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30.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21
새로운 시작(삼상 22:1,2)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22장입니다. 사무엘기상 22장 1,2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거기서 떠나 아둘람 굴로 피하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이 그 일을 듣고는 그들이 거기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더라.
2 고난 중에 있던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던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었더라. 거기에는 그와 함께한 사백 명가량의 사람이 있더라.
저는 오늘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하는 전환점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에, 골리앗에게 승리를 하면서, 영광스러운 길을 걷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견제와 시기를 받게 되면서부터, 모든 일이 꼬여버렸고, 생명까지 위험해 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요나단을 의지하기도 하였고, 자기의 아내인 미갈을 의지하기도 하였고, 또 사무엘을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요나단을 통하여 사울 왕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였고,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는 수염에 침을 흘리면서 미친 사람의 시늉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기의 지혜와 방법대로 안전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다윗은 결국 스스로를 망쳤으며,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도왔던 좋은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비참할 대로 비참해진 다윗의 발걸음은 더 이상 내려갈 바닥도 없을 만큼 끌어내려졌습니다.
사자와 곰을 쓰러뜨리면서 아버지의 양을 지켜내고, 조약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까지만 해도 무엇인가 대단한 사람이 된 줄 알았던 다윗은 이제 목숨을 겨우 부지하기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바로 이렇게 사람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끝나버린 그 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는 100세가 되었던 순간이었고, 요셉에게는 감옥에 갇히고 잔 맡은 자가 자신을 잊어버린 지 2년이란 시간이었고, 모세에게는 양떼를 치며 80세 노인이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고 장사를 지낸지 삼일이나 지났던 순간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겟세마네에서 순순히 잡혀가시고 십자가에까지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을 멀리서 목격하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사람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다 사라지는 순간을, 최후라든지, 마지막, 끝으로 보여주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아둘람 굴이 바로 그러한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다윗의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마음과 용기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바로 그 시간을, 모든 것이 끝나버린 최후의 순간이 아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최초의 순간으로 삼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아둘람 굴 - 가족들과 만남
우리는 사무엘기상 22장 1절 말씀에서 다윗이 아둘람 동굴로 피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둘람이라는 말은 피난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굴은 어둡고 음침하며 습기가 많은 장소입니다. 벌레들도 많고, 박쥐들도 많은 곳입니다. 성경에서 동굴은 또한 죽은 사람의 무덤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동굴 속에 숨은 다윗의 모습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 무덤이라는 의미로, 완전히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집도 없이 도망치며, 방황하며 헤매는 나그네가 된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방법이 모두 다 끝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처럼, 무덤에 장사지낸 자처럼, 완전히 끝나고, 오로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인도하심은 바로 다윗의 가족들이 그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가족들로부터 그다지 존중을 받지 못하는 막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이 다윗을 만나러 찾아온 것입니다. 이 일은 고난 중에 있던 다윗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함께 3-4절을 보시겠습니다.
3 다윗이 거기서 모압의 미스바로 나아가 모압 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려는지 내가 알 때까지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소서, 하고
4 그들을 모압 왕 앞으로 데려갔더니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줄곧 그들이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다윗은 자신에게 찾아온 가족들을 모압 땅으로 데리고 가서 모압 왕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혹시라도 다윗을 잡기 위해 가족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려는지 알 때까지 보호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모압 왕에게 부탁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우리가 성경에서 구체적인 상황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압 땅이, 바로 다윗의 증조 할머니인 모압 여인 룻의 고향인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으로부터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피하기만 하였었는데, 이제는 가족들을 돌아볼 수 있을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압 왕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려는지 지금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아둘람 굴은 다윗에게 새로운 시작이 되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실패와 절망의 그 순간이 주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합니다.
** 아둘람 굴 - 사백 명 가량의 사람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2장 2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고난 중에 있던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던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었더라. 거기에는 그와 함께한 사백 명가량의 사람이 있더라.
다윗을 찾아온 사람들은 가족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사백 명 가량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윗이 있던 아둘람 동굴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있던 자들이었고, 빚진 자들이었고, 불만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사울이 통치하던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 받던 비참하고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가 된 다윗에게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2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아둘람 굴에 들어온 다윗과 같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비천하고 더러운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시되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들을 만나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 고통과 상처와 뜻 모를 슬픔 가운데 허덕이는 우리들,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으로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우리들을 만나주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둘람 동굴과 같은 돌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둘람 굴에 다윗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더듬어 찾아온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내치지 않고 다 받아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좋은 주님을 우리가 찬양하기 원하고 따르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바로 우리가 다윗과 같이 섬기는 자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인생의 절망 가운데 있었던 사람에서 놀라운 승리의 용사들로 변화되어진 것과 같이 우리 또한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웅으로서, 또는 왕의 사위로서 왕궁에 거하고 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이해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윗을 낮추시고, 진정 이스라엘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돌볼 수 있는 참된 목자요, 왕으로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절망과 실패 가운데 있다면, 오늘 우리가 아둘람 동굴에 숨어들어간 처지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묻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하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상처받고 고통 받는 영혼들을 품을 수 있고, 담을 수 있고, 받아줄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훈련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 높은 곳에 있으면 만날 수 없는 귀한 영혼들을 만나게 하시려고 우리를 아둘람 굴까지 낮추십니다.
