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일시 : 2010.11.14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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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삿 7:2,7)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사기 7장입니다사사기 7장 2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너와 함께한 백성이 너무 많으므로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족속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이 나를 대적하고 자기를 치켜세우며 말하기를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할까 염려하노라.

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내가 물을 핥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족속을 네 손에 넘겨주리니 다른 백성은 다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하시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여러분 혹시 지난 주일오전설교말씀을 기억하십니까지난 주 오전에 저희가 기드온에 대해서 들었는데요기드온이 주님과 교제를 하고 또 순종한 결과로 그 자신이개인이 부흥이 되고그의 가정이 부흥이 되고또 더 나아가서는 온 이스라엘에 큰 회복의 역사가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오늘 저는 지난 주일오전에 들었던 기드온의 이야기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라서 익히 잘 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오늘 저와 함께 다시 이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다오늘 말씀의 제목을 조금 현대적으로 바꿔본다면주님께서 일하시는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주님의 스타일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내 스타일이 아니라하나님의 스타일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 날이 안식일이든그냥 평일이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늘 말씀을 선포하시고 또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자꾸 노동을 하고사람들을 고쳐주느냐고 논쟁을 걸어오고또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위협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분이 누구실까요바로 우리의 주님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또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정말 우리의 주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 분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주님께서 어떠한 약속을 주시면서 만군의 의 열심이 이것을 이루리라”(사 9:7)라고 하신 곳도 종종 볼 수 있구요또 우리 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주의 집에 대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요 2:17)라고 기록한 말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열심히끊임없이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가 있는데요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신데과연 어떠한 방식으로어떠한 스타일로 일하시는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람과 함께 일하신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한 번 살펴보기 위하여 성경구절을 몇 구절 보시겠습니다지금 사사기 말씀에 볼펜이나 끈으로 끼워두시고다함께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고린도전서 3장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하나님의 건물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께서 일하시는 한 가지 방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인데결코 혼자 일하지 않으시고누군가와 함께 일하십니다다시 말하면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또한 몇 장 뒤로 넘기셔서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빌립보서 2장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일하사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뜻을 사람에게도 원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우리가 일하도록 이끄시는 분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몇 장 뒤로 넘기셔서 골로새서 1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골로새서 1장 29절 말씀입니다. “이 일을 위해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분의 활동을 따라 싸우며 수고하노라.” 이 구절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수고했던 사도 바울이 고백한 간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하나님께서 바울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셔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따라서 싸우며 수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십니다또한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사람에게 원하는 마음도 주시고또 행하게도 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따라 싸우며 수고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생각해 볼 필요성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는데요먼저우리는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구요또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요그냥 아무하고나 함께 일하실까요?

 

오늘날 세상에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또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정말 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일까요우리도 많은 경우 나는 지금 주님의 일을 섬기고 있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정말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을까요다함께 마태복음 7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마태복음 7장 22절과 23절을 보시겠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너희는 내게서 떠나라하리라.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사람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여기서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한 많은 일들이 주님과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대언도 하고마귀들도 내쫓고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주님과는 상관이 없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이 사람들은 모두 정말 자신이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오히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살펴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또한 우리가 늘 깨어서 정말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섬기고 있는지를 늘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주님과의 교제순종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요우리가 오늘 기드온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지난 주 말씀에서도 들었듯이하나님께서는 주님 자신과 교제하는 사람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기드온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서기드온과 함께 일하실 수 있었습니다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된다면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면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자신의 일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데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뜻인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데,자신의 유익과 인기를 위한 일일 때도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하면서자기 스타일과 자기주장대로 길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요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같이 기드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부족한 사람들

이제 우리가 다시 사사기 7장으로 돌아와 보시겠습니다하나님께서 오늘 기드온과 또 삼백 명의 용사를 직접 선택하셔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한번 사사기 7장의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너와 함께한 백성이 너무 많으므로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족속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이 나를 대적하고 자기를 치켜세우며 말하기를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할까 염려하노라.

지금 여기서 기드온과 함께한 이스라엘 군사의 수는 모두 3만 2천명이었습니다그리고 3만 2천명이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미디안 족속의 수는 12절에 나온 것처럼메뚜기같이 많고해변의 모래같이 수없이 많았습니다우리가 3만 2천명이라는 이스라엘의 수와 해변의 모래같이 수없이 많았다는 미디안의 수를 잠시만 떠올려 봐도 해변의 모래가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이 전쟁은 이길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왜냐하면 이 전쟁을 이기고 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내가 해냈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결코 잘 갖추어진 자신 만만한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왜냐하면 그 일을 잘하고 나서 내가 해냈다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니까 이런 걸 순종하지.”, “나니까 이런 일도 섬기지.”, “우리 정도 되니깐 이런 일이 가능하지.” 이렇게 자기를 치켜세우면서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요하나님께서는 결코 지혜가 너무 많고능력이 너무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실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부족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어서 늘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모든 일들을 온전히 잘 섬기고 나서, “주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주님은 부족한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자원하는 사람들

또한 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가서 백성의 귀에 선포하여 말하기를누구든지 두렵고 무서운 자는 길르앗 산에서 일찍 떠나 돌아가라하라하시니 백성 중에서 돌아간 자가 이만 이천 명이요남은 자가 만 명이더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을 선택하기 시작하십니다먼저 기드온을 그들의 리더로지도자로 세우셨구요이제 3만 2천명 중에서 그들이 전쟁을 이기고 나서도 우리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그들의 숫자를 약화시키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기시기 전에 우리를 약화시키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지 않고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우리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할 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치시고 무너뜨리셔서 우리 자신이 정말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십니다우리가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지런히 다듬으셔서 우리가 정말 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십니다이렇게 우리가 약해지고 약해져서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능력이며 소망이라고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고백하고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에서 누구든지 두렵고 무서운 자를 돌려보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말하자면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결코 억지로 일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주님께 자신의 시간과 힘과 물질을 드리고자 하는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셔서 부디 나와 함께 일해다오.”하면서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일을 시키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자원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자원함이 부족할 수도 있고적을 수도 있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원하는 만큼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주님께 나아오고주님께 드리고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억지로 힘겹게 많이 섬기고 나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보다자원함과 기쁨으로 조금이라도 섬기고 나서 감사하는 것이 훨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앞에서 살펴본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처럼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서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가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우리가 조금씩 주님을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의 주님을 향한 자원하는 마음도 더 커지고깊어질 것입니다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깨어있는 사람들

이제 3만 2천명에서 2만 2천명이 돌아가고이제 딱 만 명이 남았습니다지금 남은 만 명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싸우러갈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직도 백성이 많으니 더 줄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다. “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아직도 백성이 많으니 그들을 데리고 물로 내려가라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내가 누구를 가리키며 네게 말하기를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못하리라하면 그는 가지 못할 것이니라하시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을 선택하시기 위하여 한 시험문제를 주십니다. 5절과 6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그가 백성을 데리고 물로 내려가매 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너는 개가 핥는 것 같이 자기 혀로 물을 핥는 모든 자를 따로 세우고 또 무릎을 꿇고 마시는 모든 자도 그와 같이 하라하시더라.

손을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나머지 모든 백성을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은 칼싸움 대결이나 달리기 시합이 아니었습니다또는 팔씨름이나 레슬링도 아니었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은 바로 물을 마시는 시험이었습니다물 마시는게 전쟁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엉뚱하게 물 마시는 것으로 시험을 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어쨌든지 이 시험을 통해서 300명과 9700명이 구분이 지어졌습니다그렇다면 이 300명과 9700명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전에 어떤 제품의 광고 문구 중에 이런 유명한 문구가 있었는데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 이런 말 혹시 들어보셨나요명품과 일반 제품의 차이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다매우 맞는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여기에 물을 마시러 온 만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이제 전쟁을 하려고 모인 만 명의 군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집 떠나면 고생이라고벌써 몇날며칠을 무거운 무기와 짐을 들고 행군하면서 지치고 힘든 이스라엘 군사들입니다.밤에는 잠자리도 불편하고 산에 모기들도 많았겠죠또 언제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했을 것입니다뜨거운 태양 아래 산과 골짜기를 오가면서 배도 고프고 갈증도 많이 났을 것이구요이제 기드온이 군사들을 이끌고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약수터처럼 바가지도 없고개인 물통이나 컵도 없는 상황입니다.

 

매우 갈증이 심했던 군사들은 신나서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그런데 여기서 보시면 9700명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자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물은 땅보다 낮은 곳에 있습니다이제 군사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이제 양손은 앞으로 엎어지지 않도록 물가에 받쳤을 것이고요얼굴은 땅보다 더 낮은 물에 입을 대기 위해 쑥 낮아졌을 것입니다엉덩이는 다소 올라가고 얼굴은 내려가서 물가에 입을 댄 이런 자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300명은 손에 입을 대고 개가 핥는 것 같이 자기 혀로 물을 핥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말하자면무릎을 꿇지 않고얼굴을 물가로 내리지 않고손만 물에 담갔다가손으로 물을 퍼서 입에 가져오는 방식으로 물을 마신 것입니다.

혹시 제가 이렇게 설명한 것을 들으시고 나서도 물 마시는 모습이 잘 와 닿지 않으시는 분들은 제가 뒤에 게시판에 붙여놓은 그림을 한 번 보시면 참조가 되실 것입니다.

 

여기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보신 것은 무엇일까요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뽑으실 때 전투 경험이나얼마나 칼을 잘 다루는지얼마나 잘 싸우는지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그들이 얼마나 깨어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던 사람들은 온 마음이 자신의 갈증과 물에 가 있었습니다그들의 무릎은 갈증 앞에 꿇려 있었고그들의 시선은 물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먹은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습니다얼굴을 물가에 박고 물을 마신 사람들은 빨리 물을 많이 마셨겠지만손으로 물을 떠서 핥은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 마시지는 못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았던 300명의 용사들은 자신들이 전쟁 가운데 있으며언제든지 적들이 습격할 수 있고특별히 긴장이 풀어진 물가에서 더 그럴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깨어있는 300명의 용사들을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내가 물을 핥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족속을 네 손에 넘겨주리니 다른 백성은 다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하시니라.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실까일상생활의 중요성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우리의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십니다또한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분이십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능력이 많고 지혜가 많아서 하나님 없이도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일을 맡기시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약하고 부족해서 늘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니다우리가 너무 강하며 약화시키시고 우리를 낮추셔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 마치 칼싸움 실력을 보지 않으신 것처럼사람의 지식이나 기능을 보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 마치 물 마시는 모습을 보신 것처럼어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모습을 보십니다.

우리가 갈증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십니다우리의 삶에서 갈증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건강 문제돈 문제직장 문제사람들과의 관계 문제진로 문제 등등 여러 가지 갈증의 모습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그럴 때 우리는 무릎을 꿇고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 온 시선과 자세를 집중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깨어있다면 갈증을 해결하면서도 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우리가 진정 가야할 길은 무엇인지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어 일하신다.

마지막으로 20절부터 22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 세 무리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등불을오른손에 나팔을 들고 불면서 외치되의 칼이라기드온의 칼이라하고는

21 각 사람이 진영의 사방에서 자기 자리에 서매 그 온 군대가 달려가고 부르짖으며 도망하더라.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께서 그 온 군대에서 두루 각 사람의 칼이 그의 동료를 치게 하시므로 군대가 도망하여 스레랏의 벧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과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제 우리는 삼백 명의 용사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하였는지 보게 됩니다삼백 명의 이스라엘 군사와 해변의 모래같이 수없이 많은 미디안 군사가 전쟁을 합니다이스라엘의 무기는 나팔과 항아리와 등불과 외침이었고단순히 자기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도 안 되는 무식한 방법으로 전쟁에 임하였던 것입니다.그랬더니 그 결과는 대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 수준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시고, “주께서 하셨다라는 찬양과 감사의 기쁨을 주시기 원하십니다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단순히 주님께 순종하였을 뿐입니다자신의 판단이나자신의 주장이나자신의 지혜를 전혀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정리

하나님은 만군의 주의 열심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가 너무 강하고 지혜로울 때에는 우리를 다듬으시고 약화시키시고 겸손하게 낮추셔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증을 해결하는 일에만 빠지지 않고늘 우리의 사명을 깨어서 기억하며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때에 사람의 모든 판단과 가능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삼백 명의 용사가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전쟁한 것처럼우리 교회 모두가 사랑함으로 하나 되어 똘똘 뭉치기를 원하십니다우리 교회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주님을 따르게 될 때에 주님께서 사람의 상식을 거뜬히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을 우리 안에 주시리라 믿습니다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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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 2010.10.24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여호와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창 22:7-8)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입니다창세기 22장 7절과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내 아버지여하니 그가 이르되내 아들아내가 여기 있노라하매 이삭이 이르되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내 아들아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하고 이처럼 그 두 사람이 함께 가서

 

또한 14절도 읽어보겠습니다.

