이스라엘 형제들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쟁에 안 나갈 수도 없는 정말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윗이 전쟁이 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선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문제를 만들었고, 하나님께서는 해결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사고를 쳤고, 하나님께서는 수습해 주셨습니다.다윗이 지혜롭고 교묘하게 잘 행하였기에 이렇게 좋은 결과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윗은 어리석게 오히려 육신 가운데 걸었지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선하게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선하게 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무사히 잘 살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옳은 선택들을 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 했기 때문에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문제를 만들고, 어려움을 만들어냅니다. 나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어렵게 하고 상처를 주고, 위기를 자처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평안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매일 발걸음마다 긍휼과 은혜로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아기스 왕을 참 잘 속였고, 아주 지혜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주님과 상관없이 거짓되게 육신 가운데 걷는 것이었습니다. 욥기 28장 28절에서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이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결코 지혜롭게 걸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내가 지혜롭고 잘해서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이 풍성하심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살고 있음을 인정하기 원합니다.
우리 함께 시편 92편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을 전하고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전함이 좋사오니
우리의 하루의 시작과 마지막이 이 말씀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인자하심,선하심, 긍휼이 풍성하심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보시면 lovingkindness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은 우리를 사랑과 친절로 대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오늘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하루를 허락하여 주신 선하심과 은혜를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밤마다 주의 신실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의 발걸음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신, 변함없고 신실하신 주님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나의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주님은 변함없이 신실하게 나를 선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참으로 선하게 대하여 주셨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다윗의 어떠한 상태를 완전히 초월하여 베풀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선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선하심은 나의 말과 행동을 기초로 변하게 되는 선하심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초월하시며,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초로 하는 선하심인 것입니다.
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시편 23편을 보시겠습니다. 시편 23편 5,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인생이라는 자기의 잔에 가득 넘치는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도 상을 차리시고 풍성히 먹이시는 주님,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로 나를 따라오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 주님의 준엄하심과 정의로우심과 공정한 심판이라면, 우리는 오늘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살 자격을 얻지 못하고, 무덤에 누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거짓되고, 교만하며, 위선되고, 못나고, 사랑 없고, 허물 많고, 실수도 많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발걸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나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면서 걸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나를 초월하시는 선하심으로 우리를 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더 알기를 원하고, 사랑하기 원하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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