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7.01.2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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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만난 하나님(사사기 13:5) 

5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기 시작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사기 13장입니다. 사사기 13장 5절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삼손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삼손은
우리는 이번 주 주일설교 시간에 "자기 눈에 옳게 보이는 길로 가지 말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들었고, 특별히 사사기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아갔던 시대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사사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암울한 책 중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전체적으로 타락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또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하고 바로잡으라고 재판관으로서 세우신 믿음의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함부로 걸어간 기록들을 보게됩니다. 이 재판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을 뽑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삼손"을 뽑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삼손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아니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그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입니다. 많은 재판관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시점부터 기록되고 있는 반면, 삼손은 어떻게 그의 부모님이 그를 낳게 되었는지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재판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되지 않고 다만 몇 년 동안을 재판하였는지만 기록되고 있는 반면, 삼손은 어떻게 죽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손은 총 21장으로 구성된 사사기 가운데 무려 4장을 차지할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재판관들은 다만 한 두 구절의 언급밖에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 삼손이라는 인물을 조명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삼손을 통하여 참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자기 스스로의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간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은 "삼손이 만난 하나님"인데, 만약 누군가가 삼손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삼손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긴 있나요?" 매우 애매한 것 같지만, 성경의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삼손을 분명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손이 자신이 살았을 때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수보다 그가 죽으면서 죽인 원수들의 수가 더 많다는 기록을 읽을 때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정복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처럼 삼손은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삼손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삼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만큼 하나님을 더 참되게 따르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삼손의 탄생
먼저 삼손의 탄생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삼손의 탄생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 앞에서 범죄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십 년 동안 압제를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 마노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셨고 우리가 읽은 사사기 13장 5절의 말씀과 같이 그 아이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기 시작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모태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삼손으로 보자면 모태신앙 중의 모태신앙 아니겠습니까? 삼손은 단순히 모태에서 신앙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사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삼손의 탄생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듯이 우리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우연히 저절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과 계획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삼손의 탄생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것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속한 나사르 사람이 된 것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께 속한 나사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를 향해 놀라운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실 때에는 선한 행위를 위하여, 곧 홀로 선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하도록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입니다. 

삼손의 아버지였던 마노아라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처음에 주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만 나타나서 삼손이 태어날 것과 그가 나사르 사람으로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을 때, 마노아는 하나님께서 그 천사가 다시 한번 더 나타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확실히 듣기 원하는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주의 천사가 하나님인지 모른채 잘못된 대상에게 경배하려 하였지만 이 시대의 영적 수준이 낮은 것을 감안해서 본다면 이 마노아라는 사람은 너무나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마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잘 주의하여 삼손을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나사르 사람
이제 잠시 나사르 사람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마 "나실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나사르 사람에 대한 명령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민수기 6장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6장 1절에서 8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자기를 구별하여 나사르 사람의 서원을 하고 자기를 구별하여 주께 드리거든 
3 그는 포도즙과 독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고 포도즙의 식초나 독주의 식초를 마시지 말며 어떤 포도즙도 마시지 말고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라.
4 그는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씨에서부터 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지 말며
5 자기를 구별하기 위하여 서원하는 모든 날 동안 자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라.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날들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할 것이요, 자기 머리털을 자라게 할 것이며
6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에는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 것이요,
7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들로 인하여 자기를 부정한 자로 만들지 말지니 이는 그의 하나님의 거룩히 구분하심이 그의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이라.
8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주께 거룩한 자니라.

이 여덟 구절에서 나타난 나사르 사람의 특징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사르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은 씨에서부터 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어떤 시체에도, 심지어 자기 가족들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포도, 두 번째 머리털, 세 번째 시체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또 특징을 찾는다면 이 나사르 사람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번 구분했다고 해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나온 것처럼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날들의 기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8장에 나타난 나사르 사람에 관한 율법과 삼손을 비교해 보면 한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민수기에 나타난 나사르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나사르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하고 그 기간을 정했던 반면, 삼손은 날 때부터, 아니 이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나사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다른 나사르 사람들은 큰 결심을 하고 자신을 구별했다면, 삼손을 날 때부터 구별된 원조 나사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삼손의 인생이 너무나 불행하고 불쌍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계획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선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삼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삼손에게 가장 좋고 선하며 삼손이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블레셋을 칠 기회
이제 사사기 14장에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할 때가 된 삼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삼손이 딤낫에 내려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았사온즉 이제 나를 위하여 그녀를 데려와 아내로 주소서, 하니
3 그때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을 딸들 중에나 혹은 내 온 백성 중에 여자가 없어서 네가 가서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아내를 취하여 하느냐? 하매 삼손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그 여자가 나를 매우 기쁘게 하니 나를 위하여 그녀를 데려오소서, 하였더라.
4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알지 못하였고 또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더라. 

주님을 위하여 구별되어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할 원조 나사르인, 모태 나사르인인 삼손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4절은 매우 주목할 만한데, 어찌보면 오해하기가 매우 쉬운 성경구절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삼손의 이러한 행동이 주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억지로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도록 시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고 또한 삼손을 통하여 그렇게 하기로 예비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삼손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삼손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안중에 없고,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도 안중에 없고, 원수 블레셋에 대항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러한 삼손을 이용하여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 29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일으켜 블레셋을 치기로 계획하셨으나, 삼손은 자기를 위하여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주관하셔서 삼손이 블레셋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의지와 원함을 하나님께 드려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의 의지와 원함을 고집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나를 그분의 예비하신 길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협조적인 삼손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삼손 자신에게는 어떠한 기쁨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원으로 간 삼손
이제 14장 5절,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 그때에 삼손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딤낫에 내려가 딤낫의 포도원에 이른즉, 보라, 젋은 사자가 그를 향하여 소리 지르더니
6 주의 영께서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매 그가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염소 새끼를 찢는 것처럼 그 사자를 찢었으나 자기가 행한 일을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삼손은 드디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설득했다기 보다는 억지를 부려서 부모님을 이겼을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님을 모시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그 여인이 있는 딤낫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혼자서 딤낫의 포도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나사르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일 세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사사기에서는 삼손이 왜 딤낫의 포도원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젊은 사자가 나타난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독실한 부모님의 주관 하에 포도를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부모님을 이기고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된 이 삼손은 어쩌면 이제는 또한 자기를 위하여 포도를 먹기 위해 포도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경고로서 젊은 사자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은 삼손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삼손이 잘못 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삼손이 나사르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자임을 기억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포도열매를 먹으려고 시도한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삼손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새끼 염소를 찢듯이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삼손이 얼마나 멋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근육과 상관없이 주의 영으로 그에게 임하셔서 큰 힘을 발휘하게 해주셨습니다. 삼손은 이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위하여 구별된 원조 나사르 사람 삼손은 여전히 나를 위하여 자기에게 옳게 보이는 길, 자기 스스로 행복하게 보이는 길로 열심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시체와 꿀
이제 8절과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 얼마 뒤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되돌아 가다가 돌이켜서 그 사자의 사체를 본즉, 보라, 사자의 사체에 벌떼와 꿀이 있으므로
9 그가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가면서 먹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주어 그들이 먹게 하였으나 자기가 그 꿀을 사자의 사체에서 취하였다고 그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나사르 사람의 금지사항 또 한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죽은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의 시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별되어 있으라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에게 경고로 주어졌던 그 사자를 보면서도, 오히려 담대하게 사자의 시체로 다가가서 꿀을 가지고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몰래 먹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님에게도 줄만큼 이 삼손은 아주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는 제멋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포도원에 갔던 일이나, 사자의 시체를 만진 일에 대해서 오히려 수수께끼로 장난을 칠 만큼 삼손은 아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삼손은 신혼부부가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풍습에 따라서 친구들 서른 명을 불러서 일주일 간 잔치를 벌였습니다. 삼손은 그의 친구들에게 얇은 옷과 겉옷 서른 벌씩을 내기로 걸고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함부로 행한 일들에 대해서 농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친구들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삼손 앞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기쁘게 잔치를 해야할 때 계속해서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너무나 괴로웠던 삼손은 아내에게 답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친구들은 수수께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18절에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그 도시의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하므로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을 갈지 아니하였다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화가 난 삼손은 다른 동네로 가서 서른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그 옷을 빼앗아다가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 삼손에게 임하여 힘을 더해주셨고,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삼손을 어떻게든 인도하셔서 원래 계획하셨던 대로 이끌고 계시지만 삼손의 관점은 여전히 자기를 위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도 했지만 결코 삼손 자신에게는 아무런 행복도 유익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잔치에서 삼손은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자신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아내는 잔치하는 내내 그의 앞에서 울었고, 삼손은 괴로웠습니다. 친구들이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하는 것을 즐거워할 작정이었던 삼손의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고 화가 난 삼손은 원래 살던 자기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자기 딸을 버렸다고 생각한 삼손의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지만, 삼손은 여전히 스스로 옳게 보이는 길, 스스로 좋게 보이는 길로 고집스럽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라맛레히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삼손은 다시 아내를 만나려고 딤낫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고, 장인은 아내의 동생과 결혼하라고 말하며 삼손을 달래었습니다. 삼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삼손은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을 다 태워버렸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그 원인을 제공한 장인어른과 삼손의 아내를 불태워 죽이게 됩니다. 삼손은 또 그 일로 인해서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잡히는 대로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유다로 내려가게 됩니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하여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 나사르 사람 삼손을 한번 보십시오. 그의 인생을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너무나 비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로 내려간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모아 올라왔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밧줄로 묶은 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이때 주의 영이 임하시고 삼손은 자신을 결박한 밧줄을 불탄 실과 같이 툭툭 끊어냅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삼손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셨던 대로 삼손을 통하여 자신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시지만, 삼손은 너무나 비참한 가운데 자신의 분노를 내뿜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께 선택된 이 삼손, 너무나 행복할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은 그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가엾게 망쳐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삼손은 목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삼손의 입에서 주님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같이 15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주를 부르며 이르되, 주께서 주의 종의 손에 이 큰 구출을 주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손에 떨어져야 하리이까? 하니라.
19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턱의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서 물이 나오므로 삼손이 그 물을 마시매 그의 정신이 돌아와 그가 회복되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라 하였으니 그것이 이 날까지 레히에 있더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손은 너무나 못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거 맘대로 다하더니 이제 와서 자기가 죽게 생겼으니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 내가 너 진짜 멋있게 사용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죽어라."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에게 물을 주셨고 삼손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인내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주님 더 많이 알아가기 원합니다. 