14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하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부족함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친구이자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또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2장 말씀은 어찌 보면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일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성경 속에 기록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곧 예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여기서 나온여호와이레라는 단어는 많은 분들이 익히 아시겠지만히브리말로 예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온전히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질그릇처럼 만들어진 사람의 마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을 때만이 가득 찰 수 있고 충만할 수 있습니다많은 돈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건강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좋은 가족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명예와 인기를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성공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족함과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끊임없는 문제와 부족함 속에서 허전하고 공허한 인생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예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아브라함을 위하여아브라함의 인생에 예비하신 것이 무엇일까요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바로 아들이 없는 부족함을 예비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세계 4대 문명의 발달지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부모님과 형제들과 조카들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많은 가축들과 종들을 거느리면서 살았습니다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부족함이 있었습니다그것은 바로 족보를 이어나갈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모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부족함을 아브라함에게 예비하셨습니다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그러한 부족함을 통하여 참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부족함이 있고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돈이 부족한 것도 문제입니다건강하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직장 문제도 있습니다자녀들도 문제입니다한 번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옵니다또 한 번 어떤 부족함을 채워서 만족했다 싶으면 또 다른 부족함결핍이 생겨납니다오늘 우리가 주님을 찾게 된 이유는 우리가 모두 부족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모든 면에서 만족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이처럼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부족함을 예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찾게 하시고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들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이곳에 아들을 가진 부모님들께서 많이 계신데요정말 아들이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며 사십니까아들이 두 명세 명 있으신 부모님은 그 아들로 인해서 만족이 세 배기쁨이 세 배이신가요아브라함은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아들 하나만 있으면 정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우리도 때로는 어떤 문제만 해결되면어떤 것 하나만 가지면 정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을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전도서 1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

또한 전도서 6장 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완전히 만족하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아브라함에게 주기 원하셨고오늘 우리에게도 주기 원하십니다상황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그런 일시적인 만족이 아닌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만족하는 참된 행복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은혜를 예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실패하고 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가족과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온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습니다또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정을 하란에서 멈추고 자신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냥 머물러 지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족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그 때에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신의 조카인 롯을 데리고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만약 아들을 주지 않으시면 조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아브라함은 또 다시 기근이라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아브라함은 파라오가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아내로 취할 것이라 생각하고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오히려 그 결과로 파라오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 약속하셨지만아브라함은 자신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무사히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고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는속으로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그리고 그 후에는 또 다시 아비멜렉의 땅에서 사라가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일생은 실패와 의심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가득하였습니다아브라함은 늘 하나님을 의심하고 실패하고 넘어졌지만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인도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시도하다가 오히려 위험을 맞이했지만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결국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지만아들을 주신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아브라함의 일생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바로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우리는 늘 주님을 떠나서 방황하며 우리 자신이 원하는 길대로 다녔지만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보호하시고가장 좋고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우리는 교만과 거짓과 이기심 가운데 살았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긍휼로 대하셨습니다또한 우리는 걱정과 염려와 의심 가운데 살았지만하나님께서는 늘 신실하고 또 세심하게 우리의 필요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전에 제가 아이들에게는 종종했던 간증이 있는데요바로 제가 훈련소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저는 공익근무를 해서 한 달 동안만 훈련을 받았는데요그 짧은 한 달 동안에도 먹고 싶은게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처음에 군대밥을 보면서 옆 사람에게 이거 완전 개밥 아니냐.”라고 하면서 거의 먹지 않던 사람도 저녁에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그리고 주말이 되면 이제 훈련소 내에 기독교천주교불교 이렇게 종교 활동을 하는데요사람들의 화제는 어디서 무슨 음식을 주는가입니다불교에서는 햄버거 준다더라천주교는 컵라면 준다더라 하면서 어느 종교 행사를 갈지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너무나 치킨이 먹고 싶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저 치킨 먹고 싶어요.”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그런데 이제 그날 점심시간이 되어서 군가를 부르면서 점심식사를 기다리는데 마침 반찬이 닭튀김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와 진짜 하나님 좋다.”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어차피 두 조각 정도만 할당 될 것이기 때문에 크게 기쁜 마음이 들진 않았습니다그런데 갑자기 무슨 작업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저를 포함한 여덟 명 정도가 불려가게 되었습니다작업을 다 하고 나서 돌아왔는데 이미 배식이 다 끝나고 식당이 완전히 정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교가 치킨 두 바구니를 가져와서는 책임지고 다 먹으라고 주는 것이었습니다그때 정말 배터지게 치킨을 먹으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저 같은게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고 공급해 주십니까?” 치킨을 먹었다는 자체도 기쁘고 감사했지만하나님께서 세심하게 예비하신 모든 상황들을 볼 때 더욱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오늘날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입니다우리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며우리에게 공급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예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2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 21절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에 이 정한 때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더불어 세우리라.” 하신 것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삭과 더불어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늘 실패하고 의심하던 아브라함이 드디어 여기서는 드디어 믿음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과 언약을 맺으리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다함께 히브리서 11장을 보시겠습니다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이 말씀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의 독생자를 바쳤느니라.

18 이 아들에 관하여는 그분께서 전에 이르시되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으리라하셨느니라.

19 하나님께서 심지어 죽은 자들로부터 능히 그를 일으키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또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여기서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이삭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는 정확한 모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2장으로 돌아와 보시겠습니다창세기 22장 5절을 보시면여기서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부활의 믿음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청년들에게 이르되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무르라나와 아이는 저기에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하고는” 아브라함은 분명히 나와 아이가 경배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 7절과 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내 아버지여하니 그가 이르되내 아들아내가 여기 있노라하매 이삭이 이르되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내 아들아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하고 이처럼 그 두 사람이 함께 가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굳게 믿고흔들림 없이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의 앞길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예비하셨습니다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거나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예비하려했다면 결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것을 믿고 단순히 순종하였을 때 큰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함께 창세기 22장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6 이르되가 말하노라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곧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하니라.

 

믿음의 순종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우리는 여기서 맹세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말로 약속하시고또 짐승을 쪼개는 언약도 맺으셨지만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이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우셨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여 복을 주고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정말 주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아들을 빼앗기는 아픔이었을까요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하면서 복을 주고 복을 주는 것이었을까요?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다함께 로마서 8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죄 많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영원 전부터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삭이 나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던 그 모습 그대로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에 오르셨던 것입니다우리는 아무것도 받은 자격이 없었고오히려 멸망에 떨어져야 합당한 죄인들이었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또 한 구절만 더 보시겠습니다고린도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함과 같으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현재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제 영원한 왕국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어마어마한 것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사람이 눈으로 보거나귀로 듣거나마음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것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늘 영광과 존귀를 꿈꾸는 사람조차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놀라운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영광과 존귀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하여 부족함도 허락하셨습니다또한 아브라함이 넘어지고 실패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은혜와 긍휼을 예비하시고 공급하셨습니다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예비하시고피할 길도 예비하셔서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복을 맹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부족함을 예비하셨습니다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예비하시고 공급하여 주셨습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시험들을 예비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시험들을 잘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아니라 바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과 존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그분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가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모든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다만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첫째로 구할 때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모형을 볼 수 있었습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시험 가운데 있을 때에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전진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모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내가 예비하는 방법이나내가 마련하는 길들을 다 내려놓고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에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고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까지 내주신 우리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오늘 인도하고 계십니다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더 자라나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우리가 늘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설교 일시 : 2010.07.25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http://robinbox.net

 

내가 사모할 자(시 73:25-26)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73편입니다시편 73편 25절과 26절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하오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시요영원토록 내 몫이니이다.

 

오늘 저는 내가 사모할 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아삽

오늘 우리가 침례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에 대한 귀한 간증을 듣고 주님을 함께 찬양했는데요주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가 시편 73편을 통해서 아삽이라는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고자 합니다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볼 때, “시편 73편처럼 성경의 한 챕터 전체에 걸쳐서 이렇게 솔직담백하게 기록해 놓은 간증문이 또 있을까?” 할 정도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73편은 매우 흥미진진한 간증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면 먼저 간증을 살펴보기 전에 이렇게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간증문을 기록해 준 아삽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도대체 이 아삽이 누구길래 이렇게 시편도 기록했을까요?

 

다함께 역대기상 16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역대기상 16장의 상황은 다윗 왕 시대에 석 달 동안 오벳에돔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주의 언약궤를 다시 다윗의 도시로 옮겨오고 나서 큰 축제를 벌이고 있는 상황입니다이제 4절을 보시면, “또 그가(다윗 왕이) 레위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을 임명하여 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는데 그 우두머리는 아삽이요...”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레위 지파의 찬양 대장이 바로 시편 73편을 기록한 아삽입니다.

 

또한 역대기상 16장 37절을 보시면 이처럼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거기에 의 언약 궤 앞에 남겨 두어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필요한 일에 따라 그리하게 하였고

또 찾아보지는 않겠지만 역대기상 25장에 보면 그 장 전체가 다윗 시대의 음악가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아삽의 네 명의 아들들까지도 왕궁의 찬양대에서 심벌즈와 비파와 하프를 연주하기도하고노래를 부르기도 하고또 대언을 하기도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아삽이라는 사람은 왕이 직접 임명한 왕궁의 찬양 대장이기도 했고주의 궤 앞에서 섬기는 직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그의 아들들까지도 찬양대를 함께 구성할 만큼매우 신실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과연 이런 사람에게 어떤 고민거리나 간증거리가 있을까요직업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고그 월급은 왕이 보장해주고또 자녀들도 함께 그 일을 하면서 가정도 아주 화평할 것으로 보이는 아삽인데요... 아삽이 그냥 특송 한곡을 부르고 내려갔을지아니면 과연 무슨 간증을 했을지한번 시편 73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실족할 뻔

시편 73편 1절부터 3절까지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곧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도다.

그러나 나로 말하건대 내 발은 거의 지나갈 뻔하였고 내 걸음은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사악한 자의 번영을 보고 어리석은 자를 부러워하였기 때문이로다.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섬겼던 아삽이 지금 매우 뜻밖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조금 쉽게 풀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게 맞습니다맞는데그런데내가 보니까 꼭 사악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 같고어리석은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얼마나 부러운지... 하나님은 오히려 나같이 마음이 깨끗한 자는 너무 신경도 안 쓰신다... 뭐 이런 생각이 들어서 거의 실족할 뻔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있으시죠저도 있습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주님께 나의 온 일생을 전폭적으로 드린답시고 이렇게 걸어온 길이 정말 잘된 것인가그런데 현재 나의 모습은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지 않은가나는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모아놓은 돈도 없고... 도대체 나는 뭔가?”

때때로 세상 사람들을 보면 정말 사악하게 행하면서도 번영하고 또 어리석게 행하는데도 잘 나가는게 신기하고 부럽게 보이기도 합니다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4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조이는 끈이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며

다른 사람들같이 고난 중에 있지도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같이 재앙을 당하지도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사슬처럼 그들을 두르고 폭력이 옷처럼 그들을 감쌌도다.

그들의 눈은 기름져서 솟아오르고 그들이 가진 것은 마음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으며

그들의 부패한 자로서 학대하는 것에 관하여 악하게 말하고 거만하게 말하며

 

아삽이 살던 시대의 세상이나 오늘날의 세상이나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하나님과 동행하던 다윗이 통치하던 세상에도 이랬는데오늘날의 세상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오늘날 우리는 성실하면 손해를 보고정직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사납지 않으면 무시를 당하고공격적이지 않으면 피해를 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특히 우리 한국 사회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을 억누르고 일어서야만 하는 삭막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선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고악하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번영과 재물이 넘치는 같은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남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 것을 베푸는 사람은 점점 가난해지고오히려 남을 괴롭히고 빼앗는 사람은 점점 번영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아삽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속이 상하고 믿음이 실족할 뻔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보라이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로되 세상에서 형통하며 재물을 불리는도다.” 이렇게 이 세상은 뭔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수많은 불신자들이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는가?” 또 많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이번에 기도도 열심히 하고교회도 잘 나왔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성공을 주시지 않고 고난만 계속 주실까?” 저도 최근에 그런 생각을 좀 했었는데요. “왜 다른 집들은 다 집이 잘 빠져서 이사를 가는데 왜 우리 집만 안 빼주시나지금 얼마나 할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데지금 다음 달이 결혼인데 왜 그걸 안해주실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을까요있습니다.

 

우선 계속해서 13절부터 1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무죄함 속에서 씻은 것이 참으로 헛되니

14 내가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계를 당하였도다.

15 내가 만일 이르기를내가 이렇게 말하리라하면보소서내가 주의 자녀들의 세대를 향하여 죄를 지으리이다.

 

제 생각에는 왕궁에서 임명한 찬양 대장이라면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 같은데 무슨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나하고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요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정말 솔직하고 또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진짜 인생 헛살았다매순간 주님만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하는게 다 무슨 소용이야?저기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다 잘나가는데나는 무슨 아침마다 종일토록 고생이고... 차라리 나도 죄짓고 즐길거 다 즐기고 사는게 낫겠네.”

 

이제 아삽이 아주 그냥 갈 데까지 가는 것 같습니다우리도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부당한 일을 당할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사악한 자들이 잘되고 번영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이 매우 답답하고 속상하기도 합니다믿음을 저버리고 내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그러나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할지라도 이내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공허하고 어둡고 답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고 만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하나님 외에 다른 세상의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켜줄 수가 없습니다.

 

다함께 시편을 손가락으로 끼시고예레미야 애가 3장 22절과 23절을 보시겠습니다.

22 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였나니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은 끝이 없도다.

23 그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은 크시나이다.

 

사악한 자들의 번영을 보며 부러워했던 아삽에게는 하루하루가 재앙과 같았고 아침마다 징계를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던 예레미야에게는 하루하루가 주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이며 아침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소멸되지 않고 숨을 쉬며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긍휼이며 불쌍히 여기심입니다매일 아침 우리가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인 것입니다이렇게 아삽이 분을 내며 차라리 죄를 맘대로 지으며 사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 이 순간에도 주님은 여전히 아삽을 불쌍히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얼마나 긍휼로 대하셨습니까자기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내어주시기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셨기에 우리가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긍휼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종말

다시 시편 73편으로 돌아오셔서 16절부터 2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6 내가 이것을 알려고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너무 심한 아픔이 되었는데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분명히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그들을 던지사 파멸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19 그들이 어찌 그리 순식간에 황폐하게 되었나이까그들이 두려움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나이다.