아둘람 동굴은 실패자들이 모인 곳이었고, 낙오자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놀라운 회복의 동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둘람 굴에서부터 들어 올리셔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둘람 굴은 최후의 장소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최초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 아비아달과 만남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2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대언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요새에 머무르지 말고 떠나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하니 이에 다윗이 떠나서 하렛 숲에 이르니라.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인도하심을 받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유다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아둘람 굴에 들어와야 할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9-10절을 보시겠습니다.
9 그때에 사울의 신하들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에돔 족속 도엑이 응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그가 그를 위하여 주께 묻고 그에게 양식을 주며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을 주었나이다, 하니라.
여기에 보면 에돔 족속 도엑이 다윗과 아히멜렉의 행적에 대하여 사울 왕에게 고발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거짓말로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을 속였고, 아히멜렉은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해서 아히멜렉과 놉 지역의 온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자세한 내용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11-16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던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즉 그들 모두가 왕에게 이르니라.
12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이제 들으라, 하니 그가 응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곧 너와 이새의 아들이 나를 대적하려고 음모를 꾸미며 네가 그에게 빵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가 이 날에라도 매복하였다가 일어나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4 그때에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가운데 다윗같이 신실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는 왕의 사위도 되며 왕의 분부대로 가기도 하고 또한 왕의 집에서 존귀한 자이니이다.
15 내가 그때에야 비로소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여쭙기 시작했나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께서는 왕의 종과 내 아버지의 온 집에게 아무 책임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에서 많든 적든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16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그러하리라, 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비극적인 일을 보게 됩니다.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다윗을 도왔던 제사장 아히멜렉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멜렉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의 도시인 놉 지역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살육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아각 왕은 살려두었으면서도, 지금 여기는 하나님의 제사장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멈추고, 육신 가운데 걷는 자가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잘 살펴보면, 지금 여기서 아히멜렉이 죽임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오직 다윗 때문에 일어난 것만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아히멜렉이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까? 네, 바로 아히둡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성경에 여러 명의 아히둡이라는 이름이 등장을 하는데, 그 중에서 바로 이 아히멜렉의 아버지였던 아히둡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 잠시 사무엘기상 14장 3장을 보시겠습니다.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이가봇의 형제인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 있던 주의 제사장 엘리의 증손이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기상 1장에 등장했던 엘리 제사장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을 알았음에도, 또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방치하여서, 심판을 받게 되었던 제사장이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주의 언약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언약궤는 빼앗겼으며,엘리 제사장은 그 소식을 들을 때, 의자에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날에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서 죽게 되었는데, 바로 그 아들의 이름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는 의미의 이가봇이었습니다. 이가봇에게 형이 있었는데 바로 그 형의 이름이 아히둡이었습니다. 지금 여기 3절에 등장하는 아히야는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했던 아히멜렉과 동일 인물이거나, 또는 형제라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아히멜렉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편으로 다윗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것은 바로 엘리 제사장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3장 12,13절을 보시겠습니다.
12 그 날에 내가 엘리의 집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을 그에게 다 행하리라. 내가 시작하면 또한 끝을 내리라.
13 그가 알고 있는 불법으로 인하여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리라고 그에게 말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그가 그들을 억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바로 이 심판이 지금 엘리의 아들인 비느하스, 그리고 비느하스의 아들인 아히둡, 그리고 아히둡의 아들인 아히멜렉에게까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돕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나마 의롭고 영광스러운 죽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시 비극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오늘 우리들의 삶이 후대에, 우리의 자녀의 자녀의 자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엘리의 집을 향한 심판을 이행하시는 가운데 아히멜렉의 한 아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2장 20-23절을 보시겠습니다.
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들 중에서 하나가 도피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더라. 그가 다윗의 뒤를 따라 도망하니라.
21 아비아달이 사울이 주의 제사장들을 죽인 것을 다윗에게 알리매,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족속 도엑이 거기 있기에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내가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을 죽게 하였도다.
23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머무르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느니라. 그러나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비아달의 집의 모든 사람을 죽게 하였다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23절에서 아주 인상적인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마지막 말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다윗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을 두려워했고, 아기스 왕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자신이 안전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믿음의 발걸음을 새롭게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 시편 57편
이제 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시편 57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시편 57편의 가장 위쪽에 있는 머리말을 보시겠습니다.
(악장에게 준 다윗의 믹담, 알다스헷, 그가 사울을 피하여 동굴에 있을 때에 지은 시)
여기 머리말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 시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동굴에 있을 때에 지은 시입니다. 아둘람 굴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아둘람 굴에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우리 함께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내 혼이 주를 신뢰하오니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참으로 이 재난들이 지나갈 때까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 내 피난처를 두리이다.
2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
다윗은 피난처를 의미하는 “아둘람”이라는 말처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난처를 두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의 긍휼을 신뢰할 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구절로 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양을 드리리이다.
죽음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통과하였던 다윗은,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어떻게든 안전히 보려고 노력했던 다윗은, 이제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로 마음을 확정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는 노래가 나오고 찬양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었고, 모압 왕 앞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할 수가 있었고, 고난 중에 있던 자들을 돌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아비아달에게 안전할 것이라고 위로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아둘람 동굴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망한 뒤에, 인생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둘람 굴과 같은, 무덤과 같은,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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