삼손의 죽음
이제 정신을 좀 차릴 줄 알았던 삼손은 아직도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6장 4절에 보시면 "그 뒤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해야할 나사르 사람이 계속해서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첫 번째로 사랑해야할 삼손은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영주들은 이 들릴라를 매수하여서 어떻게 하면 삼손의 큰 힘을 제거하고 그를 죽일 수 있을지 알아내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6절에 보시면 들릴라가 이렇게 묻습니다. "원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내게 고하고 또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하여 괴롭게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 아예 대놓고 삼손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 삼손의 마음은 너무나 어둡고 어리석기만 합니다.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도 너무나 즐겁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어리석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는 사인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어리석게 자기 뜻을 고집하며 걸어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삼손은 거짓말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말린 적이 없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 일곱 개로 나를 결박하면 된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줄로 나를 단단히 결박하면 된다.", "짜서 만든 천으로 내 머리털 일곱 타래를 엮으면 된다." 삼손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잘못된 것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삼손의 눈은 완전히 가려졌으며 계속해서 어리석은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어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같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자기의 말들로 그를 짓누르매 삼손의 혼이 괴롭게 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더라.
17 이에 삼손이 자기의 온 마음을 털어놓고 그녀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노라. 만일 내 머리를 밀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내가 약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같게 되리라, 하매

삼손의 힘은 삼손이 말한 것처럼 머리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삼손과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하나님께서 삼손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삼손은 자기의 온 마음을 이방 여인에게 주어버렸고, 스스로 나사르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삼손은 머리털을 잃었고, 주님의 임재를 잃었고, 눈을 잃었고 원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21절에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그를 가자로 데리고 내려가 놋 족쇄로 결박하니 그가 감옥 집에서 맷돌을 돌리니라."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할 수 있었던 삼손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 비참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기를 배신하였고 이제 삼손은 그야말로 모두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삼손은 이때서야 참으로 하나님께 돌이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노라. 그러나 나는 참되게 나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쳐본 적이 없었노라. 하나님은 나에게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하셨으나 나는 블레셋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도다." 

그러나 자신의 선물들과 부르심에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삼손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참을 만큼 참았다. 너도 인정하지? 넌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쓰레기같은 존재야!" 우리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나사르 사람이 해야하는 세 가지를 전부 어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격이 없는 우리들도 여전히 사랑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고 항상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삼손을 붙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큰 축제 열었습니다. 자신들의 신 다곤이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드디어 넘겨주셨다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손을 그들 가운데 끌고 나와 모두의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2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그들이 이르되, 삼손을 불러 우리를 위해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감옥 집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기둥들 사이에 삼손을 세우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내가 이 집을 지탱하는 기둥들을 더듬어 찾아서 그것들에게 기대도록 허락하라, 하니라.
27 이제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며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영주들도 거기 있고 지붕에도 삼천 명가량의 남녀가 있더니 그들이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그 집을 지탱하며 받쳐 주는 두 개의 중간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고
30 이르되,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 하며 힘을 다하며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영주들과 온 백성을 덮으니 이처럼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많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삼손의 생애에 있어서 아마도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는 기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손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정리
우리는 오늘 이번 주일설교의 흐름과 맞추어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길로 걸어간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행복해 지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는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향한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삼손은 고집스럽게 자기 뜻대로 걸어갔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삼손이 만약 스스로 행복하려는 길말고, 스스로 좋게 보이는 길말고,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에 원하시는 길을 찾고 걸어갔다면 그의 인생은 사사기에 나오는 어떠한 재판관보다도 영광스럽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택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뜻을 물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제일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일을 시킬 것 같다는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온 우주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선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좋은 분인지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주님 나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더 많이 보여주셔서 내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하나님의 뜻은 참되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뜻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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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6.12.06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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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가 만난 하나님(욘 4:2)


(욘 4:2)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서 4장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요나서 전체가 되겠지만 우선은 요나서 4장 2절 한 구절만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요나가 만난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그리고 교제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요나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께 까불고 대들었던 대언자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땅의 심장 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위대한 이가 여기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요나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구약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요나가 들어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제가 요나서에서 가장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요나는 뭔가 건방진 태도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이해시키고 한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면에서는 아주 꾸밈이 없고 진솔 담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니느웨로 가라
먼저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요나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3일 동안 걸어야 다 돌 수 있을 만큼 큰 도시였고,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만 해도 십 이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악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시고 요나를 통하여 경고를 주셔서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요나는 일어나서 욥바로 가더니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배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시 성경 뒤에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뒤에 부록에 보시면 지도 12번 분단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해(지중해)라고 된 곳 오른편에 욥바의 위치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도 13번을 보면 주황색으로 아시리아 글자 위에 니느웨를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과 가까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갈 때는 굳이 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라는 니느웨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떠나려고 욥바로 가서 배를 탄 것입니다. 제가 지도에 다시스가 없길래 이곳저곳 찾아보았는데, e-sword라는 공짜 성경검색 프로그램에서 몇가지 설명을 찾았습니다. 현재의 지명과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제미에슨, 파우셋과 브라운 주석(Jamieson, Fausset and Brown Commentary), 아담 클라크 주석(Adam Clarke's Commentary on the Bible), 등등(TSK) 몇 가지 설명을 찾아보니 지브롤터 해협 옆에 있는 스페인의 한 도시 Tartessus가 아니면, 바울이 태어났던 길리기아의 다소(Tarsus)일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앉았던 것도 아니고 아주 적극적으로 배를 타고 반대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요나서 4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요나는 당시에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다스린 나라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해서 용서를 받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바꿔서라도 니느웨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열고 음성을 내시거나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역을 하기 원하십니다. 

오 잠자는 자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로 나아가는 요나를 돌이키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말씀에 불복종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큰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종교적인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현실적인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온 배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때 유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있었다면 유서를 써서 유리병에 담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 요나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는 배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눈을 꾹 감고 잠을 잡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는 죽어도 니느웨 못 갑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우리 민족의 원수들인데 어떻게 회개해서 살으라고 합니까? 다 멸망하게 내버려두세요."

선장이 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또 무거운 짐이 있으면 바다에 던지려고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오 잠자는 자여, 어찌 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리라." 아마 선장은 속으로 "이게 미쳤나, 이런 상황에 잠이 오냐? 넌 믿는 신 없어? 좀 살려달라고 불러봐."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절에 보면 이제 선원들이 모여서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많은 경우 비나 눈이나 폭풍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가 들거나 배탈이 나면 춥게 다니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짓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무조건 우리의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요나와 같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과 성령님의 음성을 통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문제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는데도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아주 분명하게 요나를 지적하십니다.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집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는 어디냐? 너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9절에서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주 곧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하노라."

고래를 예비하신 하나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대로 배를 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마저 사용하셔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요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요나와 한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큼직한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류인 물고기냐, 포유류인 고래냐를 가지고 따지고 고래상어나 청상아리다 많은 추측들을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물고기가 무슨 종류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며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 있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폭풍우를 예비하셨고 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아주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도 하나님의 자상한 돌보심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많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2년이라는 세월이 아까워서 군대를 어떻게든 빠지려고 하는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학력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군대를 뺄 수 있도록 예비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리 다 계획한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절묘하게 공익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제가 공익을 끝내고 나서부터는 학력으로 조건이 안되던 사람들도 신체만 건강하면 무조건 현역으로 가게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에서 예비해 주신 것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저를 더 만나주시고 저를 얼마나 섬세하게 이끄시는지 알려주시려고 많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방만 빌려서 쓰는데도 밥도 잘 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시는 좋은 주인 아주머니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또 월급을 안주는 사장님을 예비해주셨고 그 가운데 모든 월급을 무사히 다 받도록 해주셨습니다. 또 이제는 새로운 좋은 사장님을 주셔서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며 예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처럼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다가 갑자기 일이 생기면 급하기 일을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고 계십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의 이러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돌이키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0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다시 니느웨로
이제 3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3절에 보면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이제 드디어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최소한 3일을 돌아야 다 다닐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4절에 나온 것처럼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주 지멋대로인 대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니느웨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돌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나온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이키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이제 사십 일 뒤에는 다 망해버릴거니까 그리들 알어!", "이 저주받은 것들아, 니들 얼마나 가증한 죄를 지었는지 이제 사십 일 뒤에는 그냥 하늘에 불이 떨어지든 땅이 뒤집히든 다 죽을거니까 그리들 알아!" 아마 이런 저주의 뉘앙스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만 선포하고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앗시리아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앗시리아의 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의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킨 것을 보시고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셔서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이제 겉으로 보자면 요나의 사역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바울과 사도들은 수십 년을 복음을 전하러 다녔어도 이렇게 요나처럼 수많은 사람을 한번에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루만에 어린이만 십이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를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다 회개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걸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이런 멋진 고백을 감사의 눈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서 하는 이 고집불통 요나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조차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럽고 가증한 죄악 가운데 묶여있을 때에 조차, 우리가 거칠고 교만하며 어리석을 때에 조차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3절에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보면 볼수록 아주 웃기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 거봐요. 내가 이 원수 같은 놈들 그냥 멸망시킬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해 줄지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우리 민족이 죄를 지었어도 이렇게 잔인하고 더러운 놈들을 용서해 주다니요. 저는 분해서 못 살겠습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일제시대에 자신의 부모와 가족을 전부 일본에 잃은 한 사람에게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이 한 면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4절에 보면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아우 진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시키면 하는거지, 진짜 말많네. 죽고싶어? 그럼 니 소원대로 그냥 죽어버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요나의 마음을 얻고 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요나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멸망하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하여 도시의 동쪽 편에 앉아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사십 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거짓말하지 마옵소서. 이제 삼십 구일 남았나이다. 삼십 구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소서. 저 원수들을 제발 좀 멸망시키소서."
아주 건방지지만 그러나 진솔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절에 "주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 넝쿨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심히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 볕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야 니가 뭘 잘했다고 자꾸 고집이야, 아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하면서 숲 속에서 곰이나 사자를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요나는 그늘이 생겨서 너무 좋아하면서 계속 도시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삼십 팔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소서. 우리 민족의 원수를 나의 눈앞에서 멸망케 하옵소서. 믿슙니다. 아멘!"