20 오 사람이 깬 뒤에 꿈을 멸시하는 것같이 주께서 깨시면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아삽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나와 비교하자니 나의 삶이 너무나 비참한 것 같고그렇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믿음을 저버리자니 그것도 마음이 힘들고양쪽에 끼어서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마음의 큰 답답함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비로소 자신이 부러워했던 사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종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끝나는 순간 그들은 성경에 경고되어있던 그대로 심판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지난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저는 어쩌다가 꿈속에서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 엄마가 깨워서 못 먹은 적이 있습니다또 한 번은 제가 꿈에서 카레이서가 되어서 경주를 시작하고 있는데계속 시작만하고 차가 출발을 안하는 겁니다그때 깨고 보니 울렸던 알람시계가 자동차 모양으로 계속 경주 시작하는 소리만 나는 알람이었습니다아무튼 꿈은 그냥 깨면 사라져 버립니다.

지금 아삽은 사악한 자들의 번영이 바로 그렇게 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번영과 재물과 형통함이 마치 허상과 같아서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삽의 돌이킴

이제 21절부터 2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1 이와 같이 내 마음이 괴로우며 내가 내 속 중심에서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어리석고 무지하므로 주 앞에 짐승 같았사오나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께서 주의 권고로 나를 인도하시고 나중에는 영광으로 나를 받아주시리니

 

아삽은 사악한 자들의 번영을 보면서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재물을 불리는 것을 보면서 믿음이 실족할 뻔하였습니다아삽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다시 주님을 찬양하고기도하며하나님의 말씀을 듣고형제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먼저 그는 꿈처럼 사라져버릴 이 세상의 헛된 영광과 재물을 갈망했던 자신의 마음에 대해 괴로움과 찔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아삽은 자기 자신을 어리석고 무지한 짐승과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이것은 짐승들이 먼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특별히 양 같은 경우는 풀을 먹을 때 뿌리까지 다 씹어 먹는다고 합니다뿌리를 남겨둬야 그 윗부분이 다시 자라서 다음번에 올 때 또 다시 풀을 먹을 수가 있는데이 어리석고 무지한 양들은 현재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뿌리까지 다 먹어치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주고 계시는데어리석은 우리는 현재의 안락한 삶과 행복과 재물과 영광을 위해 시간을 다 허비하여영원한 영광을 거두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던 아삽은 24절에 나온 것처럼 주님께서 현재 자신을 주의 권고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하나님께서 마치 사악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번영하도록 인도하시고자신은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처럼 생각했었는데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의 권고로 인도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우리도 때로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을 때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가정말 내 기도를 듣고 계신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불같은 시련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주의하여 보고 계심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만드는 과정 중에 가장 질그릇에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 바로 질그릇을 불에 구울 때라고 합니다가장 정확한 시간에 불 가운데서 꺼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 보고 있다고 합니다오늘 우리의 고난은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부드러운 손길임을 이해해야 합니다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좋은 것을 주시며언제나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신뢰하기 원합니다.

 

또한 24절 뒷부분에서는 나중에는 영광으로 나를 받아주시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바로 이 영광이 우리가 도착하게 될 종착점입니다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그것은 바로 참된 안식과 영광입니다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번영과 성공은 잠시 잠깐 뿐이지만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비록 현재는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결국 우리가 가게 될 종착점은 안식과 영광인 것을 기억하고 힘을 내기 원합니다우리가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할 때하나님은 불공평한 것 같고 우리를 부당하게 대우하시는 것 같지만우리가 영원을 생각할 때 오늘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영원한 그림을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처럼우리도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 속에서 용기를 내고 힘을 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사모할 자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의 말씀, 25절과 26절에 이르렀습니다.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하오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시요영원토록 내 몫이니이다.

 

만약 아삽이 항상 번영하고 형통하고 성공했다면 이런 고백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만약 아삽의 마음에 너무 심한 아픔이나 괴로움이나 찔림이 없었다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아마도 아삽은 이 세상에 사모할 만한 수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었을 것입니다처음에는 아삽도 세상의 재물과 번영을 사모했을 것입니다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함을 갈망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이제 그는 주 외에 사모할 자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삽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셔서 아삽으로 하여금 오직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주님만 사모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비록 육체와 마음이 쇠약할지라도 하나님을 마음의 힘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세상의 재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영원한 자신의 몫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고백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가 있습니다오늘 주님만이 우리를 만족시키실 수가 있습니다사람들의 찬사와 인정이나 성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오늘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오늘 아삽이 시편을 통해 고백한 간증과 같이 우리도 오직 주님만 사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73편의 마지막 구절을 한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이 내게 좋사오니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므로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밝히 보이리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오직 주님만을 신뢰하기 원합니다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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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 2010.05.30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http://robinbox.net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출 29:42-46)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29장입니다출애굽기 29장 42절부터 46절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42 이것은 너희 대대로  앞에서 회중의 성막 문에서 항상 드릴 번제 헌물이니라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거기서 네게 말하리라.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인하여 성막이 거룩히 구별되리라.

44 내가 회중의 성막과 제단을 거룩히 구별하며 또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다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의 직무로 나를 섬기게 하리라.

45 내가 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그들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니라.

 

오늘 저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출애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이라도 읽어보신 분손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감사합니다보통은 출애굽기를 안 읽어보셔도 모세라든지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라든지이러한 모습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익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그래서 출애굽기가 상당히 재미있는데요문제는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이제 뒷부분에 가서는 조금씩 지루해 집니다이제 뒤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수많은 율법의 항목들이 나옵니다또 성막과 그 안에 있는 온갖 기구들언약궤라든지금향단이라든지빵을 차려놓는 상이나금촛대물두멍놋제단 등등 수많은 기명들의 치수와 재료에 대해 나옵니다그리고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또 제사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또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하는 다양한 사실들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압제와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고 불러내신 것일까요또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짓게 하신 것일까요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데요. 42절에 보시면 중간에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또 43절에서도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리니” 우리 어린이 친구들은 만나고와 만나리니에 동그라미 쳐주시기 바랍니다또한 45절에 보시면 내가 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거하여”, 46절에서도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찬가지로 거하여”, “거하려고” 이 단어들에 동그라미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이유를 딱 한 단어로 말하자면 뭐가 좋을까요교제또는 동행이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항상 만나고 대화하면서 교제를 나누고 동행하시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성막 안에 거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교제하고 동행하기 원하셨을까요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특별히 의롭고 선해서 그랬을까요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보다 지혜롭기 때문일까요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많고 강하기 때문일까요다함께 여기 출애굽기 말씀을 손가락으로 끼시고 신명기 7장을 보시겠습니다신명기 7장 6절부터 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니라 네 하나님께서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 위로 너를 높여 자신에게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께서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

다만 께서 너희를 사랑하셨으므로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시므로 께서 자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데리고 나오시고 너희를 노예들의 집에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구속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네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이시요신실한 하나님이신 줄 알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노예의 집에서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고 뛰어나서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거룩한 분이십니다지금 여기 신명기 7장 6절에서도 거룩이란 단어가 나오고 있는데요다시 출애굽기 2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43절과 44절에 보시면 역시 거룩히 구별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반면 사람은 어떻습니까여기서 거룩하신 분 계시면 손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거룩하다’ 사람은 거룩하지 못합니다사람은 죄가 많고 더럽습니다욥기 15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하물며 불법을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가증하고 더럽겠느냐?” 물 없이 살 수 있는 분 계신가요우리는 불법을 물 마시듯 하는 사람입니다그런데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죄 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으라고 하신 성막은 이스라엘 전체 진영의 정 가운데 있었습니다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성막 주변에 장막을 쳤습니다.

 

몇 년 전에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요한 노숙자가 옆으로 지나갔습니다저는 그때 지금 현재까지도 느껴보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꼬랑내를 맡게 되었습니다저는 지하철 문 앞에 서있었고 그 노숙자는 그냥 지하철 한가운데를 지나갔을 뿐인데요저는 그 사람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갑자기 송곳으로 코를 콱 찌르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무슨 냄새인지 뒤를 돌아보았더니노숙자가 지나가고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틀어막았습니다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예 일어나서 다른 칸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약 저보고 그런 냄새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가운데서 딱 한 시간만 서 있으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면요... 얼마 줄거냐고 액수를 물어보고 아주 신중하게 고려해 볼 것 같습니다저는 또 코가 안 좋기 때문에요...

우리는 늘 죄와 불법의 꼬랑내와 악취를 뿜어내는 사람들입니다피차 문제가 많은 우리들끼리 봐도 정말 서로 실망하고 상처주고 시기하고 다투고 할 정도로 우리는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그런데 우리보다 기준이 더 높으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한가운데 거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육신의 장막 안에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우리 자매님들 화장품 사시면 샘플 꼭 챙겨 받으시죠저도 연지 자매를 따라 몇 번 스킨푸드 같은 곳에 가봤는데꼭 뭐 하나 사면 작은 거라도 샘플을 주더라구요샘플은 본 제품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샘플을 써보고 좋으면 제품을 하나 사라고 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요이제 어떻게 보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지었던 성막도 하나의 샘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가운데 거하시려고 지으셨던 성막이 진정 보여주고자 하는 주인공은 누구일까요바로 예수님이십니다다함께 요한복음 1장으로 가보실까요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또 3절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지금 요한복음은 마치 창세기처럼 태초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곧 말씀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이제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그들의 한 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 위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신 것처럼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사람들 한 가운데 거하신 사실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또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장 23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보라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시간과 공간의 아무런 제약이 없으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전능자 하나님께서친히 배고프고 피곤하며 연약한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냄새나는 마굿간에서더러운 말구유에서 그렇게 태어나신 것입니다하늘의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친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사람의 장막을 입으신 하나님께서는 양을 잃은 목자가 자기 양을 찾아다니는 것처럼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불쌍한 영혼들을 만나시고대화하시고고쳐주셨습니다시간만 나면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논쟁하였던 한심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어주시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던 세리들과 죄인들의 집에 손님이 되어 가셔서 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함께 우셨습니다예수님은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시고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우시면서 사람들과 동행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장막을 입고 내려오신 가장 큰 목적에 대해 보시겠습니다다함께 히브리서 10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히브리서 10장 10절을 보시겠습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또한 1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밤에 잡아서 문의 기둥에 뿌렸던 어린양의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샘플이었습니다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놋제단에서 드렸던 수많은 짐승의 피와 헌물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샘플들이었습니다우리는 거룩이란 단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죄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우리는 교만하고 위선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나의 욕심과 자랑을 위해 살아왔습니다나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아왔습니다그러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셨습니다단 한 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화해헌물로 드리시고 우리를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습니다우리 자신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하나님께서 다 해주셨습니다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셔서 그들 한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신약시대에 와서 직접 육신의 장막을 입고 내려오셔서 사람들 가운데서 거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셔서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이스라엘과 만나는 장소로 성막이 세워졌고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으로 건축되었습니다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은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거하실까요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2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첫 번째는 우리 각자의 몸 안에 계시고두 번째는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즉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먼저 제가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9 도대체 무슨 말이냐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몸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더럽고 죄가 많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씻으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사시는 것입니다한 형제님께서는 우리는 단순히 교회 다니는게 아니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그리스도인이 술담배마약문신 이런 것을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이 몸이 이제 내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자신의 피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이제 우리의 인생은 나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제하며 동행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주어야 할 가장 행복한 삶의 가치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샘플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몸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임 가운데즉 교회 가운데 함께하십니다다 같이 마태복음 18장을 보시겠습니다마태복음 18장 20절을 보시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교회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입니다바로 우리가 교회입니다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모일 때에 주님은 여기에 우리의 한가운데 계십니다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사랑을 한없이 공급받고 누릴 수가 있습니다우리 각자가 집에서 혼자서도 찬송할 수 있고기도할 수 있고성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은혜를 누릴 수도 있고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교회로 모였을 때 주시는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약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강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우리 각자는 부족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풍성할 수가 있습니다우리 각자는 냉랭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울 수가 있습니다우리 각자는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한 구절 앞으로 가셔서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 중의 두 사람이 자기들이 구할 어떤 것에 대하여 땅에서 한마음이 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행하시리라.

우리 어린이들은 한마음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해주세요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사모하는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우리 각자의 기도는 약할 수 있지만우리가 함께 한마음이 되어 하는 기도에는 권능이 있습니다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마다한마음이 되어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주님의 임재하심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교회 가운데서의 섬김

이제 마지막으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막을 지으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겼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구약시대의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샘플이 될 수가 있는데요우리는 성막을 건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교회에서의 섬김이 또한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다 같이 출애굽기 36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읽어보겠습니다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그때에 브살레엘과 아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자 곧 께서 지혜와 명철을 주사 성소에서 섬기는 데 필요한 온갖 일을 할 줄 알게 된 자들이 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일을 하니라.

모세가 브살레엘과 아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자 곧 께서 마음에 지혜를 주신 자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와서 그 일을 하려 하는 자를 다 부르니라.

그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가져온 모든 헌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아침마다 자원하는 헌물을 가져오므로

성소의 모든 일을 행하는 모든 지혜로운 자들이 저마다 자기들이 만들던 일을 멈추고 오니라.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백성이 께서 만들라고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오나이다하니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그 명령을 진영에 두루 선포하여 이르되남자든 여자든 성소의 헌물로 드리기 위해 더 이상 일하지 말라하였더라그리하여 백성이 가져오는 것을 삼갔으니

그들이 가진 재료가 그것을 만들기 위한 모든 일에 충분하며 너무 많았더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여러 가지 섬김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고또 교회 안에서의 섬김에 대한 샘플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다양한 섬김의 연합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기명들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힘들기도 했고위험할 수도 있었고또 매우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도 하였습니다예를 들어 성막의 가장 깊은 자리에 있던 언약궤 같은 경우는 1,300여 종류의 아카시아나무 중에 한 종류인 시팀나무를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시팀나무는 이집트에서 미라의 관을 만드는데도 사용되었던 아주 좋은 재료였습니다이 나무를 톱으로 썰고 다듬고 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제 이 시팀나무 위에 금을 덧입혔습니다이집트에서 가져온 많은 금장신구들을 용광로에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을 나무에 도금하는 작업은 매우 위험했을 것입니다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인 긍휼의 자리를 덮는 두 그룹의 모습은 금덩어리를 두들겨서 조각하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힘들고 위험하고 또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모든 섬김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의 섬김이 모여 하나 되고 연합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됩니다목수만 있어서도 안 되고대장장이만 있어서도 안 되고또 예술가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각 성도의 모든 은사와 기능이 한 곳에 어우러질 때에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

또한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3절 뒷부분에 보시면 바로 자원하는 마음입니다영어로는 free offerings 라고 되어있는데요대가를 계산하거나 유익을 바라지 않고 값없이 드린 헌물을 의미하고또 누군가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드린 헌물을 의미합니다하나님께서는 강요를 통하여 억지로 나오는 섬김을 결코 바라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며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으신 전능자이십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섬김이나 경배가 없어도 영광이 충만하시고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으시면서 기뻐하시는 경우가 있는데요그것은 우리의 섬김이 너무나 놀랍고 대단해서가 아닙니다하나님께 너무 큰 도움이 되고 유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드림과 헌신과 봉사를 기뻐하시는 경우는 오직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되어 자원하는 마음이 넘쳐서 드릴 때입니다저도 아이들 선생님으로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어쩌다 저에게 사탕이나 편지를 줄때가 있습니다때로는 사탕이 맛있어서 좋아하기도 하고편지가 예뻐서 좋아하기도 하지만아이들이 저를 생각해준 그 마음 때문에 더 기쁩니다그런데 만약 아이들이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편지를 써서 준다면 저는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자원함으로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섬김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물론 권면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억지로 하는 섬김은 섬기는 사람도 기쁘지가 않고,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스스로 감동하여 나오는 섬김을 기뻐 받으십니다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작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그리고 스스로 감동하여 나오는 섬김은 5절에 나온 것처럼 넘치는 섬김이 됩니다모두가 기쁨에 넘쳐서 섬기는데 뭔가 부족한 상황은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자원하는 섬김은 언제나 넘치고 풍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통제와 질서

그러나 또한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넘치는 섬김이 적절한 통제와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내 마음이 뜨겁고 넘친다고 해서 무조건 맘대로 섬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여기서 보면 백성들이 성막에 쓸 재료를 너무 많이 가져오니까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세에게로 문제를 가져옵니다그리고 모세가 명령을 내리고,각 지파의 족장들과 전달자들이 백성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질서가 필요합니다어떤 섬김이든지 합당한 통제와 질서 가운데 있어야 아름답습니다가령 찬양대에서 멋진 목소리를 가진 한 자매님이 혼자서 크게 부르면 화음이 아름다울까요또 건축을 하는데 벽돌 크기가 서로 제각각이면 건물이 세워질까요우리 여기 뒤에도 벽돌이 질서정연하게 쌓여져 있는데 만약 한 벽돌이 삐쭉 튀어나와 있으면 어떨까요그 벽돌 하나 때문에 건물 전체가 균형을 잃고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예전에 성막은 사람들이 재료를 가지고 건축하였지만오늘 교회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는 것입니다중간에 돌이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전체 집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 한분 한분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마시고, “내가 빠지면 교회가 무너질 수도 있구나.”하는 책임감을 가지셔야 합니다그렇다면 이 영적 집에는 누가 거하십니까주님이 거하십니다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2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 안에서 너희도 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세워져 있느니라.” 우리교회 한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정리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오늘은 마치 아주 먼 옛날 이집트 동쪽에 있는 시내 광야에서부터 출발하여예수님이 계시던 나사렛과 갈릴리를 거쳐서현재 이곳 일산까지 아주 먼 여행을 한 느낌이 듭니다오늘 말씀의 제목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구약시대에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한가운데 거하신 하나님께서이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한가운데 거하시고또 이제는 교회의 한가운데 거하십니다죄를 물처럼 마시던 우리를 단 한 번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영원히 완전하고 거룩하게 하셔서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모이는 모임 가운데 사람의 말이나 주장이나 생각이 아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만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늘 실패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우리들과 함께 하시려고 우리의 한가운데 거하시고 동행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생각하며 오늘도 용기를 내어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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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 2010.03.19 / 설교 장소 서울침례신학교 금요일 채플 /로빈28세

설교 일시 : 2010.03.28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

 

 

주님을 전심으로 구하라(출 12:12-13)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말씀입니다출애굽기 12장 12절과 13절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내가 이 밤에 이집트 땅을 두루 지나가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또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하리라는 주니라.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해 표가 되게 할지니라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오늘 저는 주를 전심으로 구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여러분이 만약 영화감독이 되어 성경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과연 어떤 장면이 가장 장엄하고 웅대할 것이라 보십니까저는 단연 출애굽기의 열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최소한 남자 60만 명의 엑스트라가 있어야겠고또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다 합쳐서 대략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과 또 수천의 이집트 사람들이 함께 나와야 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소와 나귀와 양과 같은 수많은 가축들이 필요할 것이고또한 화려하고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 작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성경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장면을 뽑으라면 단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아닌가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은 출애굽 사건의 핵이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입니다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유월절에 대해 지시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유월절은 이집트에 있어왔던 아홉 가지 재앙에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으로써파라오를 완전히 굴복시킨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유월절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또한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피의 구속을 이루실지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출애굽기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전심으로 구해야 할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저는 오늘 세 가지 요점을 잡아서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오늘 말씀의 제목 주님을 전심으로 구하라.” 이 제목 안에 요점이 다 들어있습니다우선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가 누구냐?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가장 훌륭한 질문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질문들의 특징을 보면질문 자체는 매우 훌륭했으나그 질문을 한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심문하던 빌라도가 그 질문을 했는데요바로 요한복음 18장 38절에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은 것이었습니다.그런데 빌라도는 이 질문을 하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길이요진리요생명이신 주님을 앞에 놓고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가버린 빌라도였습니다.

또 구약에서 가장 훌륭한 질문을 또 한 가지 뽑아보자면 파라오의 질문입니다바로 출애굽기 5장 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나는 를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 그의 질문 자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주가 누구냐?”

 

사실 주가 누구냐는 질문은 여기 파라오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질문이었을 것입니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세기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이들은 막연하게 주님이라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고,또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모세조차도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리니 내가 무엇이라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그때 모두 잘 아시는 말씀인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에서 자신이 어떠한 분인가를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하며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파라오도 모르고이스라엘 백성도 모르며모세조차도 잘 모르는 주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를 전심으로 구하라입니다우리가 주를 전심으로 구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는 로마서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만큼믿음이 자라나고믿음이 자라난 만큼 주님을 부르며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

가장 먼저출애굽기를 통해 살펴보기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시고 모세를 예비하셨지만모세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느낄 때에는 하지 않으셨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능자 하나님을 나타내기 원하셨지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나타내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사도행전 7장을 보실까요? 22절부터 2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

23 그가 정확히 사십 세 되었을 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더라.

24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당한 일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치니라.

25 그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건지려 하심을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일을 시작할 때에 그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습니다나이도 정확히 40세가 되었는데너무 젊어서 혈기로 함부로 행동하여 일을 그르치는 나이도 지났고그렇다고 너무 늙어서 활동력이 떨어지지도 않는어떻게 보면 딱 적합한 나이가 되었습니다또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건지려 하심을 깨달았습니다삼박자가 딱 들어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나를 강에서 건져 파라오의 집에서 자라나게 하셨고이제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 있게 하셨고이제 사십 세가 되었으니 가장 적합한 때다더 나이 들어 늙기 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하나님당신의 뜻을 이루소서제가 갑니다.”

 

그리고 너무나 파격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앞에 등장하였습니다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일 마음만 있었지실제로는 하지 못했던 일을 모세가 감행한 것입니다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단합만 된다면 수적인 우세와 단결력으로 단번에 이집트를 안에서부터 정복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의 머릿속에는 다음 행동에 관한 모든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습니다사람이 자기 지혜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결과는 늘 참패입니다. 100% 참패입니다모세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뒤에 행동하였습니다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선한 동기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믿음으로 결단하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였을 때 참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광야로 보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자기 신뢰를 씻어내십니다. 80세가 되기까지 내버려 두십니다이제 모세는 힘이 다 빠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처럼 되었습니다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80세 할아버지를 누가 거들떠보겠습니까마치 모세의 손에 들린 마른 나무 막대기 같이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모세야드디어 준비가 되었구나이제 가라.”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이러한 가사가 있습니다. (침례교 찬송가 453)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될 때 날 버티던 힘 모두 사라질 때

내 바라던 소망 다 허사가 될 때 내 아버지 도움은 시작일세

 

하나님은 사람과 영광을 나누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사람과 공로를 나누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해볼 수 있을 것 같을 때 기다리십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할 때 가만히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고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겁쟁이 기드온의 삼백 용사를 사용해 해변의 모래 같은 미디안을 진멸하시고오직 항아리와 횃불로 그렇게 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침묵의 행진과 한 번의 함성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리셨고작은 소년의 조약돌 하나로 거인을 쓰러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나가십니다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전심으로 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오늘날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은 많지만하나님만을 전심으로 구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통장과 지갑을 믿고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지식과 능력을 믿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끝내십니다그때마다 우리는 아프고 힘들지만 점점 주님 외에는 붙잡을 것이 없을 때까지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이끄십니다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보았을 때웬 냄새나는 노인네가 양치다 말고 와서 헛소리를 하는가하고 느꼈을 것입니다이렇게 모세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을 때주께서는 너무나 자유롭게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실 수 있었습니다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너무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서입니다우리 자신이 너무 뛰어나고 잘나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우리의 능력이 너무 많아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됩니다하나님께서는 조금 모자란 사람혀가 둔한 사람언변이 하찮은 사람자주 실수하는 사람흠이 많은 사람... 다 사용하실 수 있지만너무 완벽하고 흠이 없어서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자가 되시려면 우리는 무능자가 되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우리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무너뜨리시고오직 전능자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구하고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시기 원합니다.

 

 

심판자

주가 누구냐?”, 주님은 전능자이십니다.

이제 두 번째로 심판자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자로서사람들에게 한번 죽는 것을 정하시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히 9:27).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모든 사람은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될 것이고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변명이나 속임수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자들을 지옥 불 속에서 영원무궁토록 징벌하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며 우리는 긴급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출애굽기에 나온 것처럼 각 사람에게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하나님께서 피를 보실 때에 심판이 임하지 않고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어린양의 피는 이미 심판이 행하여졌고,죄의 값이 흘려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그 무엇으로도 죄를 씻을 수가 없고오직 어린양의 피만이 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집트의 모든 우상에게 심판을 집행하셨습니다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2장 12절 말씀에서도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하리라나는 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며하나님 자신이 모든 신들 위에 전능자요,심판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신들의 이름을 빠르게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일강을 피로 만드시면서나일강의 수호신 크눔”(Khnum)과 나일강의 범람으로 주변 지역에 물을 공급해주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하피”(Hapi)를 치셨습니다.

또한 주께서는 강에서 개구리를 불러오시고 이집트 거리에 쌓여 죽어서 악취를 풍기심으로 여성들을 출산 시에 보호하며 생명의 탄생을 돕는다는 개구리 여신 헤케트”(Heket)를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티끌을 이로 창조하심으로써 창조와 기술의 신 프타”(Ptah) 그리고 흙의 신 ”(Seb)을 심판하셨고,

파리의 재앙으로 파리의 신 하트콕”(Hatkok)을 심판하셨고파리의 재앙을 내리실 때는 이스라엘의 고센 지역과 이집트 지역을 명확히 구분하셔서 파리들이 이집트 땅에만 있게 하심으로 공기와 바람의 신 ”(Shu)와 대지의 신 게브”(Gab)를 또한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다섯 번째 재앙으로 이집트의 모든 가축에게 전염병을 내리심으로 황소의 신 아피스”(Apis)와 암소의 수호신하토르”(Hathor)를 심판하시고질병을 치유하는 세크메트”(Sakhmet)를 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종기의 재앙으로 의술의 신 임호텝”(Imhotep)과 재를 뿌리며 제사 지내는 세트”(Seth)/“타이폰”(Typhon)을 신을 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불 섞인 우박을 내리심으로 하늘의 여신 누트”(Nut)를 치시고비와 자연 현상을 과장하는 여신 이시스”(Isis)를 치셨습니다.

또한 메뚜기의 재앙으로 메뚜기를 막고 곡식을 보호하는 세라피아”(Serapia)를 심판하시고,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을 통하여 아침에는 케프리”(Khepri), 낮에는 ”(Ra), 밤에는 아툼”(Atum)이라 불리는 태양신을 심판하셨습니다.

 

신도 많죠이제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처음 난 자를 치심으로 생명의 신 오시리스”(Osiris)를 심판하셨습니다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다양한 신들을 하나하나 치심으로 온 이집트 땅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신이 최고의 신으로서 전능자요 심판자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외에 따르고 신뢰하는 모든 우상들을 심판하십니다.

 

특별히 모든 처음 난 자를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이는 모든 부모에게 처음 난 자가 얼마나 큰 우상의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처음이요최우선이 되시기를 원합니다전능자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기 원합니다내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모세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를 나일강에 내려놓았을 때에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왕궁과 광야에서 양육하시고훈련하셔서 자신의 신실한 사역자로 삼으셨습니다그처럼 위대한 기적들을 일으키고도 여전히 온유하고 겸손하며여전히 자신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사역자로 훈련하셨습니다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기 원합니다내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 원합니다.