7절에 보면 하나님께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르러서 이제 막 시원한 감이 없어지고 해가 막 뜨려할 때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그늘이 필요하기 시작한데 때마침 넝쿨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8절에 드디어 해가 뜹니다. 해가 뜰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또 뜨거운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요나 한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대한 폭풍에서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교제하시며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는 기진맥진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은 줄줄 흐르고 뜨거운 동풍에 숨숨 팍팍 막히고 아주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요나는 발라당 누워서 "주님 죽여주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내게 더 낫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가 응수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0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 하지도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11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구약성경이 다만 이스라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민족설화라면 이런 말은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나서 자체가 존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을 기록해주고 계십니다. 

마무리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뭐가 대단하길래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을 들여가며 상대해 주십니까? 우주 저 멀리서 바라볼 때 한낮 점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뭐가 이쁘고 뭐가 잘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십니까?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십니다. 요나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예비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시고,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작은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요나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득하시고 또 알려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과하고,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땡깡을 다 부리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해가 안되면 따지고 죽겠다고 드러눕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고 용납하면서까지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진실한 친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고 주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지만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알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원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더 많이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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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6.06.1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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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


(창 22:15-18) 『15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니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시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간증과 함께 전했던 말씀인데, 먼저 저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되었고 또 한국에 갈보리 형제 자매님들도 인상깊게 들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와서도 이 말씀을 나누고 싶었었는데 오늘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아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저는 한국의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었을 때 약 5년 가량,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말씀을 준비할 때는 가능하면 재미있게 해야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준비하게 되고 또 성경을 읽을 때 더 깊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보려고 시도하곤 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자료들과 또 지혜를 주셔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이 부분만을 다루지 않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면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하던 것처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재밌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에 하나였고 매우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는 큰 가족 공동체 안에 있었고, 나름대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많은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라는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성품을 조금 엿보자면, 그는 매우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거나 다른 아내를 얻어서 자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평생 자기 아내인 사라 만을 사랑하고 아끼는 강직하고 자상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봐, 저 양반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아들이 없는게 흠이야. 아들만 있으면 딱일텐데." 아브라함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놓고 아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저도 부모님만큼 그리워하진 못할지라도 부모님이 그립고, 또 가끔씩 갈보리교회에서 올려주는 찬양과 간증 mp3를 들으면 성도님들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면서 그리운 마음이 커지곤 합니다. 우리는 정들고 사랑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면 이렇게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누구와 떨어지고 그리워하기 이전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허전함, 외로움, 상실감, 상처, 버림받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별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허전함과 외로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이든 이뤄보려고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실된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또 대가족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살았지만, 그 마음에 허전함이란 것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아들만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텐데. 내 인생이 더 이상 허전하지 않을텐데."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허전함을 허락하십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백 명의 자식을 낳고 또 여러 해를 살아 그의 햇수의 날들이 많을지라도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또 그가 묻히지도 못하면 내가 말하건대 유산된 자가 그보다 나으니라"(전 6:3). 
아브라함이 겉으로 백 명의 아들을 가진다 해도 그의 내면에 있는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유산된 아기보다 못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이러한 갈증이 있습니다. "내가 아들만 가진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참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고, 너의 자손에게 줄 땅이 있으니, 너의 씨에게 복을 줄 테니 너는 먼저 너가 정을 붙이고 사랑하며 관계하고 붙잡고 집착하던 모든 것, 너의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서 나오라."

지금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에서 아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만족할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들을 줄테니 우선 그 만족하던 모든 상황을 떠나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이 많은 아브라함은 쉽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친구들과 정을 떼는데는 성공을 했지만 가족들과는 정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기까지 머뭇머뭇하며 떠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죽은 형제인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롯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으니 여차하면 조카인 롯을 자기 아들로 삼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제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나와 정들었던 사람들을 떠나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심이었어요.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던지... 그렇지만 저에게 아들만 있다면 행복해 질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아들을 주세요!"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때 바로 아들을 주셨다면 창세기는 10장 이상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는커녕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도 많고 곡식도 많았던 이집트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고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사람도 많았는데, 이제 새로운 문명지 이집트에 들어가려니 막상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꾸미고 한평생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온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아무래도 파라오가 아름다운 사라를 보고 자기를 죽일 것이고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졌고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살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파라오에게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그 먼길을 떠나왔고, 이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한평생 지조 있게 지켜온 아내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신세입니까? 신이난 파라오는 사라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들과 종들을 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아들 없이 그냥 고향에서 살 걸. 롯을 그냥 아들로 삼고 메소포타미아에 있을걸. 한평생을 정직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내가 무서운 거짓말로 아내를 팔아 넘기고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무엇이든 하실 수 있거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아들을 주신다던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길래 누가 너 롯을 데리고 나오래? 내가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라고 했지? 왜 롯을 데리고 나왔어? 롯도 친족이야, 아니야?"하면서 다그쳐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가나안 땅에 있으라고 했지 언제 이집트에 내려가라고 했어! 기근이 든거는 시험이야, 시험, 그 정도도 통과할 믿음이 없느냐? 너가 다 망쳐놓았으니 이제 너가 알아서 살아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그리고 아내를 팔아 넘기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넌 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죄 값을 치르고 멸망하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게 큰 재앙으로 재앙을 내리시매"(창 12:17).
거짓말은 누가 했습니까? 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네,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상해 오던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강력하고 무서운 분이어서 한가지 실수만 하더라도 책잡고 심판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되 조건 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신실하게 선하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전함과 버림받은 마음을 그러한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파라오는 아브라함 때문에 큰 재앙을 당했지만 아브라함을 감옥에 넣거나 해치지 않고 오히려 무사히 그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이상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다 망쳐놓은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여태까지 자기가 아들처럼 데리고 온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3장 9절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이상한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롯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허전함과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아들과 같은 유일한 존재인데 어떻게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양을 더 줬으면 줬지, 손해를 봤으면 봤지, 어떻게 아들 같은 조카를 떠나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롯이 없어도 그렇게 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롯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내게서 갈라서라. 나는 너가 나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버리라고 강요하시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풀리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족한 만큼 우리의 허전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끼고 다녔던 롯을 떠나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하나님,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 우리도 경험하기 원합니다. 

다같이 창세기 15장을 보시겠습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이 말씀은 아브람이 롯을 떠나보낸 뒤에, 롯이 거하던 소돔 땅에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롯을 구출해 온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전쟁은 가나안의 네 왕국과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이 벌인 것인데, 네 왕국 연합이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의 연합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훈련받은 종 318명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도와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이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내가 너의 방패고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란다. 내가 너에게 정말 주려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나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아브라함의 관심은 변함 없이 온통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약속하시고 또 짐승을 쪼갠 가운데를 혼자서 가로질러 가심으로 피의 언약까지 맺어주셨습니다. 

75세 때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10년 간 아들을 기다렸어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답답해하던 아내 사라가 여종인 하갈을 아내로 주어서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99세 때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의 언약을 주시면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너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 하는 "이삭"이라 지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번 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라도 장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정도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기다려도 안되니까 이스마엘을 낳고 지금 또 이스마엘이 13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들 소리하십니까?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이 말은 이미 이스마엘이 다 컸다는 소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하나 주십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라오가 아비멜렉으로 바뀐 것 말고는 창세기 12장에 나왔던 내용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사라를 자기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속이고서 아비멜렉에게 넘겨줍니다. 사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75세 때 가나안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께서 입학시험으로 주셨던 것인데, 이제 졸업할 때가 되어서 졸업시험으로 어려운거 안하시고 1학년 때 봤던 시험 그대로 내셨습니다. 그런데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75세 때 써냈던 답안지 그대로 적었습니다. 24년 동안 아브라함이 변했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굳세어지고 승리를 해야 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1학년 때 봤던 시험문제를 아직까지 못 푸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하면 총 12년이고, 대학교 4년 석사 박사를 6년 잡아서 다 더해도 22년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믿음에 관한한 이제 박사학위를 딸만한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봤던 아주 기초적인 시험을 또 틀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그래도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고향도 떠나왔고 롯도 내보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아들을 주실래야 주실 수가 없겠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엎드려서 웃기나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이스마엘이나 낳더니만 이제는 가장 초보적인 시험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포기하실거야. 이 멍청이, 구제불능, 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이구나. 나이만 먹었지 믿음이 하나도 안 자랐어. 이제는 사라도 완전히 잃어버린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브라함이 아닌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다같이 창세기 2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친히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수태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정한 때에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 우리의 실패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오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올바르고 흠이 없는 사람만 사랑하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패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으실거야."하면서 오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그(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을 믿을진대 그것을 의로 인정받을 우리도 위한 것이니라"(롬 4:22-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믿음이 좋았으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거야. 아 내가 얼마나 큰 결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지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을 주셨어야 마땅하지, 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이삭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이제 우리는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에 이르렀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정말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도 아시고, 그가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이상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번제 헌물이란 것은 그를 칼로 찌르고 조각조각 잘라서 하나님 앞에 불태우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우상 신들도 그렇게 무서운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준비합니다. 아침 일찍 월드컵을 보려고 일어난 젊은이들처럼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물을 챙겨 모리아 땅으로 출발합니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봤던 시험마저 틀렸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100점 만점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걸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희생을 하고 헌신을 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옆에 아브라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잠자리에 누운 아브라함은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끌벅적하게 정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살았지만 너무나 허전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에 갔다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망칠 뻔한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나오게 해주신 이상한 하나님을 떠올려 봅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이스마엘을 낳고, 아비멜렉 앞에서 다시 한번 사라를 빼앗길 뻔한 모든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아브라함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허전한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만족하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로 드릴지라도 여태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고자 다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귓가에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너무나 행복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큰 결단과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한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만족했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1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을 걸고 맹세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얻고 완전히 만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실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세상의 여러 가지를 찾고 주목하고 집착하고 붙잡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아도,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다 짊어져도, 또는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던 것처럼 백 명의 자식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 허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참되게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오 목마른 모든 자들아, 너희는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 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너희 혼이 기름진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니라"(사 55:1-3).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번 만나지 말고 매순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완전히 만족될 때까지 그분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5.12.2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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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시 138:6-8)