 

심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이 세상에서의 심판은 돈으로 변경할 수 있습니다무전유죄유전무죄라는 말과 같이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돈이 없으면 죄가 있게 됩니다사람들이 아무리 서명을 하고촛불집회를 하고인터넷에 글을 올려도 부정부패를 막을 수 없고부당한 재판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홍보 때에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피습하여 문구용 칼로 얼굴에 상처를 입힌 지충호 씨(51)는 살인미수라는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반면 일명 나영이 사건으로 어린 아이를 성폭행하고 장애인으로 만들어 한 아이의 인생과 그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조두순 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습니다.과연 이 두 사건의 죄질이 겨우 징역 2년 차이인가를 생각해보면이 세상의 재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게 될 때에는그 누구도 변명하거나 항소할 수 없으며그 어떤 것도 부당하거나 왜곡되지 않은 가장 정확하고 정의로운 심판이 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 임하는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면서이집트의 모든 신들 위에 임하는 전능자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두려워하며 감탄하였을 것입니다그 뿐만 아니라, 400년 동안 자신들을 부당하게 압제해 온 이집트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큰 위로를 받고 기뻐했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원수 갚아주시는 분으로 나타내십니다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잠도 잘 자고 소화도 잘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시라는 사실은 때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때로는 든든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우리는 삶 가운데 부당한 일을 당하고억울한 일을 경험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할 때에도 성경은 주께서 그 말을 들으셨다고 기록합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압제 받는 것을 모두 보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고 아십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잊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결산하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구속자

주가 누구냐?”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또한 심판자이십니다.

이제 세 번째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모습은 바로 구속자이십니다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통하여 심판을 면하게 하시고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속하여 내셨습니다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우리는 십자가 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게 하신 심판자 하나님을 볼 때에 우리의 죄가 얼마나 엄중하고 더러운 것이었는가를 알게 되며또한 더럽고 비참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속은 무엇입니까구속은 값을 치르고 속박으로부터 구해낸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아무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으시지만우리를 위하여 독생자의 피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전능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우리는 한 없이 작고 그분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경외하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또한 심판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그분이 공의로우시고 정당하게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기도 하지만 또한 경외하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그러나 우리가 구속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우리는 경외하고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친근하고 감사하며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 신학교 홈페이지에 처음 들어가면 나오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는데요바로 요한일서 4장 19절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단지 전능하시고 공의로운 심판자이시기 때문이기보다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가능할까요불가능합니다그렇다면 심판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합당할까요하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그렇다면 구속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요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빌 2:5)..

구속자가 되신 하나님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종의 형체를 입고 십자가의 죽음에 까지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이유는 그분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이 되시고우리가 느끼는 피곤함과 배고픔과 연약함의 감정을 모두 친히 아셨기 때문입니다(히 4:15).

친히 탄생의 거처를 정하실 수 있는 분께서 화려한 왕궁이 아닌 냄새나는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나시고친히 자라날 장소를 정하실 수 있는 분께서 가난한 동네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주님은 33세가 되시기까지 사역하셨는데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아직 오십이 안 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이사야 대언자가 기록한 것처럼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고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거칠고 볼품없는 모습을 가지셨으며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더러운 창녀와 세리들도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고오히려 만나고 싶어하며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어떠한 죄인이라도 친구처럼 다가설 수 있고어린 아이들도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이러한 분이 바로 우리의 구속자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그러므로 교만하고 이기적인 저와 우리 모두가 오늘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간단한 그림을 본적이 있는데요예수님이 의자에 앉아계시고주변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은 멋진 신사 숙녀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아래에는 “Grace-은혜라고 적혀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아래에 또 다른 그림에는 여전히 예수님이 의자에 앉아계시고주변에는 넥타이를 머리띠처럼 매고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술병과 마약주사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그리고 그 아래에는 “Amazing Grace-놀라운 은혜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그냥 은혜입니까아니면 놀라운 은혜입니까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속박으로부터 구하지 않으셨다면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우리 자신이 죄로부터 분리하고 성결케 되려고 노력을 해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이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문제가 많고 흠이 많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용납하고 받으신 것처럼우리도 영혼들을 향해 그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갚으신 것처럼우리도 영혼들을 향해형제들을 향해 대신 갚아주고 손해를 끌어안으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말고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예수님께서 자신의 뺨을 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주신 것처럼우리도 그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우리는 결코 할 수 없지만 전능자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기에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억울함과 손해를 끌어안을 수 없지만 공의의 심판자께서 모두 보고 계시며 충분히 갚아주실 것을 믿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먼저 나에게 그러한 사랑을 보여주신 나의 구속자께서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도 그분을 힘입어 그렇게 하기 원합니다.

 

 

주를 전심으로 구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주를 구해야 합니다대충 구하지 말고모양만 갖추지 말고전심으로 주를 구해야 합니다오늘날 주님을 사랑하는 척따르는 척하는 사람은 넘쳐납니다하나님도 조금 구하고명예도 조금 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주님도 조금 추구하고돈도 조금 추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그러나 주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주님을 전심으로 구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를 전심으로 구하라.”입니다오늘 제목 안에 저의 설교의 요점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주를 전심으로 구하라.”에서 첫 글자 를 떠올리시면서 주가 누구냐?”라는 파라오의 물음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전심으로에서 앞 글자 은 전능자”,

두 번째 글자인 은 심판자”,

구하라에서 는 구속자를 기억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자이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그분께 맡기고 의지하기 원합니다하나님이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므로 내가 당하는 부당함과 억울함에 맞서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 원합니다또한 하나님께서 나의 구속자이시므로 나를 구속하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이 내 마음에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주님 오시기에 너무나 임박한 이 시대에 주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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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 2009.12.23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7세

http://robinbox.net

 

어린이 다니엘의 믿음(단 1:17-20)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니엘 1장 17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입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본문 다니엘 1

17 이 네 아이들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으며 또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18 그가 그들을 데리고 들어와야 한다고 왕이 말한 날들이 이제 끝나니 그때에 내시들의 통치자가 그들을 데리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들어오니라.

19 왕이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 모두 가운데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왕 앞에 서니라.

20 왕이 지혜와 명철에 대한 모든 문제를 그들에게 묻는 중에 그들이 자기의 모든 영토 안의 모든 마술사와 별을 살피는 자보다 열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오늘 저는 다니엘서 1장의 말씀을 가지고 어린이 다니엘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제가 오늘 사실 설교 제목을 공부 잘하는 방법” 이런 식으로 독특하게 지어보려고 했습니다그런데 너무 독특해서 부담스러운 것 같아 무난하게 어린이 다니엘의 믿음이라고 지어보았습니다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학력과 성공일 것입니다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것인가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높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질 것인가?

제가 어느 인터넷 만화를 본 적이 있는데요한 아버지가 TV에서 삼성 비리 의혹과 관련된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그러면서 삼성 정말 잘못했다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나 삼성 정 직원 뽑혔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삼성 만세” 이렇게 외치는 만화였습니다사회를 풍자하는 만화였는데요.

이처럼 사람들은 좋든 싫든 성공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성공을 위해 공부도 하고기술도 배우고교양도 배우고외모도 관리하고 너무나 바쁘게 살아갑니다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물론 공부하고기술을 배우고외모를 관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고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잊지 않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우리가 진정 바라보는 성공은 이 땅에서 한순간 누릴 한시적 성공이 아니라영원한 영광과 통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오늘 저와 함께 다니엘서 1장의 이야기를 살펴보시면서 어린이 다니엘의 믿음과 다니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다니엘의 상황

다니엘서 1장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의 통치 제삼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곳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집의 기구 중 일부를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그가 그것들을 시날 땅에 있는 자기 신의 집에 가져가서 그 기구들을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들여 놓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계속된 범죄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침공을 당했고남왕국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침공을 받았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자기 내시들의 우두머리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왕의 씨와 통치자들 중에서 몇 사람

곧 흠이 없으며 잘생기고 모든 지혜에 능숙하며 지식을 두루 갖추고 과학을 이해하여 왕의 궁궐에 설 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을(children) 데려오게 하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말을 가르치게 하니라.

 

바빌론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주변 지역을 정복했던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바빌론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나안 민족들을 정복했습니다바빌론 전에 있었던 앗시리아는 정복한 나라들마다 강제 이주 정책을 펼쳤습니다각 민족들이 다시 독립하지 못하도록 종족을 다 섞어서 완전한 하나의 앗시리아 제국을 건설하려 했습니다그러던 중 신흥 바빌론 제국은 메디아와 힘을 합쳐 앗시리아를 무찔렀고여기서 보면 앗시리아와 유사한 정책을 펼쳤던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자신들이 정복한 각 나라의 왕족들과 귀족들의 자녀들을 바빌론의 내시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각 민족들의 왕족과 귀족의 자녀들이 자라나서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싹을 미리 제거하고오히려 기본 교육을 잘 받은 기초 위에 바빌론 식의 사고방식과 바빌론 종교와 바빌론 왕국을 위한 충성심을 심어서 부하로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신 포도주에서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어 이렇게 삼 년 동안 그들을 양육하였으니 이것은 삼 년이 끝난 뒤에 그들이 왕 앞에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바빌론의 포로가 된 아이들에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아마도 이들은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 정도의 나이로 추측됩니다그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왕족과 귀족이었습니다그들은 각 왕국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이제 그들의 부모님은 전쟁으로 인해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고이 아이들은 자신들을 정복한 바빌론 제국의 내시가 된 것입니다.

이 당시의 바빌론 왕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은 세계 7대 불가사이라고 불리는 공중 정원을 건축했던 왕입니다이 당시 바빌론의 지혜와 과학과 건축 기술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다양한 민족으로부터 나온 왕족 귀족의 자녀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이들 중에는 바빌론을 증오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한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고너무나 두려워서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내시들의 우두머리인 아스부나스는 아마도 이렇게 아이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다 바빌론의 신하이다너희는 과거에 우리와 원수였지만 이제 우리는 한 왕국 안에 있다너희에게는 아주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앞으로 삼 년간 이 갈대아 왕립국제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배우느냐에 따라 너희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삼 년 뒤에 너희가 배우고 익힌 것들을 가지고 느부갓네살 왕과의 면접시험이 있을 것이다그 시험 결과에 따라 바빌론 제국 안에서의 너희 지위의 높낮이가 결정될 것이다모두들 열심히 해서 성공하기 바란다삼 년간 잘해보자.”

실제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만어쨌든 이 아이들에게는 삼 년이라는 기간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6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이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에 속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더라.

내시들의 통치자가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으니 그가 다니엘에게는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주고 하나냐에게는 사드락미사엘에게는 메삭아사랴에게는 아벳느고라는 이름을 주었더라.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등장합니다바빌론 제국에서는 이들에게 완전한 바빌론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이름부터 바빌론 식으로 바꾸고 있습니다이승선이 한국식 이름이라면로빈은 미국식 이름이듯이다니엘은 유다식 이름이지만벨드사살은 바빌론식 이름인 것입니다바빌론 제국은 아이들의 이름을 바꿔줌으로써 그들의 종교와 사고방식을 바꾸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의 다니엘은 벨의 통치자라는 벨드사살로 바뀌었습니다주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하나냐는 마루둑을 경외할지라는 사드락으로 바뀌었습니다주와 같은 자는 누구인가라는 미사엘의 이름은 아쿠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메삭으로 바뀌었습니다주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의 아사랴의 이름은 느고신의 종이라는 아벳느고로 바뀌었습니다.

바빌론에서 다니엘은 언제나 벨드사살이라고 불렸을 것입니다다니엘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바빌론 신에 속한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마찬가지로이 세상은 항상 우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고 합니다우리의 이름은 본래 그리스도인으로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또한 우리의 이름은 순례자로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주려고 합니다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직장에서는 직장에 소속된 이름으로 우리를 부를 것입니다우리 학생들에게는 수험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든지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진정한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우리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며순례자요타국인이요나그네입니다우리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하늘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정 - Daniel purposed...

다니엘이 속한 배경 상황을 설명하는데만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이제 본격적으로 어린이 다니엘의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네 가지 요점을 가지고 다니엘의 믿음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첫 번째 요점은 작정입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정해준 음식이나 왕이 마신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하였으므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요청하니

 

우리 어린이들은 성경책에 작정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쳐주시기 바랍니다물론 어른들도 치셔도 됩니다복잡한 상황 속에서 다니엘이 작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또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다니엘은 바빌론에서 탈출하기를 작정하거나공부를 열심히 해서 최고의 지위를 얻겠다고 작정하지 않았습니다다니엘은 먼저 전쟁이 일어나서 포로가 된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났음을 받아들였습니다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니엘은 모든 것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였습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도 다니엘은 뛰어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내가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냉철하게 분별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이나 왕이 마신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마음속에 작정하였습니다왜냐하면 왕이 정해준 음식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이곳 갈대아 학교에 모인 아이들 중에 그 누가 왕이 정해준 음식을 거절하기로 작정할 수 있었겠습니까다니엘이 작정한 것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 돌출되는 행동이었습니다다니엘이 이렇게 작정한 것을 다른 아이들이 듣게 되면 뭐라 말할까요? “쟤는 왜 저래남들 다 먹는거 자기 혼자 거룩한 척이야누구는 다른 종교 안 믿나우리는 다 바빌론 신 믿는 줄 알아그냥 왕이 정해주면 먹는거지 말이 많아우리도 유대인이야.” 등등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정해준 방식대로 살아갑니다우리가 세상의 방식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할 때 우리에게는 치러야 할 크고 작은 많은 불편함과 대가가 따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준 길대로 가야 합니다오직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첫 번째가 되셔야 합니다하나님의 말씀 외에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진로를 정해줄 수 없습니다하나님이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어린이 다니엘이 스스로 이러한 작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14세의 나이면 성년식을 하는 이스라엘의 풍습으로 미루어 볼 때 4절에 나오는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이 말 그대로 어린이였음을 보여줍니다최대 많이 잡아도 20세 이하로아마 중고등부 나이였을 것입니다더 어린 초등학생 나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어린이도 하나님을 위한 마음의 작정을 할 수 있을까요아멘있습니다우리 아이들도 세상의 많은 보고 듣는 것들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속에 작정하는 귀한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물론 저와 어른들도 늘 주님께 향하는 마음의 작정이 있기를 원합니다.

 

 

품위와 질서

두 번째로 다니엘에게서 찾아보기 원하는 믿음의 요점은 품위와 질서입니다. 8절 하반절에 보시면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요청하니라고 되어있습니다요청이란 단어에 동그라미... 다니엘의 마음속에서는 확고한 작정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다니엘이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결코 과격하거나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다니엘은 자기 위에 세워진 권위를 인정하고 조용히 찾아가서 요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다니엘은 아이들을 선동하거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성경은 다니엘이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주장하니...라고 기록하지 않고요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might”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제가 혹시 그 음식으로 인해 저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만약 “must”를 썼다면, “절대로 더럽힐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의미일 것입니다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풍습에 대해 잘 설명하였을 것이고결코 반역하려함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위해 간곡히 부탁하였을 것입니다.

 

다 같이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

우리의 결심과 판단이 너무나 영적이고 옳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합니다아무리 좋고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질서를 거슬러 행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위의 3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화평의 창시자시니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화평의 창시자이시므로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든지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어떤 일의 목적과 결과도 중요하지만일을 진행하는 과정도 중요합니다우리는 일의 시작과 진행과 결과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로 다니엘서 1장으로 돌아오셔서 9절과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도하사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은총과 친절한 사랑을 받게 하시니라.

10 내시들의 통치자가 다니엘에게 이르되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왕이 너희의 먹을 것과 너희의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 얼굴이 너희와 같은 부류의 아이들보다 못한 것을 그분께서 보아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그렇게 되면 너희가 왕 앞에서 내 머리를 위태롭게 하리로다하니라.

 

다니엘이 하나님을 따르고자하는 작정을 하고품위와 질서를 따라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요청하였을 때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인도하셔서 내시들의 통치자에게 은총과 친절한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내시들의 통치자 아스부나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청이 매우 귀찮고 짜증날 수가 있습니다포로 주제에 먹으라면 먹을 것이지 말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더 악하게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다니엘의 모습에서 자신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낮추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열렸을 것입니다이제 10절에서 읽으신 것처럼 내시들의 통치자가 다니엘에게 자신의 사정을 잘 설명해 줍니다아스부나스 자신도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고또 음식을 삼 년간 다르게 먹을 경우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모르므로 불안하다는 것을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 번갈아서 읽어보겠습니다.

11 그때에 다니엘이 멜살 곧 내시들의 통치자가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하려고 세운 자에게 이르되,

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콩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뒤에

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을 관찰하게 하시고 당신이 보는대로 당신의 종들에게 행하소서하매

14 이에 그가 이 일에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여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하더니

15 열흘이 끝났을 때에 그들의 얼굴이 왕이 정해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기름지게 보이니라.

16 이에 멜살이 그들에게 정해 준 음식과 그들이 마실 포도주를 거두어가고 그들에게 콩을 주니라.

 

내시들의 통치자 아스부나스는 친절하게 다니엘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여기서 아스부나스에게 계속 요청한다면 아마도 아스부나스를 분노하게 만들 것입니다그러나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고 아스부나스가 세운 자신들 담당자인 멜살에게 다시 한 번 요청합니다그리고 읽으신 대로 열흘 동안 시험 후에 왕의 음식이 아닌 콩을 먹고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콩이 얼마나 영양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축복하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시편 102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 빈궁한 자들의 기도를 중히 여기시고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완전한 연합

다니엘서 1장에 나타난 어린이 다니엘의 믿음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작정”, 두 번째로 품위와 질서를 살펴보았습니다이제 세 번째로는 완전한 연합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12절에 우리그리고 13절의 우리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해주세요.

만약 다니엘이 혼자였다면 이러한 믿음의 결단과 도전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그러나 다니엘에게는 함께하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데니얼이 있습니다혹시 누군지 아시나요바로 준수인데요준수와 선우와 대현이와 준호를 볼 때 마치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보는 것 같습니다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다니엘에게는 완전히 연합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함께 고난을 받고함께 고난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우리에게도 그러한 연합이 필요합니다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입니다우리 각자는 약하고 쉽게 넘어지지만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일 때 우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때에 우리 안에는 세상을 이길 더 큰 힘이 생겨납니다.

 

교회 안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나이도 다르고성격도 다르고집안도 다르고출신 배경도 다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님과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힘입기 원합니다주님께서 나를 속하게 하신 교회를 사랑하며 더욱 완전히 연합하기 원합니다.

 

 

성공 보장

이제 다니엘의 이야기를 통해 볼 수 있는 네 번째 요점은 성공 보장입니다요점이 좀 이상한가요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고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형통케 하시고 복 주실 것입니다물론 이 성공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될 수도 있지만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성공입니다처음에 읽었던 1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 네 아이들로 말하건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서 능숙함을 주셨으며 또 다니엘은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들이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지혜와 명철에 대한 모든 문제를 그들에게 묻는 중에 그들이 자기의 모든 영토 안의 모든 마술사와 별을 살피는 자보다 열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했던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명철로 보상하셨습니다다니엘은 비록 포로로 잡혀가 바빌론의 내시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다니엘과 동행하셔서 다니엘을 높여주셨습니다다니엘서를 읽어보면 마치 다니엘이 각종 우상으로 가득한 바빌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서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과 많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 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지혜와 지식은 어디에서 왔습니까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왔습니다시편 119편 97절에서 100절을 보시겠습니다.

97 오 내가 주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

98 주의 명령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주께서 그것들을 통해 나를 내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셨나이다.

99 주의 증언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내게 더 많은 명철이 있으며

100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잘 깨닫나이다.

 

 

작품 완성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오늘 우리는 다니엘의 믿음과 다니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총 네 가지 요점으로 살펴보았는데요첫 번째는 작정”, 두 번째는 품위와 질서”, 세 번째는 완전한 연합”, 네 번째는 성공 보장이었습니다각 요점의 첫 글자만 따오면 무슨 말이 될까요, “작품 완성입니다기억하기 좋으시라고 말을 맞춰봤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또한 우리 아이들의 인생도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작품 중의 작품입니다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그저 우연히 진화되어 생겨난 생명체가 아닙니다사람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다니엘과 세 친구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작정하고품위와 질서를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며완전한 연합 가운데 서로 사랑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성공은 무엇입니까이 땅에서의 한시적인 성공입니까아니면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에서의 통치와 영광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길 때에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고난을 겪으며대가를 지불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작품으로 더욱 성숙시키시며 놀라운 보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우리가 늘 주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설교 일시 : 2009.09.15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7세

http://robinbox.net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호 6:6)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호세아 6장입니다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본문 호세아 6장 6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

 

오늘 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먼저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본문 말씀의 중요성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직접 표현하시는 매우 인상적이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느니라.” 여기서 원하다라는 단어는 영어성경에서 “desired”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데이것은 단순히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간절하게 바라고 열망하는 것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하나님께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긍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을 두 번 인용하셨습니다한 번은 마태복음 9장에서 인용하셨는데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때에그것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인용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가서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하시니라.”

또 한 번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인용하셨는데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곡식밭의 이삭을 따서 먹고 있을 때에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인용하셨습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

 

예수님께서 두 번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마태복음 9장 13절에서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하셨고, 12장 7절에서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하시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를 분명히 알고 배워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긍휼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오늘의 본문 호세아 6장 6절에서도 희생물과 번제 헌물을 짝을 맞추었고긍휼과 하나님 아는 것을 짝을 맞추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긍휼에 대한 배움과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그것을 가리켜 하나님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앞으로 가셔서 호세아 4장을 보시겠습니다호세아 4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으라그 땅에 진리도 없고 긍휼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으므로 주께서 그 땅의 거주민들과 논쟁하시나니” 호세아 대언자가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진리도 없고 긍휼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진리와 긍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진리가 있다면 우리는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긍휼의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네가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지식이 온전치 못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과 율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정통 율법 박사들이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온전치 못하고 부족하기 때문에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오해하며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긍휼한 마음보다는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더 많은 이유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풍성한 긍휼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오늘날 누군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긍휼이 없다면그것은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긍휼이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은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호세아의 배경

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한다고 말씀하실 이 당시에 이스라엘은 죄악과 우상숭배로 가득하였습니다.

다 같이 호세아 1장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주의 말씀이라.

호세아로 말미암은 주의 말씀의 시작이라주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가서 행음하는 아내를 취하고 행음으로 인한 자식들을 취하라그 땅이 주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으니라하시니라.

 

호세아는 시작부터 매우 무겁고 암울합니다신약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처럼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정혼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스라엘은 행음하는 아내와 같이 하나님 외에 다른 많은 우상 신들바알과 몰렉과 다곤을 섬기며 경배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는 대언자 호세아를 사용하셔서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또한 변치 않는 긍휼과 사랑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다 용납하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할지라도행음하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른 우상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행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그것은 그만큼 크고 중대한 죄악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신들을 경배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죄를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더 쉽고 간단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 마음을 원하시고진실을 원하시며언제 어디서나 동행하며세심하게 우리의 일에 개입하기 원하십니다그러나 우상 신들은 사람들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신들이기 때문에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하며어떻게 살든지 상관하지 않고아니 상관할 수도 없고그저 제물을 바치면서 달래주기만 하면 풍요와 다산의 축복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명절이 되고 정한 때가 되면 우상들에게 나아와 분향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빌었습니다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도 나아가 희생물을 드렸습니다마음 없이진실 없이죄를 돌이킴 없이그저 다른 우상 신들을 제물로 달래듯이그냥 그렇게 형식적으로입술의 고백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장 11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주가 말하노라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내가 숫양의 번제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부른즉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또한 13절과 1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13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14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또한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가 말하노라이제 오라우리가 함께 변론하자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희생물과 번제 헌물이 아닙니다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말씀 한마디로 빛을 창조하시고우주를 창조하신 절대자요전능자요초월자이십니다하나님은 그러한 희생물이 결코 하나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양털같이 희게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희생물은 본래 긍휼의 상징이었습니다하나님은 의로우시고거룩하시며온 우주의 심판자이시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죄를 범하는 순간 즉시 처벌하실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 제도를 알려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긍휼이 풍성하시며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희생물을 드릴 때에 죄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로 인한 감사와 감동이 가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그저 멀리서서 희생물과 번제 헌물만을 드리고 있었습니다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엄숙한 집회를 가지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그러므로 이사야 29장 13절에서도 그러므로 주께서 이르시되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고 그들이 사람들의 훈계로 가르침을 받아 나를 두려워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이스라엘의 시대에는 바알과 몰렉과 다곤이라는 우상들이 있었습니다오늘날 이 시대에도 돈과 명예와 권력과 교육과 쾌락이라는 우상들이 있습니다또한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탐욕을 부리는 모든 것이 다 우상 숭배입니다이스라엘만 우상 숭배를 했던 것이 아니라오늘날 우리들도 많은 때에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던 이유는 무엇입니까그들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알지 못하고우상 신들이 더 좋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지는 않으나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온전치 못하여 하나님을 오해하고 떠나가는 것입니다사탄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며 불신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다 같이 에베소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2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또 함께 일으켜 세우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

 

지나간 때에 우리는 마귀를 따르며이 세상을 따르며육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걸어가던 불순종의 자녀들이며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지기에 합당했으며진노를 받기에 마땅했습니다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사랑하셨고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따라 친절을 베풀어 주셨습니다오늘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은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희생물은 사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희생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희생물들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이 아니고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화해 헌물로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완전한 희생물로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화해 헌물”(propitiation)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지성소 안에 있는 긍휼의 자리”(mercy-seat)와 정확히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자신의 아들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며하나님의 긍휼이십니다.

 

 

주님과의 동행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자가 받을 수 있습니다누가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까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자가 동행할 수 있습니다여러분사울 왕과 다윗 왕 중에 누가 더 큰 죄를 범하였습니까사울은 모두 진멸하라는 아말렉 족속 중에서 하나님께 드릴 희생물을 죽이지 않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였습니다다윗은 무슨 죄를 범하였습니까? “너는 살인하지 말라너는 간음하지 말라너는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출 20:13,14,17). 누가 보더라도 다윗이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그런데 왜 사울은 긍휼을 입지 못하고 다윗은 긍휼을 입었습니까?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죄를 책망 받았을 때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때에 사울이 이르되내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원하건대 이제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존중히 여기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주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하니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주께 경배하니라”(삼상 15:30,31).

사울은 하나님 앞에 형식적으로 나아갔습니다사울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모양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그의 입술은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그의 마음과 진실은 장로들이백성들이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만 주의했습니다마음 없이진실 없이죄를 돌이킴 없이사울은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으시는 경배를 자기를 위해 드렸습니다.

 

다윗은 대언자 나단으로부터 죄를 책망 받았을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다 같이 시편 51편을 보시겠습니다시편51편 맨 윗부분에 보시면 시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것을 읽어보겠습니다.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그가 밧세바에게로 들어간 뒤에 대언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에 지은 시.”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오 하나님이여주의 인자하심에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크신 친절한 긍휼에 따라 내 범죄들을 지워주소서.