제목 : 주의 손
본문 : 시편 138편 6-8절
6 주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이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시편 138편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다"하는 말씀을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손"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지나고 있는데 이렇게 다친 것을 계기로 손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주의 손을 가까이 대하면서도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또 그것에 얼마나 감사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의 손
우리는 성경에서 "주의 손"이라든지 "주의 오른손"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며,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붙잡는 것은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이집트 한가운데서 행할 모든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뒤에야 그가 너희를 가게 하리라"(출 3:20).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모든 이적들이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적을 주실 때에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고 모세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신 후에 "네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셨을 때 모세의 손에 나병이 생겼고 다시 한번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니 그것이 처음의 손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손을 올리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배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손이라는 단어만 주목해 보아도 성경에서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막대기는 죽어버린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모세의 손을 통해 살아있는 뱀이 되기도 하고, 이집트의 모든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이라 불리던 나일강을 피로 물든 죽음의 강으로 만들기도 하고, 거대한 홍해바다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늙고 기운이 빠진 모세, 마른 막대기와 같은 모세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다면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사무엘의 평생동안 블레셋인들과 전쟁이 없었고,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엘리야는 아합의 수레를 앞질러 달려갔으며,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욥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정금과 같이 연단되었고, 하나님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타국의 통치자들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창조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모든 역사들과 사도들 위에 임하신 주의 손의 권능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진리들로 인하여 전율할 것입니다. 

구원의 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28-30).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의 팔로 붙잡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손을 떠올릴 때 우리는 못 자국난 손을 기억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라 되라"(요 20:27).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님의 권능의 손은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영광과 사랑의 상처를 지닌 손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께 우리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주 예수님 자신을 주의 팔이요, 주의 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는 그가 주 앞에서..."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여기는 "그가"라고 부른 주인공은 바로 "주의 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주의 팔"은 누구입니까? 권능과 능력의 주의 팔이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고운 모양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모습으로 이 땅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과 주의 팔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의 권능의 오른손이신 주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오른손을 다치고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주의 손을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는 주의 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주의 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은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젓가락질도 하루 3번씩 꼬박꼬박 연습을 하니 지금은 밥풀도 집고 라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 해졌습니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오른손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손을 다치고 나서 집에 돌아온 뒤 처음 저녁식사를 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숟가락질도 젓가락질도 모두가 생소한 왼손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하나를 풀고 끼워 넣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수할 때, 양치할 때...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모든 것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와 핸드폰이 모두 왼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물건을 사기 위하여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에도,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붙잡을 때에도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차라리 왼손이 다쳤더라면 조금 덜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문득 마태복음 6장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의 오른손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크고 작은 일들에 수고를 해왔습니다. 왼손으로 그 동안 오른손이 해왔던 많은 일을 해나가면서 오른손이 어떤 힘든 일을 해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조금 하다가 손에 쥐가 나려고 한 적도 있었고, 단추 하나를 끼지 못해 몇 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 왼손으로서는 오른손의 수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못 자국난 주님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손의 역할을 감당하는 지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몸 안에 두셨느니라"(고전 12:18). 우리 중 누구는 눈의 역할을 감당하고 우리 중 누구는 발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중 누구는 손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지체들을 섬기고 있든지 우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손길은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시며 징계하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안아주시며 품어주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손은 오늘날 우리 지체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주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많은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를 돌보시며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손길이 교회와 상관없이 임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께 긍휼을 얻고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부르셔서 몸을 이루는 한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떠나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려는 모순 가운데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며 쉽게 지나치는 형제 자매들의 미소와 관심이 곧 우리와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만 왼손과 같이 그저 섬김을 받는 생활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른손이 얼마나 큰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손이 다친 이후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거나 해야할 일을 발견할 때마다 저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오른손에 발동이 걸리는 바람에 의지적으로 그것을 멈추는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해왔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왼손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오른손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오른손이고 왼손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로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왼손과 같이 알게 모르게 섬김을 받기만 하던 지체가 이제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지체들을 위해 주님의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오른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왼손인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에 붙들린 사람의 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린 한 사람이 지은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힘입어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 소년, 죄를 범하고는 자신에게 제시된 세 가지 형벌 가운데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손에 떨어져 벌을 받고자 했던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손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6 주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이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손에 붙들린 다윗은 겸손하게 주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주의 손을 붙들었으며, 주의 손이 자신을 완전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은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며 주의 오른손을 힘입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마른 막대기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우리의 가련한 인생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여러분 옆에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주님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여 낙담하거나 불평하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수고하는 지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왼손인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나를 위해 오른손의 역할을 끊임없이 해온 지체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주님의 손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한 지체들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또 내가 오른손으로서 섬겨야할 지체들을 발견한다면 그것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그 지체들이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훗날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왼손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다만 오른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임했던 인자하고 긍휼히 풍성한 주의 손을 기억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며 오늘 내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손으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지체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이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으며 병들었을 때에 찾아와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내게 왔음이니라.
37 이에 그 의로운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라,
40 그러면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5.01.12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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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신 주의 이름(시 138:2)

제목 : 가장 크신 주의 이름
본문 : 시편 138편 2절
2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

오늘 저와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2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가장 크신 주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은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above"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주님의 모든 이름들보다 위에 있다고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호칭들, 닉네임, 또는 별명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만해도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주민등록상으로 “이현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회와 친척들과 가족들이 부르는 “이승선”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인터넷 상에서 또는 용산침례교회의 루이스 목사님이나 헤더, 제시와 같은 외국 친구들을 위한 “로빈”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름은 아니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은 저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교회 안에서는 다만 “형제”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아들아”하고 불리기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만 “친구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많은 호칭들이 저 한사람을 가리키면서도 각각 한가지 특징들을 부각하여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5:15).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요 20:17).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너무나 중요한 표현들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호칭이 어떻게 죄인에서 의인으로, 불순종의 자녀들에서 순종의 자녀들로, 마귀의 자식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론
성경에 나타난 많은 주의 이름들

그러나 성경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름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 자신의 이름들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각각 주님의 어떠하신 특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양, 반석, 방패, 망대, 요새, 전사, 주, 여호와,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 전능자, 위로자, 상담자, 영원하신 아버지, 부활의 첫 열매,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 목자, 참 포도나무, 부활, 생명, 길, 진리, 사랑, 생명의 빵, 임마누엘... 
이러한 많은 이름들은 주님 한 분을 가리키면서도 각각의 단어가 서로 다른 면에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다만 미사여구나 장식을 위한 표현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잘 묘사해 주고 알려주는 귀한 단어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은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 전에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로 받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주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약에서 잃어버린 자를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다같이 빌립보서 2장 6-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시키시고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토록 낮아지셨던, 그토록 비참하게 멸시를 받으셨던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시라 시인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목을 곧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그 날에 예수님의 이름 앞에 완전히 굴복을 당하고 꺾임을 당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땅 아래, 곧 지옥에 있던 모든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였던 자들도 그 날에는 수치 가운데 그분을 높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시라 시인하며 찬양한 우리들은 그 날에 수치를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분을 높이며 찬양할 것입니다.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신 이름 - 주의 말씀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본 시편 말씀에서는 주의 모든 이름들 위에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또는 기록되어 글로 적혀있는 말씀이라고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말씀”이라는 주의 이름에 대하여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서 가장 큰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지셨던 이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가지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 나타내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잠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서신들 중에서 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그 까닭은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이는 하늘에 증언하시는 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물과 피로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육체를 입고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실 때에는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계심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역시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주님을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보시면 계속해서 “그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절에 “그분께서”, 3절에 “그분에 의해”, “그분 없이”, 4절에 “그분 안에”, 10절에 “그분께서”, “그분에 의해”, 11절에 “그분께서”, “그분을”, 12절에 “그분을”, “그분의 이름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흐름에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절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라고 했을 때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그 이름, “예수님”을 떠올리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본문을 살펴본다면 “그분의 이름”은 문맥에 따라 일차적으로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함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 1:23). 

이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이는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일컬음을 받나니 그분께서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심판하시며 전쟁을 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의 이름은 신실하신 이요 참되신 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16절에 보시면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왕들의 왕, 주들의 주, 라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그분의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12,13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2 그분의 눈을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이 있으며 또 그분께서 기록된 한 이름을 가지고 계시되 그분밖에는 그것을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여전히 가지고 계실 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은 틀린 것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알려고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이상한 믿음과 삶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만 지침서나 설명서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참고서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악세사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누리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배움과 위로를 얻고 책망을 받고 바로잡히고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들 중에서 주께서 가장 높고 크게 하신 이름이 바로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주의 말씀”을 높이고 찬양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순간을 들여 말씀을 가까이 하고 떠올리며 생각하며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만나며 생각하며 사랑하는지가 판가름 될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생명을 더 풍성히 얻기 위하여 날마다 영접하고 마음에 품어야할 주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날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읽고 탐구하며 연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더 사랑하며 찬양하며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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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4.12.15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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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빛과 등불(시 119:105)

제목 : 나의 빛과 등불
본문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Thy word is a lamp unto my feet, and a light unto my path.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19편 105절 한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을 다 찾으셨으면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나의 빛과 등불”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에 기름부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인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은 이제 갓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암송해야할 구절이 무엇이냐 했을 때 첫 번째로 손꼽히는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요, 믿음생활의 기초원리요, 평생 잊지 말아야할 좌우명과도 같은 중요하고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인생을 언급할 때 우리는 자주 “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과거를 언급할 때는 “지나온 길”이라고 표현하며, 미래를 언급할 때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는 의미로 “진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은 구원받지 않은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사 53:6上)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잃어버린 자들에게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사 55:7上)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 14:12, 16:25)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사 55:8下)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길을 잃고 헤매며 각각 자기의 길로 갔다가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리고 길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구절인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은 참으로 거듭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본론
인생 길의 빛과 등불이 되는 주의 말씀

우리가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았다면 성경에서 “빛”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중요하게 사용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요”(요일 1:5)라고 말씀하시고,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빛의 자녀들”(엡 5:8)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주님과 우리가 나누는 교제를 가리켜 “빛 가운데의 사귐”(요일 1:7)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무장을 가리켜서 “빛의 갑옷”(롬 13:12)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탄은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고후 11:14)로 가장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나가는 과정 가운데 주의 말씀의 빛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짙은 흑암과도 같아서 아무리 그것을 예상하고 예측할지라도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우리의 발걸음을 한발한발 비춰주는 등불과도 같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헛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축복되고 의미 있는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의 말씀을 발 앞에 비춰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말씀의 빛을 발 앞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대할 때 “아멘”하며 자신의 빛과 등불이 주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관념과 자신의 판단으로 길을 선택하여 걸어갑니다. 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식이 많고 믿음이 좋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가르침을 자신의 빛과 등불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나의 앞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주의 말씀을 주의하고 있습니까? 주위 환경과 나의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말을 고려하기 전에 참으로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지식으로 길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시겠습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자는 없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마 11:11).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언자들 중의 가장 큰 대언자요(눅 7:28),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로 나아와 자신의 길을 묻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세리들이 와서 “선생님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묻자, “너희에게 정해 준 것 이상으로 거두지 말라”고 충고하였고, 군사들도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물으니 “아무도 폭행하지 말고 아무도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며 너희가 받는 급료로 만족하라”라고 말해주었습니다(눅 3:12-14).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침례자 요한을 보며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할 정도로 그는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해 증언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더라.” 성경은 단호하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들 중에 가장 큰 자요, 가장 큰 대언자였던 침례자 요한 조차도 “그는 이 빛이 아니요”라고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사람의 말과 가르침도 우리 길의 빛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놀라운 사도들도 다만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일 뿐이며, 그들 역시 이 빛을 주의하며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의 길에 유일한 빛이 되시는 주의 말씀을 우리 생활 가운데 더 가까이 하기 원합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
베드로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 13절에서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 참으로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여 일깨우는 것이 합당한 줄로 생각하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바와 같이 내가 머지않아 반드시 이 장막을 벗어야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15 또한 내가 떠나간 뒤에도 너희가 항상 이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애쓰리니” 

성경에서 장막은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장막을 벗는다는 말과 떠나간다는 말을 번갈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머지않아 반드시 이 장막을 벗고 주님께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 그리고 내가 떠나간 뒤에도 항상 너희가 이것들을 기억하도록 일깨우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부터 18절에서는 베드로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그 까닭은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게 할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그 까닭은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니라. 18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나온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친 말씀들이 거짓이 아니요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도 아니라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귀로 들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떠한 영광으로 오실 것인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체험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꿈과 환상을 보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베드로처럼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며 증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 베드로의 결론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속에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사도 베드로는 결코 자신의 체험을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길에 유일한 빛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온 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상황을 판단하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환경을 주의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을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심지어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도 듣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던 베드로가 말하기를,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주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한가지 항목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말씀을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시듯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결론
실제적인 시간사용

말씀을 주의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루에 10분 성경을 펼쳐서 읽는 것입니까? 매주일 예배당에 모여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까? 정치가들은 많은 신문과 사설를 매일 읽고 생각하며 정리합니다. 주식투자가들은 많은 경제분석과 세계동향을 순간순간 살피며 주의합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이러한 일들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정치계에서 어떠한 처신을 해야할지, 앞으로 세계경제의 흐름을 잘 파악해서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할지를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 합니까?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향하며 우리의 길을 어떻게 정해야 합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매순간 묵상하며 샅샅이 찾고 기억하며 탐구하고 연구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헤매며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하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주의를 기울이며 살펴야할 1순위가 있다면 바로 주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을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고백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03.06.1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시 23편)
본문 : 시편 23편


** 시작하는 말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매번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너무나 많은 교훈과 위로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시편 23편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시편 23편은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풍성한 것들이 넘쳐서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어떠한 것을 함께 나누면 좋을까를 고르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풍성한 말씀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이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께 이끌고 주님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격케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3편을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다윗의 시)
1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분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3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행로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4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저는 오늘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에 축복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시편 23편에 대한 간략한 설명
시편 23편은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성도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지고 사랑을 받았던 다윗의 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 말씀을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 이 시편을 다시 한 번 묵상하고 되새기면서 많은 공급과 은혜를 누렸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많이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3편은 위치적으로 볼 때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 22편과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 24편을 전후에 두고, 그 사이에 놓여진 시편으로서 "거듭난 성도들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보자면, 시편 22편은 "초림", 23편은 "교회시대", 24편은 "재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교회시대의 특징 중 하나를 꼽고 있는데, 바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경 다른 곳들에서도 우리 주님을 가리켜 "혼들의 목자와 감독",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으신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들이 그렇겠지만, 시편 23편은 더욱이 교회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완전히 적용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1절 -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절에서만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가 나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주"가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 또 주는 다른 누구누구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 또 "주는 과거에 나의 목자셨던 분이 아니라 현재 나의 목자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나의 목자는 나를 만족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영어 킹제임스성경 표현은 "I shall not want"입니다. 이것은 다만 "부족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풍성하게 넘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내게 만족 넘치며"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서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완전히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족시키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와 원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시편 23편 앞에 있는 22편이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 어느 목자도 자신이 직접 어린 양이 되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양에게 해로운 것, 양의 질병과 상태 등을 "표면적인" 관찰을 통하여 알아내지만, 우리의 목자는 "직접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어려움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목자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참되게 동정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참되게 도우실 수 있는 능력 있으신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2,3절 간략한 설명
1절에서 "나를 만족케 하시는 목자"를 기록하였다면, 2,3절에서는 "나를 인도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혼을 소생시키시며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자를 오해하여 그 인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하신 목자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만 있다면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말라고 쫓아다니며 말려도, 기어코 목자와 함께 하길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에 대해서 더욱 분명히 알기를 소망합니다.


** 4절 간략한 설명
4절에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의 목자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세상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탄식했던, "비참한 사망의 몸"안에 거하고 있으며,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마귀"를 대적하고 있고, 영혼들을 둘째 사망으로 이끄는 "이 악한 현 세상"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목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며 여전히,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목자를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 5,6절 간략한 설명
5절에서는 원수들의 면전에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고,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는 목자를 기록하고 있고, 6절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가 승리하고, 주님 앞에서 잘 살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며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을 더욱 알아가며 참되게 따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식탁을 마련하시는 목자
저는 오늘 이 풍성한 시편 23편의 말씀들 중에서 5절의 앞부분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원수들을 대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 나를 무겁게 에워싸는 죄들, 또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나의 자아와 육체, 또 마지막 원수인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은 내 안으로 영접한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구원초청 할 때에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고 거듭난 이후, 실제로 나의 목자와 함께 먹고 누린 경험은 별로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원수의 공격이 올 때 직접 나가서 대적하여 싸우다가 패배하고 넘어진 경험은 많이 있지만,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버젓이 식탁에 앉아 나의 목자와 교제하며 먹고 마신 적은 너무나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사면으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고달픈 환경 가운데 있을 때에조차 주님과 식탁에 앉아서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마셨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푸른 초장에서는 사면이 푸른 초장이고, 잔잔한 물가에서는 사면이 잔잔하겠지만, 5절에서의 식탁은 사면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식탁은 내가 내 안으로 영접한 나의 목자가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식탁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다만 앉아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목자
이 식탁은 우리 "안에" 마련된 것이기에 외적인 어떠한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면에서 고난이 닥치고, 사면에서 원수들이 둘러싸도 내 안에서 나의 목자와 함께 풍성한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어떠한 경험과 마음으로 이 고백을 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한 가지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이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6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27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 1:26,27).
외적인 수많은 상황들이 나를 짓누르고 힘들게 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식탁에 앉아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식탁을 마련하신 나의 목자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자가 내 안에 거하신다는 이 신비는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신 목자"를 직접 경험하고 고백한 다윗에게조차 감추어졌던 영광스런 소망의 신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식탁은 "우리 안에" 풍성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친히 어린양이 되셨고, 나를 위해 친히 생명을 내어놓으신, 나를 참되게 동정하시며 도우실 수 있는,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선한 목자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는 다만 높고 높은 하늘에서 이렇게 저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와 동행하며 교제하기 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 우리는 왜 풍성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많은 경우 이러한 풍성한 식탁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는 분명히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원수들의 면전에 있을 때 평안한 식탁에서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자주 사용하지만, 이 시간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주님은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누구든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목자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식탁을 마련하시며 우리와 함께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는 양들의 목자니라.
3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불러 그것들을 밖으로 인도하느니라. (요 10:2,3).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다른 길로 넘어오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 문을 통해 들어오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없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소위 라오디게아 교회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원수들이 사면을 둘러싼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목자가 계속해서 두드리시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도 문을 곧잘 열지 않는 것입니다.