보소서주께서는 속 부분에 있는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16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주께서는 번제 헌물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오 하나님이여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온 마음으로진실하게죄를 돌이키며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이 범죄로 인하여 다윗은 이후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벌을 받았지만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다윗은 평생토록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살았습니다그러므로 이사야 55장 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존하는 언약으로 확실한 긍휼을 약속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심정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루하루 사는 것이 긍휼입니다우리가 숨 쉬고 있는 것이 긍휼입니다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긍휼입니다내가 받을 만하고 자격이 있어서 누리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골로새서 3장 12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13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우리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신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구원받고 주님을 따라오기까지또 현재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매일매일 사투를 벌이는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십시오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혈의 의미를 모르는 많은 시간을 지내왔습니다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바른 성경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믿음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방언하거나꿈과 환상에 의미를 부여하거나하나님 말씀보다 나의 체험을 중시하거나나의 판단을 옳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형제 자매들을 상처주고 어렵게 만들면서도나는 참 주님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지내왔습니다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채 많은 시간을 살고 뒤늦게 깨닫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우리가 지나온 길은 죄악과 오류와 실수투성이지만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용서하시고격려하시면서친절하게 한발 한발 이끌어주셨습니다.

 

우리도 형제 자매들에 대해 이러해야 합니다또한 다른 영혼들을 인도할 때에도 이러해야 합니다어떤 사람의 잘못과 오류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만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못나고 더럽고 어리석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장 방언하는 것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지만그것보다 더 절실한 필요가 그 사람에게 있는지 모릅니다나는 여자 집사가 왜 틀렸는지왜 흠정역이 옳은지왜 세례는 틀리고 침례가 맞는지 말해주고 싶지만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그 사람에게 있는지 모릅니다우리가 진리를 안다면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면먼저 긍휼히 여기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섬길 때에 어떤 정해진 순서나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번 구원, 2번 흠정역, 3번 교회 출석, 4번 방언 이런 순서가 있지 않습니다우리가 어떤 영혼이든지 만나서 섬기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필요를 가졌는가를 주님께 물으며 주의해야 합니다또한 형제 자매들을 대할 때에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친절하게 대해오셨는가를 풍성히 누리는 가운데 긍휼과 은혜를 공급해야 합니다.

 

 

정리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며하나님께서 보내신 화해 헌물이시며 긍휼 그 자체이신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호세아 6장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호세아 6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라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시리라그분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리라.

이틀 후에 그분께서 우리를 되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에 우리가 알리라그분의 나아오심은 아침같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분께서는 비같이 곧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주님을 떠나는 데서 발생하고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주님께 돌아가는 데에 있습니다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징계하실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주님은 우리를 만날 예비가 되어있으십니다우리가 계속해서 주를 알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우둔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늘 듣고 배워도 잘 깨닫지 못하지만하나님의 긍휼을 매일매일 깊이 알아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긍휼과 친절이 가득할 것입니다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긍휼이 여기는 심정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설교 일시 : 2009.05.20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7세

http://robinbox.net

 

사랑의 부르심(신 6:5)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입니다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본문 신명기 6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저는 사랑의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먼저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얼마 전부터 오늘 읽은 본문 말씀과 함께 몇 가지 질문이 계속해서 제 마음 속에 떠올랐습니다. “나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아니면 적당히 사랑하는 모양을 가지고 꼭 지켜야 하는 의무만을 지키고 있는가?” 수요일날 어떤 말씀을 나누는 것이 좋을까 고민할 때마다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저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여라는 이 짧고 단순한 표현을 통해 제 자신이 너무나 합당치 못한 사람임을 알았고그 때문에 이 말씀을 회피하고 부담이 조금 덜 되는 다른 주제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그러다 주일날 주보를 펼쳤는데공교롭게도 이번 달 암송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마가복음 12장 30절이었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니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마음은 다른 곳에 분산되어 있던 저를 다시금 온전한 사랑의 교제로 불러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사랑하라는 요구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많은 우상 신들이 존재합니다그런데 자신을 믿고 경배하는 대상을 향해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신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이 세상 많은 신들은 사람에게 제물을 바라고 지극 정성을 바라는지 모르지만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이 세상 많은 신들이 사람에게 재물과 부와 명예를 준다고 약속하지만참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참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고 계십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고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첫 번째 명령은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어째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첫 번째이며 가장 큰 명령이 되었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전능자이시며 절대자이십니다.욥기 3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혹은 그대의 범죄가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느냐?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느냐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느냐?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초월해 계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가 없습니다그렇다면 이렇게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시고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으시는 초월자요 전능자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고 계십니까?

 

저는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저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연지 자매에게는 저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선배이든 후배이든 동기이든 다른 어떤 남자와도 단 둘이서 식사해서는 안되고단 둘이서 만나지도 말 것을 요구합니다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저와 동행할 것을 요구합니다연지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제가 다른 자매의 싸이월드를 방문해서 글을 남기는 것을 싫어하고자기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나 일을 더 신경 쓰고 주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왜 그렇습니까너무 쉬운 질문이죠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까다른 어떤 우상 신도 섬기지 말고 절하지도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너무 쉬운 질문이죠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자기 생명을 값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라는 요구를 할 필요가 전혀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전혀 사랑 받을 만하지 못할 때 시작되었습니다또한 우리가 여전히 사랑 받을 만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습니다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변화되거나 또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넘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이기적이고자신의 유익만을 계산하며 살아왔습니다우리는 속마음을 감추면서 조금 더 선하고 좋은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치장하며 살아왔습니다때로는 하나님과도 적당히 계산하고 거래하는 관계로 살아왔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더럽고 추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다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아무런 조건이나 제한도 두지 않으시고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우리의 연약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또한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가득 부어져서 차갑고 메마른 우리 마음이 소생되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형식적인 겉치레 사랑이 아닌 마음을 다한 사랑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으며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어린 아이들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아도 초코렛을 주고 장난감을 주면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한번 찬송 드리고한번 기도드리고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 시간에 앉아있는 그런 겉모습만으로는 결코 만족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래도 이만큼 헌금하고이만큼 봉사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전부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전부 다 주신 것처럼 우리의 온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분산되어 있습니까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의 일들을 계획하거나 걱정하고 있습니까내 영역 밖에 있는 세상의 것들을 동경하거나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까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허영을 쫓아 방황하고 있습니까사람의 마음은 이 세상 것들로 채울 수 없습니다전도서 말씀처럼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며 입은 먹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전 1:8, 6:7). 우리 마음 안에 온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실 때만이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분의 양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노래하며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변함없는 사랑의 교제로 부르시는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 1) 말씀

이제 조금 실제적인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오늘의 본문인 신명기 6장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

그것들을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가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길을 걸어갈 때에든지누웠을 때에든지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을 말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들을 네 손에 매어 표적으로 삼고 네 눈 사이에 두어 이마의 표로 삼으며

또 네 집의 기둥과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집에 앉았을 때나길을 걸어갈 때나누울 때나일어날 때 그 말씀들에 관해 말할 것입니다우리가 하루 중 어떤 주제의 대화를 가장 많이 하는가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도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뭔가 위대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상의 삶 가운데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교회의 집회 가운데 주시는 말씀을 사모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수요기도회주일 오전성경공부주일 오전예배주일 오후예배의 모든 모임을 다 사모하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급해 하고 즐거워합니다.

 

특별히 7절 말씀에서는,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이며부지런히 가르칠 것입니다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라고 했습니다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우리는 자녀들의 귀를 세상의 가치관과 음악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자녀들이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여는 만큼 믿음이 사라질 것이고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여는 만큼 믿음이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모님은 집에 앉았을 때에나누울 때나일어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며,수요기도회주일 오전예배주일 오후예배까지 가능하면 모든 시간 집회에 참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자녀들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영어나 수학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모님이 먼저 믿어야 합니다교회에 있어야 될 시간에 학원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우리는 아이들이 주일날 교회에 한 시간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의 양심이 스스로 알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자녀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으셨고집에서나길에서나누울 때나일어날 때나집 문기둥에 말씀을 기록해 놓고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사람의 어떠한 체험이나 감정이나 느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이 세상의 교육이나 사회적 성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말씀이 아닙니다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순종해온 귀하고 귀한 말씀입니다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가장 가치 있게 드높이고 사랑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놓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의와 왕국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 2) 형제 자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또 한 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요한일서 4장 2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성경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다 같이 마태복음 25장을 보시겠습니다마태복음 25장 34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오라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하니

37 이에 그 의로운 자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주여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나이까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받아들였나이까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께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께 갔나이까하리라.

40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하고

 

이 말씀은 양과 염소로 비유된 민족들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지만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한 가지 원리에 주목하기 원합니다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그대로 주님 자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해 주시고 계심을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습니까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가장 작은 형제 자매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배고픈 형제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음식으로 섬기는 것이며아픈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형제 자매들을 돕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손해를 끼치는 형제 자매들을 용납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자기 유익만 계산하고 따지는 형제 자매들에게 대가없이 주고 또 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무지하고 어리석게 말하는 형제 자매들의 말을 주의하여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주님을 섬기는 것은 뭔가 거창하고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내 옆에 있는 볼품 없는 형제 한 명에게 대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임을 주님께서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오라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누가 왕국을 상속받습니까작은 형제에게 물 한 잔빵 한 조각 건내준 사람들이었습니다소외되고 어려운 형제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작은 관심을 표현한 사람들이었습니다어떤 사람은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 기회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오해했기 때문입니다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작은 형제 자매에게 먼저 다가가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사람들 앞에 부각되고 나타내지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내 마음에 맞는 좋은 형제 자매들도 있지만또 나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나쁜 형제 자매들도 있습니다우리가 얼굴만 봐도 좋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그것은 세리들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나와 생각하는 주파수가 너무나 다른 형제 자매들을 대할 때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우리가 단순히 성경보고 기도하고영적인 책들만 보면서 믿음 생활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영적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게 될 때우리가 얼마나 속이 좁고 유치하고 치사한 사람인지가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게 될 때 내가 얼마나 말에 실수가 많고 교만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인지가 밝히 보여질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교회가 없었다면 점잖고 정숙한 나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우리에게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이고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와 다른 형제 자매가 있음을 주님께 감사합니다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우리는 그런 어려운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어떤 형제 자매들의 어리석은 말을 들을 때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답답해합니다. “어쩜 저걸 그렇게 모를까진짜 바보 아니냐.”라고 생각하면서 미워하고 정죄합니다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다 멸망했을 것입니다.우리가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다르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데하나님은 우리와 얼마나 다르십니까이사야 55장 8절과 9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람마다 나쁜 모습은 감추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나쁜 모습을 다 알지 못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춘 모든 은밀한 죄까지도 다 보시며 알고 계십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우리가 받은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조건도 없고 한계치도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나아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더러운 죄인들도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하게 될 때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내가 사랑해야지 결심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 앞에 나아가 먼저 주님의 사람을 흠뻑 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많은 형제 자매들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은 씻은 여인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많은 죄를 용서받았느니라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니라그러나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많아질 수 있습니까우리가 많이 용서받은 만큼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많이 용서받는다는 것은 죄를 더 많이 지어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우리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과 얼마나 다르고 죄악된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가 받은 사랑의 용서가 얼마나 더 큰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날마다 넘어지는 사람입니다우리는 각자 고질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을 고쳐보고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잘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낙담도 하고 절망도 합니다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십니다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답답해하시고 못마땅하게 여기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우리 주님은 우리가 결심할 때 우리가 또 실패하고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받아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더러움과 연약함을 보게 되지만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초월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을 발견하게 됩니다우리가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도 문제가 많은 형제 자매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지만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합니다우리가 아직 많이 사랑하지 못한다면우리는 아직 적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우리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죄인이라고 정죄한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나는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지결코 실제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어떠한 사랑과 용서를 받았는지 보여주시기 원하고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원합니다.

 

 

정리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다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나의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있습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 마음을 원하십니다형식적인 종교 형식과 겉치레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형제 자매들이 나에게 잘 대해주고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넘칠 때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이 내 안에 감당할 수 없이 넘쳐날 때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의 사랑을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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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7.04.0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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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만난 하나님(창 6:9)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니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창 6:9).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절 한 구절입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노아
여러분은 성경에서 가장 의로운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특별히 구약성경 가운데서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23:35, 눅 11:51).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예수님의 놀라운 예표가 된 요셉,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탄생시킨 모세, 불의 선지자 엘리야. 우리는 많은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이렇게 세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13,14절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 사람의 아들아, 그 땅이 심히 범법하여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내밀고 그곳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며 기근을 그 위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으리라.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은 구할 수 없고, 오직 자기 혼만 건질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대명사로서 노아를 가장 먼저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창세기 6장 9절에서도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히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아가 살던 그 당시에 타락하고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의인이라는 것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노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로 요점을 잡아보았는데,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셋째는 언약의 하나님,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노아가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살펴봄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럼 첫 번째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에녹의 이야기로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세대들이라고 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에녹이 등장하면서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부터 보시면 "21 에녹은 육십오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23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65년을 잘 살다가 갑자기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부터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갑자기 땅에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휴거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시점에서 에녹에게 이 땅에 임할 심판에 대하여 계시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14,15절에서는 이렇게 에녹이 선포했던 말씀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4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은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또한 에녹이 낳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으면 오리라"라는 뜻으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표적으로 세워 그의 죽음과 함께 이 땅에 심판이 임할 것을 대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년도를 한번 계산해 본다면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는지 숫자 계산을 해봤는데요, 잠시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시면 에녹이 65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187년을 살면서 라멕을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잘 보십시오. 26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라멕을 낳기 전까지 187년 더하기 782년을 하니 총 969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맞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손가락을 찍어놓을 년도는 바로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다는 점입니다.
자, 그리고 28절과 29절을 보시면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이 182년을 살고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 넘겨서 창세기 7장 11절에 보시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 번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태어나서 182년을 살고 노아가 600년을 살았으니 그 수를 더하면 782년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뒤에 산 년도도 782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보여주셨던 그대로 정확히 므두셀라의 죽음까지 그 세대의 사람들을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두셀라가 태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 에녹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계속된 경고의 말씀을 주셨고, 또 므두셀라의 마지막 120년 동안은 의의 선포자인 노아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969년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최고로 장수한 사람의 연수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다고 해서 즉시로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언자 요나가 못마땅하고 분노하며 말했던 것처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욘 4:2). 만약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범죄한 즉시로 벌을 주시는 분이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처음으로 일생을 헌신할 때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격하여 헌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친구 되고 죄악을 물 마시듯 행하고 하나님 없이 계속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오히려 선하게 은혜로 대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묵상할 때면 주님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런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답하고 고집센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은혜와 긍휼로 나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로 대하신 만큼, 내가 그것을 발견한 만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저 지체를 사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나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이 나를 향하여 얼마나 큰사랑으로 오래 참으셨는지를 알려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오래 참으신 것에 감격한 만큼 그 은혜가 부어진 만큼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말씀 한 마디로 방주를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만 하늘을 열고 직접 벼락같은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여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모양과 길이와 재료와 창문의 위치를 세세하게 가르쳐주시고 120년 동안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성경의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노아는 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사나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꾀를 부려서 남을 속여 빼앗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한 사람 노아가 온 가족과 함께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우뚝 솟은 언덕에서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묻습니다. 
"이게 뭡니까?", "방주입니다.", "방주요? 그럼 배 말입니까?", "네, 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아니 무슨 배를 언덕 위에 짓습니까? 이걸 여기서 다 만들고 강까지 옮길 작정이세요?"
"아니요,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의 홍수를 일으키실 겁니다. 그럼 자동으로 배가 뜨겠지요?"
"이 사람 정신나갔구먼, 이거 짓는 모양을 보니 하루 이틀 걸릴 일도 아닌거 같은데 온 가족이 고생이구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실 겁니다. 선생님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세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방주에 들어오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이고 됐네요 이 사람아, 정신차려."

시간이 흘러갑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를 짓는다는 소식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다가도 구경꾼들이 좀 모였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온 땅을 뒤덮을 물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입니다! 온 땅이 물로 뒤덮힐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 값은 받지 않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오세요!" 그러면 방주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깔깔대며 노아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120년 간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노아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격려와 위로 없이 이 일을 감당했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찾기 원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웃고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기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맡겨진 일들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잘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짐이요, 고생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격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동행하며 함께 일하기 원하고 계십니다. 


언약의 하나님
첫 번째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다시 한번 노아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7장 5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5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하였더라.
6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7 노아가 홍수의 물들로 인하여 자기 아들들과 자기 아내와 자기와 함께한 자기의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과 날짐승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 중에서
9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이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10 이레가 지나서 땅 위에 홍수의 물들이 임하니라."

이제 방주는 완성되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날짐승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의 그것들의 종류대로 종류마다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왔고, 노아는 그들을 방주 안에서 배치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각각 스스로 두 마리씩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웅장하고 멋진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방금 읽은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이 들어간 이후에 일주일을 더 기다려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우리는 다시 한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이 얼마나 완고하고 어리석은지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이 닫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후두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전에 한국에서 일주일 동안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낮은 지역의 마을들은 삼일만에 다 잠겨버렸다고 합니다. 더더욱 노아의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집들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으로 산으로 오르고 어떤 이들은 방주로 달려옵니다. 
"쾅쾅쾅", "이봐요! 방주 문 좀 열어주세요!! 내 가진 재산을 다 줄테니 제발 문 한번만 열어주세요."
방주의 사방에서 사람들이 두드려댑니다. "제발 우리 아이만이라도 들여 보내주세요!"
사람들은 절규와 통곡으로 부르짖지만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나고 심판의 날이 그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여도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 29:1)는 잠언 말씀과 같이 그들은 120년 간의 책망에 목을 굳게 하고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와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 방주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합니다. 물이 차 올라서 방주를 물 위로 들어올린 것입니다. 40일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뒤에도 계속해서 방주는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이제 창세기 8장 13절을 보시면 "13 제육백일년 첫째달 곧 그 달 첫째 날에 물들이 땅에서 마르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치우고 본즉, 보라, 지면이 말랐더라. 14 둘째 달 곧 그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너와 함께한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시작된 날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 번째 해 둘째 달 십 칠일이었으니, 노아는 약 1년 간을 방주 안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헌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이렇게 보존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여러 가지 언약을 주시는데 오늘 저는 그 중에서 창세기 9장 1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앞으로 다시는 온 땅을 덮을 홍수의 심판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서 가장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믿을 만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아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의 심판을 온 몸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하나님 정말 심판하시는거 아니죠?" 하면서 믿음이 연약함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믿음 없음을 동정하시며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표를 주십니다. 12절에 "12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너희와 함께하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대대로 영구히 맺는 언약의 증표가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노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가 되리라. 14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모든 육체의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들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고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약속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므로 말씀만 하시면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를 증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정말요?"하면서 좋아하더니 이제 매일 밤 아빠에게 그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 정말 저 자전거 사주실거죠? 정말이죠?" 아빠는 이미 말을 했고 정말 사줄 마음이 있지만 아들은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빠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아들은 더욱 좋아합니다. 이제 아들은 매일매일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는 어느 날 자전거 대리점에서 자전거 사진이 들어가 있는 광고지를 얻어다가 아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빠가 이거 사줄거야." 이제 아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합니다. 더 이상 아빠에게 "정말이죠?"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자전거를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제야 아빠가 정말 자전거를 사줄 것이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사주겠다고 말을 했으므로 더 이상 뭔가를 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빠를 믿는 믿음이 연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주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기도 하고 직접 자전거의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주십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언약으로 가득찬 책이며,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의 피를 언약의 피로써, 언약의 증표로써 제시하셨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녀들에게 또 한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또 믿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같이 살아갈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함을 도와주시고자 주님이 오시는 때에 표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노아의 날
주님께서는 특별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표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우리들은 어쩌면 노아의 날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너무나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긴 언제 온다고?"하면서 지내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직접 말로는 "주님이 오긴 언제 오셔?"라고 말하진 않지만 때로 우리의 깨어있지 못한 삶은 그러한 말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듯이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을 때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일하는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오래 참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추수의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흐려지고 약해질 때에, 우리를 내치거나 무섭게 다루지 않으시고 너무나 은혜롭게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과 시대의 표적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노아가 만났던 하나님, 오래 참으시며, 나와 동행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약속하시고 믿음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우리들도, 노아의 날들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친밀히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 설교 일시 : 2007.02.2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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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만난 하나님(창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요셉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입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날 "불평없이 사는게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 설교의 또 다른 제목을 잡아보자면, "불평없이 살아간 요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7장부터 펼쳐지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인 요셉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의 예표를 하나만 뽑으라면 무엇을 뽑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예수님 자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구약성경들을 보기 전에 창세기만 살펴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주 많은 예수님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타난 빛이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 4:4).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값없이 주어진 생명나무, 아담과 이브를 대신해 피흘려 죽은 어린양, 그리고 사람의 의를 예표하는 무화과나뭇잎 대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사람들의 인생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 중 이 요셉이라는 인물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으며, 목자였고,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에게 보냄을 받았으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여 팔렸습니다. 요셉을 팔아 넘긴 형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유다였고, 예수님을 판 제자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옷 벗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모든 것을 맡은 종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거짓 고소를 당하신 것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요셉은 털 깎는 자들 앞의 어린양처럼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두 강도와 못박힌 것처럼, 요셉은 두 명의 죄인과 함께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옆의 강도들 중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듯이 요셉과 함께 갇힌 한 죄수는 용서를 받고 한 죄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처럼 요셉은 파라오의 부름을 입어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것같이, 파라오는 요셉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예표되는 교회를 신부로 삼으신 것같이 요셉은 이방인 아내를 얻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땅에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곡식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두 번째 형제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받아들여졌고, 기근과 궁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펼쳐진 것을 볼 때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 
요셉은 위로 10명의 배다른 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막내인 베냐민 만이 친형제 가운데 친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원래부터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이었기 때문에, 또한 라헬이 너무나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야곱이 노년에 얻은 손자와 같은 아주 귀여운 아들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특별히 채색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었습니다. 당시 염색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옷감에 색을 하려하게 집어넣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37장 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화목하게 말도 하지 못하였더라"(창 37:4). 
가뜩이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요셉이 너무나 건방진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먼 훗날 요셉이 어떻게 높아지리라는 것을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이러한 꿈, 이러한 비전,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앞으로 요셉이 당할 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요셉에게 이러한 통치자의 위치를 주시고자 반드시 필요한 고난과 시련을 먼저 주셔서 요셉이 그 위치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다루시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꿈을 주셨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매"(계 11:15).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노예로 팔려간 요셉
이러한 꿈과 비전, 소망과 목적이 요셉에게 주어진 이후로 요셉의 인생은 이러한 영광을 위한 훈련 코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이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기다리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런즉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그러자 장남이었던 르우벤이 그래도 우리의 형제이니 직접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를 파서 던져놓고 굶겨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르우벤이 나중에 꺼내서 구해줄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르우벤의 계획을 모르는 유다가 요셉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오라,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살붙이니라." 이렇게 되어 요셉은 팔리고 팔려서 이집트의 노예가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호위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요셉을 발견하지 못한 르우벤과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직접 한번 요셉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억울함, 분노, 슬픔, 낙담, 자포자기, 불평과 같은 아주 복합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요셉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집에서 귀하게 사랑 받던 아들이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예로 팔려서 부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터뜨린다면 아주 정당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어릴 때 어머니를 데려가시더니 이젠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빼앗아 가시다니요! 하나님 도대체 제가 잘못한게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했더니 미움만 받고 이젠 낯선 땅에 팔려와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며 고생하다니요!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하며 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요셉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셉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6절까지 읽는다.)
요셉은 종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3절에서는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몰랐겠지만 요셉은 이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일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과 동행하여 주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마다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어리고 가장 낮은 위치의 종에 불과했던 요셉은 어느덧 자기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고통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을 한 단계 더 높이 이끌고자 하십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
17세에 노예로 팔려와 현재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 야곱보다는 아름다웠던 어머니 라헬을 더 닮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매우 잘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 요셉에게 너무나 달콤한 죄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다같이 7절을 보시겠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읽는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고 결코 자신의 죄에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말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죄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20절까지 읽는다.)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한번 요셉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합당하고 적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차라리 내가 범죄하였더라면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어찌 하나님을 따르고도 이렇게 비참해 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인도하고 계시긴 합니까? 하나님 저와 동행하고 계시는거 맞습니까?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악하게 대하십니까?" 요셉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죄수가 요셉과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명은 파라오의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요, 또 한 명은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잔 맡은 사람은 포도나무 가지 세 개가 있고 포도송이가 열리기에 거기서 포도들을 따고 포도를 짜서 파라오의 손에 잔을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빵 맡은 사람은 온갖 구운 음식을 담은 빵 바구니 세 개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새들이 와서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꿈을 해석하여 주었는데, 요셉의 해석대로, 파라오의 잔을 맡은 사람은 삼일 뒤에 직책이 회복되었고, 빵을 굽는 자는 삼일 뒤에 그를 나무 위에 매달아 공중의 새들이 먹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잔 맡은 자에게 직책이 회복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잔 맡은 자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 요셉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슬프게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정말 억울하게 나의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렸지요. 내가 얼마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형들은 날 구덩이에 던지더니 옷을 다 벗기고는 지나가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어요. 원수도 아닌 형들에게 팔린 그 기분을 아시나요? 그 배신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또 노예가 되고 나서는 정말 모든 일을 남이 보던 안 보던 성실하게 일했어요. 노예가 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내가 노예가 된 게 너무나 억울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요. 그래서 결국엔 최고 관리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 못된 여자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지 뭡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셨나봐요." 요셉은 충분히 불평으로 가득한 사람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망을 가지고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야위고 흉한 일곱 마리 암소가 나타나서 살진 암소들을 다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꿈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놀라서 잠이 깼다가 다시 잠이 듭니다. 한 나무 줄기가 있는데 통통하고 좋은 이삭 일곱 개가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늘고 동풍에 바싹 말라버린 다른 이삭 일곱 개가 솟아 나오더니 통통하고 꽉 찬 이삭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파라오가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고 나서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와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때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가 요셉을 기억하고 파라오에게 요셉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41장 2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25절부터 45절까지). 이집트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의미는 바로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대단한 출세요 인생역전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꿈으로 약속하신 요셉의 본 위치였고, 그 전에 있었던 많은 고난과 역경은 다만 이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코스였을 뿐인 것입니다. 


가족들을 만난 요셉
이제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요셉에게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주변의 온 땅에 7년 간 큰 풍년을 주셨고 또 그 이후 7년 간의 큰 기근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집트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땅의 다른 많은 민족들조차 곡식이 없으므로 곡식을 많이 저장해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오게됩니다. 저기 멀리 있었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오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과 형제들이 만나는 이야기는 자세히 한다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에 가시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이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온 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입니다. 다같이 창세기 45장을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읽는다.)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이해한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 넘긴 형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요셉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의 눈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한 요셉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인 50장 15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제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온 지 17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인하여 요셉이 돌변할 것이라 걱정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15절부터 21절까지).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만들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자포자기하며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우리를 모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만드셨고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낮추신 만큼, 아니 낮추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허락하시는 영광의 훈련 코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요셉과 같이 불평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이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넘치는 감사 속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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