**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목자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나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며 교제하기 원하셔서 나와 같은 위치인 "어린양"의 위치를 통과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와 교제하시기 위하여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나의 목자는 나와 교제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또한 원수들의 면전에서조차 나와 교제하시려고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엡 3:9).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신비에 참여하는 것"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었던 이방인들인 우리가, 행함이 없이 다만 우리의 목자의 보혈로 인하여 베풀어진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마다 값없이 누릴 수 있는, 그분의 양이 된 자들이 누리는 특권 중의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와 교제를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신 것은 다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과의 풍성한 교제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역사로 인하여 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서까지 발길이 닫는 곳마다 은혜의 말씀을 전파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알기 원합니다.


** 마무리
저는 오늘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목자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의 양털도 아니고, 나의 고기도 아니요, 나의 가죽도 아닙니다. 나의 목자가 양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는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처음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도 문을 두드리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는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고 풍성한 식탁의 교제로 부르시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날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나의 목자에게 문을 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과의 풍성한 식탁에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다만 나의 목자에게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선한 목자,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셨던 목자, 나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실하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고 그분과의 놀라운 신비의 교제를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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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왕상 18:15,16)


제목 :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본문 : 열왕기상 18장 15절 - 16절(실제로는 1절부터 16절)
"15 엘리야가 말하기를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가 오늘 아합에게 나를 반드시 보이리라." 하더라.
16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 

저와 같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기도회 전에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모아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말씀은 열왕기상 18장 15절,16절입니다(두번 반복).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제가 읽기는 15,16절만 읽었지만 실제 오늘 설교의 내용은 1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엘리야, 오바댜, 아합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마치 오늘날과 같이 배교하고 타락한 상황입니다. 이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이 바로 아합왕이었는데 성경은 이 아합왕에 대해서 아주 안 좋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아합왕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기 위해서 성경 한 장만 앞으로 넘기셔서 16장 30절을 보시겠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부터 34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주의 목전에서 자기 앞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하였더라.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을 행하는 것이 그에게는 마치 가벼운 것 같았으니, 그가 시돈인들의 엣바알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가서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였으며,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에 바알을 위하여 한 제단을 쌓았고, 
33 또 아세라를 만들었더라. 아합이 자기 앞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하였더라.
34 그의 시대에 벧엘인 히엘이 여리코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기초를 놓았을 때 그의 첫째 아들 아비람을, 그가 그 문들을 세웠을 때 그의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해 하신 주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성경은 아합왕에 대해서 자기 앞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 우리가 설교를 들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을 행하는 것이 아합에게는 마치 가벼운 것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섬기되 예루살렘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 말라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이 아합왕은 정면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왕이었습니다.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들을 만들므로 자신 앞에 있던 모든 왕들보다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한 악한 왕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은 "그의 시대에"라고 시작하는데 바로 아합왕의 시대에 있었던 한가지 일을 말해줌으로 그 시대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여리코를 건축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하여 이미 경고되었음에도, 아합의 시대에 살던 한 사람이 여리코를 건축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멸시받고 거부된 시대였던 것입니다. 

본론
1. 오바댜

이러한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삼 년 반 동안 기근을 보내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크릿 시냇가에서 까마귀에게 또 사르밧 과부에게서 부양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의 본문 18장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게됩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제 삼년에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내가 땅에 비를 내리리라." 하시더라."

이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타락한 왕 아합에게 보이기 위하여 길을 떠나게 됩니다. 한편 아합왕은 자신의 장관 오바댜와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삼 년 반 동안 큰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모든 강들과 시내들은 다 말라버리고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합왕은 땅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의 신임하는 장관 오바댜와 함께 땅의 한 부분씩 물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러한 도중에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게된 것입니다. 잠시 이 오바댜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 아합이 그의 궁의 장관 오바댜를 부르더라. (오바댜가 주를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4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멸했을 때,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명을 데려다가 한 굴에 오십 명씩 숨기고, 빵과 물로 그들을 먹였더라.)"
또 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2절의 뒷부분부터 보겠습니다.
"12 ...그러나 당신의 종인 나는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나이다.
13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 내가 어떻게 주의 선지자 백 명을 한 굴에 오십 명씩 숨기고, 그들을 빵과 물로 먹였는지, 내 주께 말씀드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여러분은 이 오바댜를 보실 때 마음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이 시대의 상황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타락하고 배교하고 어디서도 믿음을 찾아볼 수 없던 아합의 시대에 어려서부터 주를 크게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오바댜는 아합에게서 인정을 받고 신임을 받는 장관이 될 수 있었을 정도로 성실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큰 기근 가운데 물을 찾아 나서는 일에도 아합왕이 땅의 한 부분을 오바댜에게 위임했다는 것은 오바댜가 그 만큼 왕궁에 충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오바댜는 다만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를 크게 두려워하여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주고 먹여준 일이 있는 하나님을 인식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과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고 모든 나라의 일들을 함께 논의하던 오바댜가 아합이 모르게 주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였을 때에는 정말 대단한 결심과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자신은 모든 지휘를 잃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가족과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무서운 일을 오바댜가 감행했던 것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주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바댜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주님의 일을 남모르게 해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오바댜는 소선지서의 오바댜서를 기록한 선지자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소선지서 오바댜를 기록한 선지자는 현재 본문의 오바댜가 죽은지 훨씬 이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 엘리야와의 만남
아무튼 이러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대화들이 오고갔는지를 함께 살펴봄으로 아합의 시대와 같이 타락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는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오바댜와 엘리야의 대화를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7절부터 16절까지 교독하여 읽어보겠습니다.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 보라, 엘리야가 그를 만나니, 그가 엘리야를 알아 보고, 엎드려 말하기를 "당신이 나의 주 엘리야시니이까?" 하니, 
8 엘리야가 그에게 대답하기를 "그렇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라." 하더라.
9 그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기시어 나를 죽이려 하시나이까?
10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가 당신을 찾으려고 보내지 아니한 민족이나 왕국이 없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여기 없나이다.'하면, 그는 그들이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을 왕국과 민족으로부터 맹세를 받았나이다.
11 그런데 이제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하시니, 
12 내가 당신을 떠나면, 곧 주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가실 것이요,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나를 죽이리이다. 그러나 당신의 종인 나는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나이다.
13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 내가 어떻게 주의 선지자 백 명을 한 굴에 오십 명씩 숨기고, 그들을 빵과 물로 먹였는지, 내 주께 말씀드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 그런데 이제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주께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하자, 
15 엘리야가 말하기를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가 오늘 아합에게 나를 반드시 보이리라." 하더라.
16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에게로 가서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오랜 기근 끝에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겠다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믿지 못하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과 주의 선지자들을 먹였던 사람인 것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여태까지 엘리야를 찾아다녔던 이야기와 자신이 아합에게 죽임 당할 위협을 설명합니다. 엘리야의 응답은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가 오늘 아합에게 나를 반드시 보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후에 아합왕을 만나고 칼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큰 기근의 종결을 고하는 비를 내리게 합니다. 

3. 오바댜와 엘리야
사실 오늘 본문은 이유 없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러 간 사건만을 기록하려 하였다면 8절에서 바로 16절로 갔어야 했습니다. 8절에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라."하더라"는 말씀 직후에 16절에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는 말씀으로 곧바로 연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굳이 엘리야와 오바댜의 대화를 무려 9절부터 15절까지 여섯 구절이나 할애해서 적어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에 멈추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귀한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보시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며 주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였던 오바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아합왕 앞에 나서는 엘리야. 저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읽고 또 생각하면서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의 모습은 아닌가하고 돌아보게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악들이 마치 가벼운 것 같았던 아합왕의 타락하고 배교한 시대에 주를 두려워하고 주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이는 봉사와 섬김을 한 오바댜는 실로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가뭄에 빗방물을 얻은 것 같이 귀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기준, 엘리야와 오바댜가 만난 곳에서 저는 정말 분연히 일어나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와 오바댜는 대화가 안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시대의 흐름을 뒤바꾸고 개혁할만한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가지고 말해내는데, 오바댜의 반응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를 죽이려 하시나이까", "내가 어떻게 주의 선지자들을 먹였는지" 등등을 말하면서 자신 안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눈을 들어 이 시대를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해내는데 한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서 엉뚱한 대답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까 심히 두렵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딤 3:1).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주님께서 역겨워서 토하여 내치실 만한 미적지근하고 타협한 배교의 시대입니다. 아합왕의 때에 주님의 말씀이 다 사라지고 수많은 바알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판을 쳤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시대도 이러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그나마 이 땅에서 우리는 오바댜와 같은 사람들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바댜가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서 먹여주었던 것과 같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섬김과 봉사와 희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책들을 펴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난 장면에서 그는 아주 엉뚱한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물을 찾고 있던 오바댜의 눈 앞에 하나님께서 내리실 큰비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오바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먼저 엘리야를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음을 알리라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오바댜에게는 자신을 죽이려는 말, 또는 믿지 못할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를 보내셨는가를 생각할 만한 겨를이 없을 정도로 자신 안에만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오바댜는 분명 과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주는 위험을 무릅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고 교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러한 위험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과 멀어진 한 사람, 과거의 영화를 계속해서 반복하여 말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바댜에게는 과거에 주님을 섬겼던 간증이 있었지만 현재에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주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주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바댜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 고백입니다. 오바댜가 만약 엘리야를 만나는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면 그의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합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라."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당신에게 주셨나이까? 우리가 여태까지 당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나이까? 이제 비를 주시려나이까? 아합왕에게 심판을 내리시려나이까? 온 백성이 바알과 아세라들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기 바라나이다. 속히 가서 아합왕을 데려오겠나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 

오바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었다면 엘리야가 나타나서 아합을 만나려는 일에 어떠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다면 타락하고 부패한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주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가 올바른 관점으로 아합의 장관 역할을 하였다면 그의 왕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그가 엘리야를 만났다면 그는 오늘의 본문과 같이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바댜가 어찌하여 이렇게 주님과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 만을 관심하는 소극적인 믿음의 태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과거의 영화만을 자랑하며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시대의 흐름이 너무도 강력하게 주님과 멀었기 때문에 그 흐름과 맞서 싸우다 지쳐버려서 멀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오바댜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오바댜는 성경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여 자신의 재물과 직위와 가족과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을 만한 위험을 무릅쓰고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주고 먹여주었던 오바댜. 이 오바댜는 현재 주님의 일과는 너무도 멀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나이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섬김을 했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나이까?"라고 고백하지만 엘리야는 그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엘리야가 칼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 사백 오십 명과 대결하여 이긴 뒤에 그들을 모두 키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죽이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때 엘리야는 심히 낙담하여 죽기를 구합니다. 여러분 그때 엘리야가 한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음이니이다. 나, 오직 나만이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도 앗아가려고 찾고 있나이다"(왕상 19:10).

주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렇게 기도할 당시에 엘리야의 인식 속에 오바댜라는 사람은 결국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과 같이 분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분명 오바댜를 만났었지만 "나, 오직 나만이 남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볼 때는 자신이 지쳤을 때 위로를 받을 수도 없는, 그냥 없는 것 같은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4.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오바댜와 같이 과거의 영화만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과거에 이러이러하게 주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지만은 않습니까? 현재는 어떠합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나는 그것에 대해 깨어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올바른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주님과 동행했을 때의 오바댜는 자신의 생명, 직위, 가족보다 주님의 일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오바댜는 "자기가 죄를 지었나 안 지었나", "내가 죽을까 안 죽을까"만을 관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주님을 섬겼던 어떠한 일들, 과거에 주님과 동행했던 일들을 자랑하며 기쁘게 간증해내지만 현재의 하나님의 역사와 현재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나의 죄 문제, 나의 생활 문제, 나의 믿음 생활, 나의 섬김, 나의 건강, 나의 은사... 모두가 자신에게 관심이 맞춰져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하늘의 흐름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오바댜가 정말 주님과 바른 관계를 지속하였다면 엘리야가 낙담하고 힘들게 되었을 때 옆에서 큰 부축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나에게는 생각을 같이하여 너희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느니라"(빌 2:20,21).
그러나 다행히도 사도바울은 이어서 "그러나"라고 말하며 디모데와 에파프로디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기까지 바울과 생각을 같이하며 바울을 부축했던 동역자들이 바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의 엘리야에게는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지치고 힘들 때에는 위로와 부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그와 생각을 같이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염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오바댜라는 과거에 주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믿음 생활, 나의 생활 환경, 나의 어려움들... 우리가 이러한 것들만을 관심할 때 언젠가 우리는 지쳐 쓰러질 것이고 우리 옆의 지체들도 하나하나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도 넘어지는데, 바울 사도도 도움이 필요했는데 우리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들은 각자가 자신의 일들만을 관심하지 아니하고 서로를 관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 안에서 벗어나 밭을 바라보고 주님의 일을 관심해야 합니다. 또한 형제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하며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영화를 내려놓고 현재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현재 주님과 동행해야 하며 현재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오바댜와 같이 주님과 멀어지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한때는 목숨을 내놓고 따르다가도 점점 주님과 멀어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대화가 안 통하면서도 과거의 일들만 나열하는 답답한 사람이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을 통한 경각심이 일어나고 우리의 삶에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오늘날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엘리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영화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바댜와 같이 자기 자신만을 관심을 때 우리의 전진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밭을 보아야 합니다. 
현재 이 시대는 엘리야의 때와 같이 극심한 기근의 시대입니다. 빵의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닙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입니다(암 8:11). 이러한 때에 우리는 각자의 믿음 생활을 위해서 오바댜와 같이 땅을 찾아 헤매며 각자가 뭔가를 추구해 보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의 일들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선행되기를 원합니다. 라오디케아, 시민의 권리라는 말처럼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이익만을 존중하는 이기적인 시대의 흐름 가운데서, 나 자신 안에만 갇혀있던 눈들을 들어올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눈을 들어 밭을 바라보며 일꾼을 보내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러할 때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임 가운데 주님의 강한 임재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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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행실(렘 17:10)/로빈


2002.10.09.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마음과 행실

본문 : 예레미야 17장 10절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마음과 행실“입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전에 제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쳤던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 등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특성들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두 가지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시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각 사람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잠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씀만큼 강조되어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하 19:7) 그런즉 이제 주의 두려움을 너희 위에 두고 조심하여 그 일을 행하라. 주 우리 하나님께는 불법도 없고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는 것도 없으며 뇌물을 받는 것도 없느니라, 하니라.

(삼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제를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5장에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것들을 열거하시면서, 이러한 악한 것들이 속에서부터 나와 그 사람을 더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는 삶의 문제들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열심을 다하여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명들 중에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을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어떠한 선행이나 봉사나 노력을 주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드렸는가를 관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시려고 뜻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사울보다 능력과 자질이 뛰어나서 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키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 하시고 (행 13:21,22).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속을 시험하시며 자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이 내 길들을 지키게 할지니

마음을 살피고 속을 시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 각자에게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갚으시는 하나님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17장 10절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고 속을 시험하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을 심판하시며 갚으시고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심판과 저주로 갚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자가 된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과 통치권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 마땅히 믿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상하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 무엇을 보시며 무엇으로 갚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단지 한번 들여다보시고 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을 시험하시고 우리에게 갚아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고 속을 시험하시되, 갚으실 때에는 그 사람의 드러난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면 마음에 무엇을 품었는가를 보고 갚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실 때에는 우리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후 5: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졌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때에는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으로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의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외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과,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조화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 세 구절만 보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곧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속과 마음을 살피시는 동시에 각자의 행위에 따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거기에는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각자 자신의 행한 것에 따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으시고 보상하시고 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에 관하여 기록된 말씀들은 살펴보면 심판은 각자의 행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보시는 분이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속에 있는 마음을 보시면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판단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행실을 하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게 되어있고, 마음에 가득한 것이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행실에 따라 갚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시기 원합니다. 


** 섬김이 없는 마음은 헛되다.

우리는 보통 “나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 쉽게 아멘 할 수 있습니다. “맞아, 나는 마음은 있어.”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또는 “지금 섬기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실제적인 준비들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실제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셔.”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때는 자신의 실제적인 행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섬기기 원하는 마음을 한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생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으로는 주님을 섬기기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마음만으로는 주님 앞에 보상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랑이 표출될 것입니다. 누군가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벌써 어느 곳에서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원하는 마음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실제적인 섬김이 없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구나.”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주님을 섬기겠다는 그의 마음은 매를 맞고 돌에 맞고 파선을 당하고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을 비롯한 수많은 어려움들을 뚫고 그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가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 가만히 앉아서 마음만으로 주님을 섬기고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나는 실제적인 섬김은 없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나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마귀에게 속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실제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공허한 말들을 제거하기 원합니다. 섬김의 실제가 없으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실패도 안하고 넘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간음도 했고 살인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이키고 회복하여서 주님을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가 하나도 없고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주님을 필요로 하며 사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든, 또는 뭐라고 하지 않든 간에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음은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섬김들이 없다면 이 시간에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돌아보기 원합니다. 


** 두 가지 속이는 것

마음과 행실, 주께서는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 실제로 우리의 몸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섬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나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속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마음은 없으면서도 몇 가지 일들을 형식적으로 해내고 있다고 해서 나는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속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치우치기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도 원하시고 몸도 원하십니다. 마음만의 드림도 부족하고 몸만의 드림도 부족합니다. 마음이 가득하다하면서 실제적인 섬김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도 모순이며, 몸을 드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으나 마음이 다른데 가있다면 그것도 헛될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섬김이 없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어떠한 섬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이라고 모두 다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섬김은 미워하시며 역겨워 하십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주님의 그러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희생제물로 주님께 드렸지만 주님은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사 1:11)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예물들을 주님 앞에 가져왔지만 주께서는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사 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사 1:13)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다른데 가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른데 가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형식적으로 가져오는 예물들과 희생제물들과 엄숙한 집회들까지도 가증하게 여기시며 견딜 수 없어하시고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우상들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사람의 수공물이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형식적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가져다 드리면 만족해하는 분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악은 무엇입니까? 그 중 한 가지는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을 만큼 그들을 사랑하시고 참된 길로 이끌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분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들이 실족할 만큼이나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선은 하나님을 속이려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7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대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7,8).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술에 속는 분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아부하듯이 “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시는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입술로 그렇게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입술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정작 마음속에는 세상과 재물과 스포츠와 나의 유익만 가득 차 있으면서 입술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기도회로 모였고 몸은 모두 이 자리에 앉아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물은 우리 주님 자신이길 원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의 고백이 우리 입술로 만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까? 집회 시에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에 실제적인 드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기 원한다는 고백을 하였다면 그것을 열매로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자신이 굳이 입증하려 하지 않아도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우리를 죄악과 저주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시면서 높고 높으신 보좌 위에 앉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노라.“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하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적으로 주님 앞에 섬기는 것이 없으면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한다면 그것만큼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적인 드림이 없다는 것은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정말 마음은 있는데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마음은 있는데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지금처럼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러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편했기 때문에 주님을 잘 섬겼던 것이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영적인 서적들도 부족하고 어찌 보면 교리적인 지식들도 우리보다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흥의 역사들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참된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만약 육상선수가 되고 싶은 소년이 있다면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할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권유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소년이라면 누가 말려도 계속해서 연습할 것입니다. 자신을 더욱더 철저한 훈련 가운데 두며 피나는 연습을 꾸준히 지속할 것입니다. 그 소년이 선천적으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하려는 그의 마음과 열망이 언젠가는 그를 육상선수로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열망은 그를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달리도록 만들 것이며 계속해서 자신을 훈련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목사님이 또는 앞선 형제님들이, 달려라 달려라해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형제, 섬겨야지.”, “자매, 이 일 좀 해봐.”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섬길 일들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선천적으로 어떠한 일들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이 앞에 차려져 있는데 먹지는 않으면서 “나는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제의받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서 “나는 그 일을 하기 원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마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기회가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대학을 나온 인재들도 취직을 잘 하지 못할 만큼 취직하기가 어려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언제나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조건은 한 가지, 그가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께 감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직분을 맡은 것을 부담스럽거나 거북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 사도바울은 정말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시기 전에 한 가지 보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은 무엇입니까?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에서 ”선하고 신실한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말씀을 볼 때 신실함과 게으름이 반대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어떠한 것을 꾸준히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직분을 줄테니까 앞으로 신실해야 해.“라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직분을 주시기 전부터 그가 신실한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은 어떠한 직분, 어떠한 일이 주어지기 전부터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부지런하게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도바울이 주님의 일에 신실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 안의 열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품은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부지런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꾸준히 부지런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러했기에 주님께서 그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주님을 더욱 섬기기 원하였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뭐라고 부르는지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누가 주셨습니까? 바울 안에 원래 능력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직분과 함께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열망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열심을 해고 부지런하고 신실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직분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주님의 일을 맡아서 섬기는 것은 나의 능력과 관계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주님의 일을 결코 만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오직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마음입니다. 오직 나의 마음입니다. 능력의 부족, 지식의 부족 그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을 공부하고 갖추고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양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장과 용모와 재능과 특기를 주의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 마무리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제가 처음 설교를 준비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받는 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주님 앞에서의 섬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로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더 되새기고 준비하면서 마음 없이 몸을 드려 섬기는 것 또한 헛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가 행한 것들을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행함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선적으로 억지로 주님을 섬기고 나서, 섬겼다고 말하는 그러한 섬김에는 보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던 이사야 1장 말씀과 같이 그것들을 미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되 그 행위의 동기와 의도 또한 살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마음과 행위가 따로 갈 수 없습니다. 마음만의 드림, 마음만의 헌신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마음 없는 섬김, 마음 없는 봉사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마음을 드렸다면 몸도 같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땅에는 이미 종교적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 의무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 율법적으로 믿음생활 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것들에 신물이 나셨고 역겨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시험하시며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해드릴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 실제적인 몸을 드려 섬기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온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 없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기 원합니다. 많은 말들로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를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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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의 순종(창 16:1-10)/로빈


2002.08.07.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위치 안의 순종

본문 : 창세기 16장 1절-10절

1 그런데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그녀에게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집트 사람이요,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더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한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이 지난 뒤였더라.

4 ¶ 그가 하갈에게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니라.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므로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하는 부당한 일을 당신이 당하기 원하나이다. 내가 내 하녀를 주어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나를 멸시하니 나와 당신 사이에서 주께서 판단하시리이다, 하니라.

6 그러나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그녀를 학대하니 하갈이 그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니라.

7 ¶ 주의 천사가 광야의 물 샘 옆에서 곧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옆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8 이르되,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하매

9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하고

10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니라.

내일은 수련회 날입니다.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세 번이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준비한 본문과 주제로 설교하려다가 수련회 전날인 만큼 수련회를 준비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준비하는 것은 좀 무리인 듯싶어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제가 이미 한번 받았고 누렸던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위치 안의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가 우리들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데 부축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본문 설명 

본문에서 하갈은 이집트인 여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였습니다. 파라오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집에 큰 역병들로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혀내십니다. 그때 파라오는 아브람에게 화를 내며 아브람을 내어 쫓습니다. 하갈은 아마 이때 아브람과 함께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하갈은 아마 사래를 파라오의 집에 데려올 때부터 사래를 시중들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집트에 있는 많은 여종들 중에서도 파라오의 집에서 일하였던 것을 보면 굉장히 잘나가던 여종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하갈은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나오면서 사래의 종으로 같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자식을 갖고 싶어 했던지 아브람에게 가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아내로 삼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예상했던 것처럼 하갈은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래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하갈이 그녀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화가 나서 아브람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라고 대답합니다. 사래는 그 말을 듣고 하갈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여종들에게는 시키지 않는 굳은 일을 시키고 힘든 일을 많이 심하게 시켰을 것입니다. 하갈은 견디다 못해 도망을 나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갈은 매우매우 억울합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여종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래라는 여자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주인 파라오는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고 자신은 그녀의 여종이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사래라는 여자가, 함께 온 아브람이라는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자신은 사래의 여종이 되어 이집트에서 함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으로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아주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이상한 여자의 여종이 되어야 하는가? 난 이집트에 남았어야 했어. 계속해서 같이 지내다보니 사래는 임신도 못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마음속으로 사래를 계속해서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자신의 남편 아브람의 아내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임신하였고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자 드러내놓고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래는 아브람에게 불평하고 아브람은 사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이제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멸시의 대한 진노를 하갈에게 퍼붓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하갈은 도망가면서 흐느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뒤엉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 또는 사래에 대한 억울한 마음 등이 뒤엉켜 비참하게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하갈을 부릅니다.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주님은 그녀를 부를 때 “오 불쌍한 하갈아”, “오 사랑하는 하갈아”, “복 받은 여인 하갈아”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부르실 때 “사래의 하녀 하갈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 “사래의 하녀”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갈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러자 하갈은 대답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성경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한마디로 대답하지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 앞에서 울부짖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주님 제 처지를 좀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임신도 못하는 제 여주인 사래가 자기를 대신해서 자식을 낳아달라고 하길래 그렇게 하였더니 이제는 저를 시기해서 저를 박대하지 뭡니까!? 그래서 저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이때 주의 천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오 상처받은 영혼 하갈아, 위로를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의 나쁜 여주인 사래에게 경고하리라.” 이렇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먼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하갈에게 주실 축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위로인 것입니다.


**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 순종 

성경은 순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교회를 방문하였던 조 윌리암 형제님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순종”이라고 말할 만큼 성경은 순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최종권위이며 우리는 이 권위아래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이시요 권위자들 중의 권위자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수많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롬 5:19)


하나님께서 순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조차 하나님은 순종, 불순종의 여부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살후 1: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지옥에서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많은 죄들을 지어서도 아니요, 많은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많은 선한 일들을 많이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순종, 불순종의 문제로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아 보이고 영적으로 보이는 일도 순종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각 제사를 드리는 방법들, 그에 따른 제물의 종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어떠해야 하는 지와 같은 것들을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 15:22,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순종에 대해서 참으로 강조하며 또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위치 안에서 하는 순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주관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질서체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의 위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 모두의 위치를 친히 안배하셨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위치와 자녀의 위치, 부부사이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위치, 교회 안에서는 감독과 성도들의 위치, 또 세상에서는 왕들과 권세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위치를 모두 안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능력별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가를 살피고 순종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인가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위치 안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저 형제님은 뭐가 어때”, “우리 부모님는 뭐가 어때”, “내 남편은 뭐가 어때”하며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그 권위자가 나에게 와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우리는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위치는 그 사람보다 낮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 사람보다 높아져서 그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과도 같습니다. 사래를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하갈에게는 사래에게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님 앞에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발견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위치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위에 있는 권위도, 또 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주님께서 안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는 잘 순종하겠는데,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렵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겠는데 보이는 형제들은 어렵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요일 4:20)

이것은 순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노라.” 하면서 자기 권위자에게 거역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권위자에게 거역하면서 어떻게 본적이 없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의 순종의 본 

우리는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가 완벽한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인가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나에게 권위자로 안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나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 절기가 끝나서 돌아올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셨으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행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하룻길을 간 뒤 예수님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는데, 예수님은 박사들 가운데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다가가 어린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까? “아! 아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여인이여 당신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은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십니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가심으로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순종의 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과는 비교도 안되는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위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능력과 지혜로 치자면 그들은 예수님과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무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순종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자가 지식이 있는가 능력이 있는가를 실수가 없는 사람인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우리를 그 위치로 안배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갈에게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 교만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한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로 답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도 그러했고, 우리의 경우도 자주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요,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많은 경우,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권위자를 멸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위치는 낮지만 우리의 마음은 높아졌기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갈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녀의 여주인을 멸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임신하였고 자신의 여주인은 임신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높아진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갈은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은 떼어놓을 수 없고, 교만과 거역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불순종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거역하지 않을리 만무한 것입니다. 

누가 구원받지 못합니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겸손과 순종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겸손이 가면 순종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의 문제로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약 4:6,7) 

겸손과 복종이라는 단어가 함께 이어져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젊은 사람들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너희가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오늘날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일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권위자를 나와 비교하고 판단하는 악한 습관을 버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온전히 낮아질 때 우리는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먼저이다

저는 오늘 순종에 대해 말하면서 한 가지 순서를 올바르게 하고 넘어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주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너의 권위자에게 복종하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진리를 반대하는 권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나의 남편이 진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권위자인 남편이,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시오.”한다고 해서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다 같이 사도행전 5장 27-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 그들이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물어

28 이르되, 너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보라, 너희가 너희 교리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또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도다, 하니라.

29 ¶ 이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권위가 있는데, 대제사장이라면 더욱 높은 권세자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엄하게 명령한 것을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놓고 거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는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거리에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전파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누군가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일지라도 대항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절대 한발자국도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한발자국이라도 물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수많은 순교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와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교황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떠한 권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성경에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는가? 너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거역하는가?” 왕은 그 순교자의 믿음을 포기시키려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나의 믿음을 부인할 수 없고, 왕께 순종하기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이요 그 다음은 다른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 결론

오늘 이러한 말씀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순종이라는 부분을 각인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능력 많고 지식이 뛰어난 엘리트 같은 그리스도인보다 무식한 종같이 시키는 대로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의견과 권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권위의 말씀이 떨어질 때 입을 다물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절대적으로 순종하였기에 주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자들로 세우신 자들에게 복종하기 원합니다. 그들을 거역함은 우리를 그 위치 안에 두신 하나님을 거역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높아진 마음들이 낮추어지기 원하고, 나의 권위자를 비교 판단하는 모든 악한 죄악들이 철저히 버려지기 원하고, 오직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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